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식 스릴러를 품은 블랙코미디…영화 ‘거미집’

입력 2023.09.1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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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을 보고 나면 두 편의 영화를 한 번에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거미집'은 그 안에 또 한 편의 영화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초 한국의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이 '거미집'이란 제목의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다.

김열이 배우, 스태프와 좌충우돌하며 영화를 찍는 이야기가 블랙 코미디라면, 흑백 영상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는 스릴러의 느낌이다. 두 개의 이야기가 주거니 받거니 교차하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싸구려 치정극이나 만든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리는 김열은 '거미집'이란 영화를 다 찍어놓은 어느 날 이 영화에 관한 꿈을 꾼다.

꿈에서 본 대로 영화의 결말 부분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거란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딱 이틀이면 된다"며 재촬영을 밀어붙인다.

그런 김열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작사 '신성필림' 대표 백 회장(장영남)은 '걸작'이란 말에 냉소적인 반응부터 보이고, 이민자(임수정), 강호세(오정세), 한유림(정수정) 등 주연 배우들은 다른 작품 촬영 스케줄이 꼬인다며 입이 툭 튀어나온다.

신성필림의 후계자이자 재정 담당인 신미도(전여빈)가 김열을 지지하고 나서지만, 그도 김열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유신정권 시절인 당시 정부의 검열도 걸림돌이다. 공무원들은 제집 드나들 듯 촬영장에 찾아와 이것저것 트집을 잡는다.

고지식해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김열은 영화밖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다. 세트장에 불이 번져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 제대로 나왔는지에만 정신이 쏠려 있다.

좌절에 빠진 김열이 세상을 떠난 스승 신 감독의 환영(幻影)과 대화하는 장면은 예술가의 고뇌를 보여주는 듯하다. "내가 재능이 없는 걸까"라는 김열의 물음에 신 감독은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라며 "그걸 믿고 가라"고 격려한다.

김열이 순수하기만 한 예술가인 건 아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스승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한 열등감과 세상이 인정하는 걸작을 내고 싶다는 조급함이 있다.

그렇게 욕망으로 가득하고 결함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빚어내는 예술이 영화라고 김지운 감독은 말하고 싶은 걸까.

어쩌면 영화는 우리 인생을 가장 많이 닮은 예술 장르인지도 모른다. 꿈은 항상 현실에 부딪히고, 삶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시간이 흐르면 그 꿈마저도 일그러진 욕망의 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의심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미집'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 영화에 깔린 건 결국 영화 예술에 대한 김 감독의 깊은 사랑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송강호는 이번 작품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펼친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낸 영화가 드디어 극장에 오를 때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비추는 김열의 표정은 송강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아닌가 싶다.

임수정, 오정세, 정수정, 전여빈, 장영남도 개성적인 연기로 한데 어우러져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특히 걸그룹 출신인 정수정은 김열의 말을 가장 안 듣는 배우 한유림 역을 능숙하게 소화하면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들이 흑백 영상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에서 1970년대 배우의 발성을 재현해내는 것도 볼거리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즘 배우들이 옛날 영화의 과장 섞인 말투와 몸짓을 따라 하는 모습이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거미집'의 영화 속 영화는 그 자체로도 상당한 재미가 있다. 1970년대를 풍미한 고(故)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 보듯 남녀의 치정 사건에 거미를 소재로 끌어들여 공포감을 극대화했다.

김지운 감독은 14일 시사회에서 "영화 속 영화인 '거미집'을 (따로) 장편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열이 영화를 찍는 세트장, 제작사 사무실, 배우와 스태프의 의상 등은 1970년대의 분위기를 잘 살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 장현의 '나는 너를',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등 흘러간 노래들도 당시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한다.

'거미집'은 지난 5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비경쟁 부문에 초청돼 기립 박수를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27일 개봉. 132분. 15세 관람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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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식 스릴러를 품은 블랙코미디…영화 ‘거미집’
    • 입력 2023-09-14 20:33:28
    연합뉴스
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을 보고 나면 두 편의 영화를 한 번에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거미집'은 그 안에 또 한 편의 영화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초 한국의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이 '거미집'이란 제목의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다.

김열이 배우, 스태프와 좌충우돌하며 영화를 찍는 이야기가 블랙 코미디라면, 흑백 영상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는 스릴러의 느낌이다. 두 개의 이야기가 주거니 받거니 교차하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싸구려 치정극이나 만든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리는 김열은 '거미집'이란 영화를 다 찍어놓은 어느 날 이 영화에 관한 꿈을 꾼다.

꿈에서 본 대로 영화의 결말 부분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거란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딱 이틀이면 된다"며 재촬영을 밀어붙인다.

그런 김열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작사 '신성필림' 대표 백 회장(장영남)은 '걸작'이란 말에 냉소적인 반응부터 보이고, 이민자(임수정), 강호세(오정세), 한유림(정수정) 등 주연 배우들은 다른 작품 촬영 스케줄이 꼬인다며 입이 툭 튀어나온다.

신성필림의 후계자이자 재정 담당인 신미도(전여빈)가 김열을 지지하고 나서지만, 그도 김열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유신정권 시절인 당시 정부의 검열도 걸림돌이다. 공무원들은 제집 드나들 듯 촬영장에 찾아와 이것저것 트집을 잡는다.

고지식해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김열은 영화밖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다. 세트장에 불이 번져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 제대로 나왔는지에만 정신이 쏠려 있다.

좌절에 빠진 김열이 세상을 떠난 스승 신 감독의 환영(幻影)과 대화하는 장면은 예술가의 고뇌를 보여주는 듯하다. "내가 재능이 없는 걸까"라는 김열의 물음에 신 감독은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라며 "그걸 믿고 가라"고 격려한다.

김열이 순수하기만 한 예술가인 건 아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스승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한 열등감과 세상이 인정하는 걸작을 내고 싶다는 조급함이 있다.

그렇게 욕망으로 가득하고 결함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빚어내는 예술이 영화라고 김지운 감독은 말하고 싶은 걸까.

어쩌면 영화는 우리 인생을 가장 많이 닮은 예술 장르인지도 모른다. 꿈은 항상 현실에 부딪히고, 삶은 우리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시간이 흐르면 그 꿈마저도 일그러진 욕망의 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의심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미집'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 영화에 깔린 건 결국 영화 예술에 대한 김 감독의 깊은 사랑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송강호는 이번 작품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펼친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낸 영화가 드디어 극장에 오를 때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비추는 김열의 표정은 송강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아닌가 싶다.

임수정, 오정세, 정수정, 전여빈, 장영남도 개성적인 연기로 한데 어우러져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특히 걸그룹 출신인 정수정은 김열의 말을 가장 안 듣는 배우 한유림 역을 능숙하게 소화하면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들이 흑백 영상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에서 1970년대 배우의 발성을 재현해내는 것도 볼거리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즘 배우들이 옛날 영화의 과장 섞인 말투와 몸짓을 따라 하는 모습이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거미집'의 영화 속 영화는 그 자체로도 상당한 재미가 있다. 1970년대를 풍미한 고(故)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 보듯 남녀의 치정 사건에 거미를 소재로 끌어들여 공포감을 극대화했다.

김지운 감독은 14일 시사회에서 "영화 속 영화인 '거미집'을 (따로) 장편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열이 영화를 찍는 세트장, 제작사 사무실, 배우와 스태프의 의상 등은 1970년대의 분위기를 잘 살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 장현의 '나는 너를',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등 흘러간 노래들도 당시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한다.

'거미집'은 지난 5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비경쟁 부문에 초청돼 기립 박수를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27일 개봉. 132분. 15세 관람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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