살아남은 자의 몫…늦깎이 해설사 된 김순이 씨 [영상채록 5·18]

입력 2023.09.13 (06:00) 수정 2023.09.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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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일빌딩245 ‘19800518, Memorial Hal’ 헬기 사격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는 관람객과 김순이 해설사(왼쪽)광주 전일빌딩245 ‘19800518, Memorial Hal’ 헬기 사격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는 관람객과 김순이 해설사(왼쪽)

1980년 5·18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광주 금남로의 전일빌딩245. 당시 헬기 사격 탄흔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관람객이 제법 많지만 모두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길어야 30분 남짓입니다. 참고 기사 전일빌딩 245로 재탄생…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2020년 5월 11일 KBS뉴스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443636

김순이 씨는 최근 이곳 전일빌딩245에서 해설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 씨는 1980년 5·18 당시 최후항쟁지 전남도청에 있었습니다. 4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날(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5·18해설사 활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국에서 오신 분들이 많은 시간을 갖고 오시진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뜻이 있고 그런 분들이 오시면 전남도청 안에서 살아남았던 과정을 얘기해 드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슴에 와 닿으셨는지 저를 안아주시기도 하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주시고.

■5·18 참여로 이어진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연

김순이 씨는 5·18 이전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알게 됐습니다. 20살 어린 나이였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이 생겼습니다. 다니던 직장(호남전기)에서 노조 대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선거에선 낙선했습니다.

대의원 선거 출마로 이른바 '정체성'이 드러난 뒤 회사 측은 김 씨에게 일을 제대로 주지 않고, 열악한 작업장으로 돌렸습니다. 김 씨를 압박하며 사실상 퇴사를 종용한 겁니다. 김 씨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습니다.

퇴사 후엔 가톨릭센터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김 씨는 1980년 가톨릭센터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 5·18을 맞았습니다. 당시 가톨릭센터가 금남로에 있던 터라 매일 시위에 참여합니다. 당시 전남도청 앞은 김순이 씨에게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약속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YWCA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대자보도 썼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사무실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해 필경과 등사기 작업 등도 함께 했습니다.

■모금·근조리본…시민들의 호응
김 씨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에도 시위에 적극 참여합니다. 21일 당일에는 희생자들이 많아 응급 치료를 위한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거리에서 모금활동과 장례 준비도 도왔습니다.

희생자들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모금함을 들고 돌아다닐 때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줬다고 김 씨는 회고합니다. 또,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문하는 시민들을 위해 근조 리본도 만들어 분향소 앞에서 나누기도 했습니다.

선배들이 검은 리본을 구해 와서 시민들 가슴에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전남대병원 가는 쪽 남동성당 인근에 양장점이 굉장히 많았어요. 문이 모두 닫혀 있었는데, 막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조문 행렬에 검은 리본을 달아주고 싶다고 부탁했죠. 닫았던 문을 열고 다 천을 잘라주셨습니다. 핀은 광주여고 앞 문방구에 가서 또 얻어 왔습니다.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김순이

김 씨는 5월 25일부터는 전남도청에 들어가게 됐고, 이른바 '최후항쟁'을 결의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청 안의 시민군 등을 위해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취사반으로 활동합니다. 당시 취사반은 주로 여자 고등학생과 젊은 여성들 몫이었습니다.

당시 도청 취사반 활동한 여고생 인터뷰 기사 [영상채록5·18] 열일곱 여고생 김경임, 시민군의 밥을 짓다 https://news.kbs.co.kr/news/view2.do?ncd=7700789

지금 생각하면 마치 여성들이 '그냥 밥만 해주고 주먹밥만 했다' 그런 것으로 조명이 되니까...여성들 역할도 참 다양했는데, 가두 방송도 하고 새벽 방송도 하고, 대자보도 쓰고, 여러 역할을 다 했지만 저희가 불리어지는 것은 '도청 취사조', 그렇게 불리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의 역할이 묻혀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있는 거죠.

5월 26일, 전남도청 내 수습대책위와 시민군 지도부는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임박해오자 도청 내 여성들을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취사반과 상황실 등에서 일했던 김순이 씨를 포함한 여성들은 마지막 밤까지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1층 상황실이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윤상원 씨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오늘 계엄군이 진압한다. 그러니까 남을 사람은 남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희가 젊으니까 '당연히 도청을 지켜야 한다' 생각하고 남게 됐습니다.

■계엄군 최후통첩에도 '시민군'의 길 선택
김 씨는 그날 오후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서 소지품과 옷을 챙겨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청으로 가는 걸 막는 어머니 몰래 옥상으로 올라가 옆집으로 건너가 집을 떠났습니다. 도청 최후항쟁 시민군에 합류한 겁니다.

도청에 다시 자전거 타고 왔습니다. 저녁 7시쯤 된 것 같고요. 밥은 하지 않았고, 1층 상황실에 있게 됐습니다. 상황실은 당시 유일하게 전화가 되는 곳이었어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 '내무부'라고 했습니다. 광주 상황을 물어보는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 어디 '산소가 부족하다' 그런 긴급한 전화들이 왔고, 이렇게 연락을 해주고 공급을 해주는 그런 체계였어요.

상황실 옆에서 시민들이 내주신 조의금 봉투가 있었고, 명단을 쓰고 금액을 기록하고 했습니다. 조의금 돈을 세기도 하고, 그런 일을 했습니다.

김순이 씨는 마지막 날(5월 26일) 밤 도청 내 여성들이 '부지사실' 한 곳에 모였는데, 13명이 남았다고 기억합니다. 방송실 등에 있던 사람은 제외한 인원인데, 고등학생도 있었고 주로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수습위원회 등에서 여성들은 모두 나가라고 했지만 '총을 달라'고 말하며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결국 5월 27일 새벽 3시쯤 13명의 여성들은 도청을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체포는 면했지만...

김순이 씨를 포함한 여성들은 계엄군이 도청 진압에 나서던 그 날 새벽 가까스로 근처 교회로 몸을 피했습니다. 광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갔던 대학생 시민군 2명(명지대 1학년·동국대 1학년)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고, '동명교회' 문을 두드려 교회 유치원에 들어간 겁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거기에 저희 13명은 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데려다 준 친구들이 돌아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들 가면 죽는다'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 친구들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크게 총소리가 나버립니다. 그때는 그 친구들이 죽은 지 몰랐습니다. 5·18이 지나고 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고요.

김 씨는 그날 아침 교회를 빠져나오면서 교회에 신분증을 일부러 두고 나왔습니다. 계엄군에 체포될 걸 대비한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붙잡혔습니다. 길에서 보이는 전남대병원에 간다며 '간호사'라고 둘러댔습니다. 운 좋게 풀려났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도청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걸 누군가 말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바로 집에 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농촌에서 잠시 숨어 지내며 농사일을 하다가 매점에 취업해 일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고모 집에까지 형사들이 찾아가 김 씨의 행적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남방직에 취업했고, 교육을 받은 뒤 영암에 있는 공장에 배치받은 것도 잠시. 사흘 만에 해고당합니다. 김 씨는 당시 회사 간부가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자신을 알아보고 해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 씨는 이후 어망제조 회사에도 들어갔지만, 결국 그만둬야 했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송년회밤 행사 사회를 본 게 회사에 알려져 이른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겁니다.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에 맞서 싸워도 봤지만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김 씨는 40살 넘어 늦깍이로 사회복지를 공부해 사회복지사가 됐습니다. 이후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제대로된 직장을 갖습니다. 2006년부터 2020년까지 15년 동안 여성 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의 전화'에서 일했습니다.

정년 후 우연한 기회에 여기(전일빌딩245) 해설사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해보라고 딸이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5·18 얘기를 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고, 굉장히 그런 트라우마도 있었죠.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정말 돌아가신 분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고, 누구한테 '나 도청에 있었어', '내가 한 일이 대단한 일이야' 그렇게 얘기해 보지도 않았고...도청에 있었다는 말을 이렇게 공공연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생존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김 씨는 처음 해설사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말할 자신이 없었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이었습니다.

5·18의 진실을 알려고 전국에서 오시는데,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자부심을 갖고 해야 되겠다.
5·18이란 게 무거운 거지만 그래도 여기서 일하면서 그런 자부심을 갖고 사명감을 갖고 오시는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드릴 수 있는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마지막까지 시민들이 저항했던 공간 가운데 하나인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헬기사격의 총탄 흔적 245개가 발견된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전일빌딩245'로 재탄생했습니다. 9층과 10층은 5·18 관련 상설 전시관입니다. 이곳에 가면 김순이 해설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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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일빌딩245 ‘19800518, Memorial Hal’ 헬기 사격 관련 전시물을 살펴보는 관람객과 김순이 해설사(왼쪽)
1980년 5·18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광주 금남로의 전일빌딩245. 당시 헬기 사격 탄흔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관람객이 제법 많지만 모두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길어야 30분 남짓입니다. 참고 기사 전일빌딩 245로 재탄생…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2020년 5월 11일 KBS뉴스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443636

김순이 씨는 최근 이곳 전일빌딩245에서 해설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 씨는 1980년 5·18 당시 최후항쟁지 전남도청에 있었습니다. 4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날(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5·18해설사 활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국에서 오신 분들이 많은 시간을 갖고 오시진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뜻이 있고 그런 분들이 오시면 전남도청 안에서 살아남았던 과정을 얘기해 드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슴에 와 닿으셨는지 저를 안아주시기도 하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주시고.

■5·18 참여로 이어진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연

김순이 씨는 5·18 이전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알게 됐습니다. 20살 어린 나이였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이 생겼습니다. 다니던 직장(호남전기)에서 노조 대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선거에선 낙선했습니다.

대의원 선거 출마로 이른바 '정체성'이 드러난 뒤 회사 측은 김 씨에게 일을 제대로 주지 않고, 열악한 작업장으로 돌렸습니다. 김 씨를 압박하며 사실상 퇴사를 종용한 겁니다. 김 씨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습니다.

퇴사 후엔 가톨릭센터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김 씨는 1980년 가톨릭센터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 5·18을 맞았습니다. 당시 가톨릭센터가 금남로에 있던 터라 매일 시위에 참여합니다. 당시 전남도청 앞은 김순이 씨에게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약속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YWCA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대자보도 썼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사무실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해 필경과 등사기 작업 등도 함께 했습니다.

■모금·근조리본…시민들의 호응
김 씨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에도 시위에 적극 참여합니다. 21일 당일에는 희생자들이 많아 응급 치료를 위한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거리에서 모금활동과 장례 준비도 도왔습니다.

희생자들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모금함을 들고 돌아다닐 때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줬다고 김 씨는 회고합니다. 또,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문하는 시민들을 위해 근조 리본도 만들어 분향소 앞에서 나누기도 했습니다.

선배들이 검은 리본을 구해 와서 시민들 가슴에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전남대병원 가는 쪽 남동성당 인근에 양장점이 굉장히 많았어요. 문이 모두 닫혀 있었는데, 막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조문 행렬에 검은 리본을 달아주고 싶다고 부탁했죠. 닫았던 문을 열고 다 천을 잘라주셨습니다. 핀은 광주여고 앞 문방구에 가서 또 얻어 왔습니다.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김순이

김 씨는 5월 25일부터는 전남도청에 들어가게 됐고, 이른바 '최후항쟁'을 결의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청 안의 시민군 등을 위해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취사반으로 활동합니다. 당시 취사반은 주로 여자 고등학생과 젊은 여성들 몫이었습니다.

당시 도청 취사반 활동한 여고생 인터뷰 기사 [영상채록5·18] 열일곱 여고생 김경임, 시민군의 밥을 짓다 https://news.kbs.co.kr/news/view2.do?ncd=7700789

지금 생각하면 마치 여성들이 '그냥 밥만 해주고 주먹밥만 했다' 그런 것으로 조명이 되니까...여성들 역할도 참 다양했는데, 가두 방송도 하고 새벽 방송도 하고, 대자보도 쓰고, 여러 역할을 다 했지만 저희가 불리어지는 것은 '도청 취사조', 그렇게 불리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의 역할이 묻혀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있는 거죠.

5월 26일, 전남도청 내 수습대책위와 시민군 지도부는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임박해오자 도청 내 여성들을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취사반과 상황실 등에서 일했던 김순이 씨를 포함한 여성들은 마지막 밤까지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1층 상황실이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윤상원 씨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오늘 계엄군이 진압한다. 그러니까 남을 사람은 남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저희가 젊으니까 '당연히 도청을 지켜야 한다' 생각하고 남게 됐습니다.

■계엄군 최후통첩에도 '시민군'의 길 선택
김 씨는 그날 오후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서 소지품과 옷을 챙겨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청으로 가는 걸 막는 어머니 몰래 옥상으로 올라가 옆집으로 건너가 집을 떠났습니다. 도청 최후항쟁 시민군에 합류한 겁니다.

도청에 다시 자전거 타고 왔습니다. 저녁 7시쯤 된 것 같고요. 밥은 하지 않았고, 1층 상황실에 있게 됐습니다. 상황실은 당시 유일하게 전화가 되는 곳이었어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 '내무부'라고 했습니다. 광주 상황을 물어보는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 어디 '산소가 부족하다' 그런 긴급한 전화들이 왔고, 이렇게 연락을 해주고 공급을 해주는 그런 체계였어요.

상황실 옆에서 시민들이 내주신 조의금 봉투가 있었고, 명단을 쓰고 금액을 기록하고 했습니다. 조의금 돈을 세기도 하고, 그런 일을 했습니다.

김순이 씨는 마지막 날(5월 26일) 밤 도청 내 여성들이 '부지사실' 한 곳에 모였는데, 13명이 남았다고 기억합니다. 방송실 등에 있던 사람은 제외한 인원인데, 고등학생도 있었고 주로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수습위원회 등에서 여성들은 모두 나가라고 했지만 '총을 달라'고 말하며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결국 5월 27일 새벽 3시쯤 13명의 여성들은 도청을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체포는 면했지만...

김순이 씨를 포함한 여성들은 계엄군이 도청 진압에 나서던 그 날 새벽 가까스로 근처 교회로 몸을 피했습니다. 광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갔던 대학생 시민군 2명(명지대 1학년·동국대 1학년)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고, '동명교회' 문을 두드려 교회 유치원에 들어간 겁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거기에 저희 13명은 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데려다 준 친구들이 돌아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들 가면 죽는다'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 친구들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크게 총소리가 나버립니다. 그때는 그 친구들이 죽은 지 몰랐습니다. 5·18이 지나고 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고요.

김 씨는 그날 아침 교회를 빠져나오면서 교회에 신분증을 일부러 두고 나왔습니다. 계엄군에 체포될 걸 대비한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붙잡혔습니다. 길에서 보이는 전남대병원에 간다며 '간호사'라고 둘러댔습니다. 운 좋게 풀려났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도청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걸 누군가 말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바로 집에 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농촌에서 잠시 숨어 지내며 농사일을 하다가 매점에 취업해 일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고모 집에까지 형사들이 찾아가 김 씨의 행적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남방직에 취업했고, 교육을 받은 뒤 영암에 있는 공장에 배치받은 것도 잠시. 사흘 만에 해고당합니다. 김 씨는 당시 회사 간부가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자신을 알아보고 해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 씨는 이후 어망제조 회사에도 들어갔지만, 결국 그만둬야 했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송년회밤 행사 사회를 본 게 회사에 알려져 이른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겁니다.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에 맞서 싸워도 봤지만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김 씨는 40살 넘어 늦깍이로 사회복지를 공부해 사회복지사가 됐습니다. 이후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제대로된 직장을 갖습니다. 2006년부터 2020년까지 15년 동안 여성 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의 전화'에서 일했습니다.

정년 후 우연한 기회에 여기(전일빌딩245) 해설사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해보라고 딸이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5·18 얘기를 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고, 굉장히 그런 트라우마도 있었죠.

우리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정말 돌아가신 분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고, 누구한테 '나 도청에 있었어', '내가 한 일이 대단한 일이야' 그렇게 얘기해 보지도 않았고...도청에 있었다는 말을 이렇게 공공연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생존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김 씨는 처음 해설사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말할 자신이 없었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이었습니다.

5·18의 진실을 알려고 전국에서 오시는데,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자부심을 갖고 해야 되겠다.
5·18이란 게 무거운 거지만 그래도 여기서 일하면서 그런 자부심을 갖고 사명감을 갖고 오시는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드릴 수 있는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마지막까지 시민들이 저항했던 공간 가운데 하나인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헬기사격의 총탄 흔적 245개가 발견된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전일빌딩245'로 재탄생했습니다. 9층과 10층은 5·18 관련 상설 전시관입니다. 이곳에 가면 김순이 해설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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