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에서 ‘러북’, ‘위원장’에서 ‘독재자’…호칭에 담긴 의미는?

입력 2023.09.21 (16:53) 수정 2023.09.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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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북한 군사 거래는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도발이 될 것입니다."

-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현지 시각 2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지난 13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두나라가 무기 거래 등 군사 협력 가능성을 내비친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연설에서 특이하게 '북한과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와 북한'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동안 주로 '북한-러시아(북러)' 순으로 표기해온 것과는 다릅니다. '북러'가 아닌 '러북',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 "북, 어떤 짓 하든 앞자리에 불러줘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윤 대통령 연설 내 '러북' 표현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여러 해석을 낳을 순 있겠지만, 순서 자체를 의식적으로 특정해 말씀한 것 같지는 않다"며 "원고에 '러북'으로 쓰여 있어서 (그 순서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13일, 함께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둘러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지난 13일, 함께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둘러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민족 공조라고 해서 북한이 어떤 짓을 하든 맨 앞자리에 불러줘야 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유민주주의·법치·인권 가치에 대해 얼마나 한국과 진정으로 협력하느냐가 1차 기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주변 4강(미·일·중·러)은 그동안 동맹, 우방국 순서에 따라 부르는데 러시아와 북한에 대해 우리 정부가 정해놓은 원칙은 없다"면서도 "북한이 러시아와 협력하며 더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단락이니만큼 북한이 뒷자리에 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현 정부가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대하는 외교적 기조가, 과거와는 분명하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북러' 대신 '러북', '한중일' 대신 '한일중'?

대통령실 외에도 최근 중앙정부 부처들이 '북러' 아닌 '러북'으로 지칭하는 경우는 꽤 늘고 있습니다. 외교부가 대표적입니다.

"러북 관계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준수하는 가운데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 박진 외교부 장관(지난 11일, 연합뉴스TV 인터뷰)

"러북의 군사협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의 엄중한 위반"

- 장호진 외교부 1차관(지난 15일, 확장억제전략협의체 회의)

또 최근에는 '한중일' 대신 '한일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다만 외교부는 이러한 러북, 한일중 표현 등에 대해 "특별한 의미는 없다"며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간 북러 표현을 고수해온 통일부도 "(북러, 러북) 순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며 "양자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대통령실이 북한의 호칭 순서에 대해 나름대로 명확한 설명을 한 만큼, 러북 표현이 주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내걸고 있는 보편적 규범에 의한 외교, 또 글로벌 가치에 기반한 외교라는 원칙하에 포괄적인 가치와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미 동맹, 그리고 한미일 관계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스탠스(입장)가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특히 북한의 일탈 행위나 반인권적 행동 등에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겠다는 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 위원장 → 지도자 → 독재자…미국의 기조도 바뀌나?

북한 관련 용어에 변화가 생긴 건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안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현지 시각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 논의를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장관급 회의에서 "지난주 러시아는 북한의 독재자(dictator) 김정은을 초청했다"고 발언했습니다.

그간 미국 당국은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주로 '지도자(leader)' 혹은 '위원장(chairman)' 등의 표현을 써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현의 강도가 강해졌습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앞으로도 그런 논의(북러 무기거래 관련)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And we also have information, as we have indicated publicly, that North Korea’s leader, Kim Jong Un, has some expectation that those discussions will continue as we go forward.)"

-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지난 5일 언론브리핑)

강화되는 한미 안보 협력만큼 북러의 군사적 밀착도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앞으로도 북러 혹은 '러북' 양국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이 호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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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러’에서 ‘러북’, ‘위원장’에서 ‘독재자’…호칭에 담긴 의미는?
    • 입력 2023-09-21 16:53:13
    • 수정2023-09-21 16: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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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북한 군사 거래는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도발이 될 것입니다."

-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현지 시각 2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지난 13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두나라가 무기 거래 등 군사 협력 가능성을 내비친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연설에서 특이하게 '북한과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와 북한'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동안 주로 '북한-러시아(북러)' 순으로 표기해온 것과는 다릅니다. '북러'가 아닌 '러북',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 "북, 어떤 짓 하든 앞자리에 불러줘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윤 대통령 연설 내 '러북' 표현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여러 해석을 낳을 순 있겠지만, 순서 자체를 의식적으로 특정해 말씀한 것 같지는 않다"며 "원고에 '러북'으로 쓰여 있어서 (그 순서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13일, 함께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둘러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민족 공조라고 해서 북한이 어떤 짓을 하든 맨 앞자리에 불러줘야 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유민주주의·법치·인권 가치에 대해 얼마나 한국과 진정으로 협력하느냐가 1차 기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주변 4강(미·일·중·러)은 그동안 동맹, 우방국 순서에 따라 부르는데 러시아와 북한에 대해 우리 정부가 정해놓은 원칙은 없다"면서도 "북한이 러시아와 협력하며 더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단락이니만큼 북한이 뒷자리에 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현 정부가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대하는 외교적 기조가, 과거와는 분명하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북러' 대신 '러북', '한중일' 대신 '한일중'?

대통령실 외에도 최근 중앙정부 부처들이 '북러' 아닌 '러북'으로 지칭하는 경우는 꽤 늘고 있습니다. 외교부가 대표적입니다.

"러북 관계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준수하는 가운데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 박진 외교부 장관(지난 11일, 연합뉴스TV 인터뷰)

"러북의 군사협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의 엄중한 위반"

- 장호진 외교부 1차관(지난 15일, 확장억제전략협의체 회의)

또 최근에는 '한중일' 대신 '한일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다만 외교부는 이러한 러북, 한일중 표현 등에 대해 "특별한 의미는 없다"며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간 북러 표현을 고수해온 통일부도 "(북러, 러북) 순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며 "양자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대통령실이 북한의 호칭 순서에 대해 나름대로 명확한 설명을 한 만큼, 러북 표현이 주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내걸고 있는 보편적 규범에 의한 외교, 또 글로벌 가치에 기반한 외교라는 원칙하에 포괄적인 가치와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미 동맹, 그리고 한미일 관계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스탠스(입장)가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특히 북한의 일탈 행위나 반인권적 행동 등에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겠다는 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 위원장 → 지도자 → 독재자…미국의 기조도 바뀌나?

북한 관련 용어에 변화가 생긴 건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안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현지 시각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 논의를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장관급 회의에서 "지난주 러시아는 북한의 독재자(dictator) 김정은을 초청했다"고 발언했습니다.

그간 미국 당국은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주로 '지도자(leader)' 혹은 '위원장(chairman)' 등의 표현을 써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현의 강도가 강해졌습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앞으로도 그런 논의(북러 무기거래 관련)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And we also have information, as we have indicated publicly, that North Korea’s leader, Kim Jong Un, has some expectation that those discussions will continue as we go forward.)"

-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지난 5일 언론브리핑)

강화되는 한미 안보 협력만큼 북러의 군사적 밀착도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앞으로도 북러 혹은 '러북' 양국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이 호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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