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캅카스 화약고’ 대탈출…휴전해도 국경 넘는 이유

입력 2023.09.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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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오랜 영토 분쟁 지역이 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지역인데요. 19일,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대탈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포그래픽: 김홍식인포그래픽: 김홍식

■ '캅카스 화약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도 상에도 국제법상에도 아제르바이잔에 속하지만, 인구 대다수는 아르메니아계로 구성돼 있는 곳이 나고르노카라바흐입니다. 아르메니아는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계이고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 국가로, 종교와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이 다른데요.

소련 붕괴 후 지난 30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캅카스(산맥) 화약고'라고도 불립니다.

분쟁의 씨앗은 옛 소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련이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복속시켰는데요. 소련이 붕괴된 뒤 아르메니아는 1992년 아제르바이잔과 전면전을 일으켰고 1994년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점령합니다.

이곳에 사는 12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은 아르메니아어로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아제르바이잔에 줄곧 분리·독립을 요구해 왔습니다.

■ 아르메니아계 대탈출 행렬…주유소 폭발로 인명피해까지

상황은 이번 달 19일부터 급격하게 흘러갔습니다. 이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 군인과 민간인 2명이 지뢰 폭발로 숨지면서 아제르바이잔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는데요. 아제르바이잔 정부와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이튿날인 20일 휴전에 합의했지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종 청소'를 우려하며 대탈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외신들은 이 배경을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로 지목합니다. 러시아는 양국의 중재자를 자처해 왔는데요. 앞서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6주간의 전쟁을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점령하자 러시아는 휴전 협정을 중재하며 이 지역에 평화유지군 약 2,000명을 배치해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이면서 이 지역에 미치는 통제력이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변화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주 군사 행동에 나서는 데 용기를 얻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기사 제목으로 "러시아가 평화협정을 지키지 못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떠나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나고르고카라바흐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랐다.나고르고카라바흐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랐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고속도로 '라친 회랑'이 지난해 12월부터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봉쇄됐고, 올해 6월부터는 식량과 연료 등 물자 보급이 완전히 중단됐는데요.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도 아르메니아계의 탈출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26일 기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 12만 명 가운데 약 1/4에 가까운 2만 8,000여 명이 국경을 넘었다고 아르메니아 정부는 밝혔습니다.

라친회랑의 피란길을 찍은 위성 사진. 차들이 꼬리를 물고 정체돼 있다.라친회랑의 피란길을 찍은 위성 사진. 차들이 꼬리를 물고 정체돼 있다.

여기에 한 주유소에서 폭발 사고까지 일어나 나고르고카라바흐의 혼돈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중심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 외곽의 한 주유소에서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차량에 연료를 넣기 위해 기다리던 피란민들이 화를 입었습니다 .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현지시각 26일 오후, 폭발 사고 사망자가 125명에 이른다고 보도했습니다.

■ 화약고 둘러싼 미·러의 신경전

사실상 러시아를 든든한 뒷배로 여기고 있던 아르메니아에서는 곧바로 러시아에 대한 원성이 나오는데요.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24일 연설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발생한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공세를 저지하지 못하고 방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외무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 서방의 약속에 속아 나고르고카라바흐 사태를 초래한 자신을 탓하라"며 맞받았습니다.

미국도 러시아 책임론에 가세했습니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25일 "러시아가 안보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언급했습니다. 미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난민을 위해 우리 돈 155억 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는 "미국은 아르메니아에서 반러 감정을 인위적으로 초래하는 극도로 위험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며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는데요.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이 지역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평생의 터전을 뒤로한 채 피란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피란민 4만 가구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힌 상황, 그러나 구체적인 장소와 규모는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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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8 1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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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오랜 영토 분쟁 지역이 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지역인데요. 19일,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대탈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포그래픽: 김홍식
■ '캅카스 화약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도 상에도 국제법상에도 아제르바이잔에 속하지만, 인구 대다수는 아르메니아계로 구성돼 있는 곳이 나고르노카라바흐입니다. 아르메니아는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계이고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 국가로, 종교와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이 다른데요.

소련 붕괴 후 지난 30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캅카스(산맥) 화약고'라고도 불립니다.

분쟁의 씨앗은 옛 소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련이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복속시켰는데요. 소련이 붕괴된 뒤 아르메니아는 1992년 아제르바이잔과 전면전을 일으켰고 1994년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점령합니다.

이곳에 사는 12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은 아르메니아어로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아제르바이잔에 줄곧 분리·독립을 요구해 왔습니다.

■ 아르메니아계 대탈출 행렬…주유소 폭발로 인명피해까지

상황은 이번 달 19일부터 급격하게 흘러갔습니다. 이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 군인과 민간인 2명이 지뢰 폭발로 숨지면서 아제르바이잔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는데요. 아제르바이잔 정부와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이튿날인 20일 휴전에 합의했지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종 청소'를 우려하며 대탈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외신들은 이 배경을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로 지목합니다. 러시아는 양국의 중재자를 자처해 왔는데요. 앞서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6주간의 전쟁을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점령하자 러시아는 휴전 협정을 중재하며 이 지역에 평화유지군 약 2,000명을 배치해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이면서 이 지역에 미치는 통제력이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변화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주 군사 행동에 나서는 데 용기를 얻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기사 제목으로 "러시아가 평화협정을 지키지 못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떠나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나고르고카라바흐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랐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고속도로 '라친 회랑'이 지난해 12월부터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봉쇄됐고, 올해 6월부터는 식량과 연료 등 물자 보급이 완전히 중단됐는데요.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도 아르메니아계의 탈출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26일 기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 12만 명 가운데 약 1/4에 가까운 2만 8,000여 명이 국경을 넘었다고 아르메니아 정부는 밝혔습니다.

라친회랑의 피란길을 찍은 위성 사진. 차들이 꼬리를 물고 정체돼 있다.
여기에 한 주유소에서 폭발 사고까지 일어나 나고르고카라바흐의 혼돈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중심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 외곽의 한 주유소에서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차량에 연료를 넣기 위해 기다리던 피란민들이 화를 입었습니다 .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현지시각 26일 오후, 폭발 사고 사망자가 125명에 이른다고 보도했습니다.

■ 화약고 둘러싼 미·러의 신경전

사실상 러시아를 든든한 뒷배로 여기고 있던 아르메니아에서는 곧바로 러시아에 대한 원성이 나오는데요.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24일 연설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발생한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공세를 저지하지 못하고 방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외무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 서방의 약속에 속아 나고르고카라바흐 사태를 초래한 자신을 탓하라"며 맞받았습니다.

미국도 러시아 책임론에 가세했습니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25일 "러시아가 안보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언급했습니다. 미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난민을 위해 우리 돈 155억 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는 "미국은 아르메니아에서 반러 감정을 인위적으로 초래하는 극도로 위험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며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는데요.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이 지역에 살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평생의 터전을 뒤로한 채 피란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피란민 4만 가구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힌 상황, 그러나 구체적인 장소와 규모는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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