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난 故 구경호 씨(가족 제공)
땡볕이 내리쬐던 지난달 7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의 한 공사장 1층에서 작업을 하던 20대 남성이 지하 5미터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이 남성은 헬기로 병원에 긴급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끝내 눈을 뜨지 못한 이 남성은 6일 뒤인 지난달 13일 자신의 심장과 간장, 신장(좌·우)을 기증해 4명의 생명을 살리고 숨졌습니다.
■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장기기증 결정한 부모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난 故 구경호 씨(가족 제공)
꿈 많던 청년 28살 구경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구 씨는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평일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쉬는 날에는 어머니의 김밥집 일을 도왔습니다.
한순간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어머니 강현숙 씨는 '장기 기증'을 떠올렸습니다.
이대로 떠나게 두면, 꿈도 이뤄보지 못한 아들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강 씨는 "어차피 한 줌의 재로 남을 아들이라면 장기 기증으로 세상 어느 곳에서든 살아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고로 곳곳이 망가진 아들의 몸에 더는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구 씨의 부모는 아들의 친구들에게 "경호가 혹시 기증에 대해 말한 적 있느냐"고 물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고민 끝에 구 씨의 가족들은 결국 장기 기증으로 구 씨의 존재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강 씨는 "경호는 요즘 청년답지 않게 쉴틈 없이 일만 하던 녀석이었다"며 "열심히 산 만큼의 보람이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 같아 의미를 남겨주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버텨준 아들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난 故 구경호 씨(가족 제공)
하지만 장기 기증을 앞두고 태풍 '카눈'이 제주로 북상하면서 한국장기조직기증원 관계자가 제주에 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비행기가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선 구 씨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니 강 씨는 "아이가 버티지 못한다면 장기 기증을 하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마음대로 결정해서 계속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구 씨는 날이 개고 기증원 관계자가 제주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냈습니다.
2023년 8월 13일, 그렇게 구 씨는 4명에게 심장과 간장, 신장(좌·우)을 기증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 유품 속에서 발견된 '버킷리스트'…"장기 기증하고 싶다"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난 故 구경호 씨 (가족 제공)
구 씨가 떠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가족들은 구 씨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100가지 버킷리스트(죽기 전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목록)'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버킷리스트에는 '돈을 많이 벌어 한 달에 100만 원씩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마지막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과연 장기 기증이 아들을 위한 선택일지' 마음이 편치 않았던 구 씨의 부모는 그제야 미안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어머니 강 씨는 "아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며 "얼마 전엔 경호가 꿈에 나타나 '다 괜찮다'고 말해줬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만류에도 땡볕 공사장에서 쉴틈없이 일만 한 우리 아이가 이제는 푹 쉬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강 씨는 하늘나라 있는 아들을 향해 약속 하나를 남겼습니다.
"경호야, 나도 너와 같이 기증할 거라고 웃으면서 약속하고 왔어. 속 한 번 안 썩이고, 착하게만 자라온 네가 고생만 하고 떠난 거 같아서 미안해. 사랑하고,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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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살 청년의 버킷리스트 ‘장기 기증’…4명 살리고 하늘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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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9-26 06:02:07
땡볕이 내리쬐던 지난달 7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의 한 공사장 1층에서 작업을 하던 20대 남성이 지하 5미터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이 남성은 헬기로 병원에 긴급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끝내 눈을 뜨지 못한 이 남성은 6일 뒤인 지난달 13일 자신의 심장과 간장, 신장(좌·우)을 기증해 4명의 생명을 살리고 숨졌습니다.
■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장기기증 결정한 부모
꿈 많던 청년 28살 구경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구 씨는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평일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쉬는 날에는 어머니의 김밥집 일을 도왔습니다.
한순간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어머니 강현숙 씨는 '장기 기증'을 떠올렸습니다.
이대로 떠나게 두면, 꿈도 이뤄보지 못한 아들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강 씨는 "어차피 한 줌의 재로 남을 아들이라면 장기 기증으로 세상 어느 곳에서든 살아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고로 곳곳이 망가진 아들의 몸에 더는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구 씨의 부모는 아들의 친구들에게 "경호가 혹시 기증에 대해 말한 적 있느냐"고 물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고민 끝에 구 씨의 가족들은 결국 장기 기증으로 구 씨의 존재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강 씨는 "경호는 요즘 청년답지 않게 쉴틈 없이 일만 하던 녀석이었다"며 "열심히 산 만큼의 보람이 허무하게 없어지는 것 같아 의미를 남겨주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버텨준 아들
하지만 장기 기증을 앞두고 태풍 '카눈'이 제주로 북상하면서 한국장기조직기증원 관계자가 제주에 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비행기가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선 구 씨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니 강 씨는 "아이가 버티지 못한다면 장기 기증을 하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마음대로 결정해서 계속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구 씨는 날이 개고 기증원 관계자가 제주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냈습니다.
2023년 8월 13일, 그렇게 구 씨는 4명에게 심장과 간장, 신장(좌·우)을 기증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 유품 속에서 발견된 '버킷리스트'…"장기 기증하고 싶다"
구 씨가 떠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가족들은 구 씨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100가지 버킷리스트(죽기 전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목록)'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버킷리스트에는 '돈을 많이 벌어 한 달에 100만 원씩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마지막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과연 장기 기증이 아들을 위한 선택일지' 마음이 편치 않았던 구 씨의 부모는 그제야 미안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어머니 강 씨는 "아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며 "얼마 전엔 경호가 꿈에 나타나 '다 괜찮다'고 말해줬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만류에도 땡볕 공사장에서 쉴틈없이 일만 한 우리 아이가 이제는 푹 쉬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강 씨는 하늘나라 있는 아들을 향해 약속 하나를 남겼습니다.
"경호야, 나도 너와 같이 기증할 거라고 웃으면서 약속하고 왔어. 속 한 번 안 썩이고, 착하게만 자라온 네가 고생만 하고 떠난 거 같아서 미안해. 사랑하고,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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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연 기자 asy010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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