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이 된 독일 ‘환경단체’…씁쓸한 ‘정의구현’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0.02 (08:00) 수정 2023.10.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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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인트로 뒤덮힌 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지난달 17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 페인트로 뒤덮혔습니다. 한 환경단체가 기후위기 문제 대응을 촉구하며 소화기에 페인트를 넣어 뿌린 겁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랜드마크입니다. 통일의 상징이자 독일의 영욕을 함께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난달 17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지난달 17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 가봤습니다. 기둥마다 노란, 주황색으로 더럽혀졌고 바닥도 난장판이었습니다. 베를린시는 사건 발생 바로 다음 날부터 오염된 브란덴부르크 문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수압으로 페인트를 벗겨냈습니다. 청소 비용만 3만 5천 유로, 우리 돈 5천만 원가량이 투입될 전망입니다.

지난달 18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지난달 18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 악당이 된 '환경단체' … 응징하는 시민들

문제의 환경단체는 독일에서 악명 높은 '마지막 세대'입니다. 예상과 달리 이들의 주장은 상식적입니다. 독일 정부를 상대로 고속도로 속도 제한, 저렴한 대중교통 이용권 재도입 등을 요구합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고민해 볼 수 있는 대안들입니다.

하지만 시위 방식은 상식을 한참 벗어납니다. 브란덴부르크 문뿐만 아니라 명품 상가에도 페인트를 뿌리고, 유명 화가의 그림에 음식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지난달 24일엔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방해하려다 저지당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수시로 아침 출근 길, 그것도 교통량이 많은 도로를 골라 길을 막고 차량 운행을 방해합니다. 경찰이 빨리 자신들을 끌어낼 수 없게 손에는 접착제를 발라 바닥에 붙여놓습니다.

'마지막 세대' 시위가 1년 넘게 이어지자 독일 시민들의 분노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시위대를 직접 도로에서 끌어내고, 심지어 후추 스프레이를 얼굴에 뿌리거나 폭행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촬영한 영상에는 시위대를 응징하는 시민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이들이 소위 '정의구현'을 했다는 겁니다.

‘마지막 세대’ 시위 현장‘마지막 세대’ 시위 현장


■ "환경단체가 기후위기 논의 기회를 훼손"

'마지막 세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걸까요 . 에메 판 발렌 '마지막 세대'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KBS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의 호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구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①우선 시위를 통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②이를 통해 강력한 지지층을 확보한 뒤 ③기후위기 정책 도입 같은 변화를 이끌겠다는 구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민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세대’ 대변인 인터뷰지난해 12월, ‘마지막 세대’ 대변인 인터뷰

하지만 1년 넘게 시위가 이어지면서 이들이 의도한 전략은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여론의 주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위 방식은 점점 더 과격해졌습니다. 시민들의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환경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정당인 독일 녹색당조차 이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카이 베그너 베를린시장은 '마지막 세대'의 과격 시위에 대해 "시위대가 우리 미래와 시대의 중요한 주제와 관련해 자유로운 의견 개진 기회를 훼손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후위기 문제 해결에 오히려 이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 과격 시위 속에서도 외면해선 안되는 '불편한 진실'

환경단체의 과격 시위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올해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었고, 이상기후로 인한 대형 인명 피해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10일 리비아에선 대홍수가 발생해 최소 1만 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실한 댐 관리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전문가들은 이상기후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홍수가 난 리비아 데르나는 평년 9월 강수량이 1.5mm 수준으로 매우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10일 하루에만 40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높아진 해수면 온도와 오메가 형 편서풍이 지중해에서 발생한 폭풍 '메디케인' 위력을 키웠습니다. 피해 예방을 위해 부실한 댐은 보수하면 되지만, 이상기후는 이미 통제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

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20일 기후목표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의 위험성에 대해 "인류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경고했습니다. UN 산하 기후변화 정부 간 협의체, IPCC는 기후위기에 더는 선택지가 없다며 앞으로 10년 안에 지구의 존폐가 달렸다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감축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요구됩니다.

과격 시위가 불러온 분노와 반감 때문에 우리가 기후위기 문제를 외면해선 안되는 이유입니다. 이미 귀중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고, 인류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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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02 08:00:21
    • 수정2023-10-02 10: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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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 페인트로 뒤덮혔습니다. 한 환경단체가 기후위기 문제 대응을 촉구하며 소화기에 페인트를 넣어 뿌린 겁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랜드마크입니다. 통일의 상징이자 독일의 영욕을 함께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난달 17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 가봤습니다. 기둥마다 노란, 주황색으로 더럽혀졌고 바닥도 난장판이었습니다. 베를린시는 사건 발생 바로 다음 날부터 오염된 브란덴부르크 문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수압으로 페인트를 벗겨냈습니다. 청소 비용만 3만 5천 유로, 우리 돈 5천만 원가량이 투입될 전망입니다.

지난달 18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 악당이 된 '환경단체' … 응징하는 시민들

문제의 환경단체는 독일에서 악명 높은 '마지막 세대'입니다. 예상과 달리 이들의 주장은 상식적입니다. 독일 정부를 상대로 고속도로 속도 제한, 저렴한 대중교통 이용권 재도입 등을 요구합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고민해 볼 수 있는 대안들입니다.

하지만 시위 방식은 상식을 한참 벗어납니다. 브란덴부르크 문뿐만 아니라 명품 상가에도 페인트를 뿌리고, 유명 화가의 그림에 음식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지난달 24일엔 베를린 마라톤 대회를 방해하려다 저지당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수시로 아침 출근 길, 그것도 교통량이 많은 도로를 골라 길을 막고 차량 운행을 방해합니다. 경찰이 빨리 자신들을 끌어낼 수 없게 손에는 접착제를 발라 바닥에 붙여놓습니다.

'마지막 세대' 시위가 1년 넘게 이어지자 독일 시민들의 분노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시위대를 직접 도로에서 끌어내고, 심지어 후추 스프레이를 얼굴에 뿌리거나 폭행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촬영한 영상에는 시위대를 응징하는 시민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이들이 소위 '정의구현'을 했다는 겁니다.

‘마지막 세대’ 시위 현장

■ "환경단체가 기후위기 논의 기회를 훼손"

'마지막 세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걸까요 . 에메 판 발렌 '마지막 세대'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KBS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의 호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구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①우선 시위를 통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②이를 통해 강력한 지지층을 확보한 뒤 ③기후위기 정책 도입 같은 변화를 이끌겠다는 구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민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세대’ 대변인 인터뷰
하지만 1년 넘게 시위가 이어지면서 이들이 의도한 전략은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여론의 주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위 방식은 점점 더 과격해졌습니다. 시민들의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환경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정당인 독일 녹색당조차 이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카이 베그너 베를린시장은 '마지막 세대'의 과격 시위에 대해 "시위대가 우리 미래와 시대의 중요한 주제와 관련해 자유로운 의견 개진 기회를 훼손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후위기 문제 해결에 오히려 이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 과격 시위 속에서도 외면해선 안되는 '불편한 진실'

환경단체의 과격 시위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올해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었고, 이상기후로 인한 대형 인명 피해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10일 리비아에선 대홍수가 발생해 최소 1만 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실한 댐 관리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전문가들은 이상기후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홍수가 난 리비아 데르나는 평년 9월 강수량이 1.5mm 수준으로 매우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10일 하루에만 40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높아진 해수면 온도와 오메가 형 편서풍이 지중해에서 발생한 폭풍 '메디케인' 위력을 키웠습니다. 피해 예방을 위해 부실한 댐은 보수하면 되지만, 이상기후는 이미 통제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
리비아 데르나 홍수 피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20일 기후목표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의 위험성에 대해 "인류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경고했습니다. UN 산하 기후변화 정부 간 협의체, IPCC는 기후위기에 더는 선택지가 없다며 앞으로 10년 안에 지구의 존폐가 달렸다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감축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요구됩니다.

과격 시위가 불러온 분노와 반감 때문에 우리가 기후위기 문제를 외면해선 안되는 이유입니다. 이미 귀중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고, 인류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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