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와, 태풍이 할퀸 삶…세계기상기구가 선정한 ‘그 장면’

입력 2023.10.05 (16:01) 수정 2023.10.0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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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피난처(Flood Refuge)’, 무함마드 암마드 호사인(방글라데시)‘홍수 피난처(Flood Refuge)’, 무함마드 암마드 호사인(방글라데시)

폭우로 흙탕물에 잠긴 집 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려놓지 못하는 여인은 그저 망연자실 창밖을 응시합니다.
그 표정에서 걱정과 두려움이 보입니다.

방글라데시 북부 쿠리그람구에서 촬영된 이 사진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홍수 피난처(Flood Refuge)'입니다.
방글라데시는 지난해 '최악의 홍수'로 일컬어지는 폭우 피해를 입었습니다.
몬순 우기에 내린 폭우로 인해 방글라데시에선 백여 명의 인명 피해와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홍수 피해는 매년 반복되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이를 대변하는 한 장의 사진, 당장이라도 피난을 가야 할 것 같은 이 장면이 세계기상기후(WMO)가 발간하는 2024년 달력의 표지 사진으로 선정됐습니다.

세계기상기구는 매년 19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과 관심을 높이기 위해 다음 해 달력 사진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세계기상기구의 2024년 달력 사진 공모전의 주제는 '기후행동의 전선에서(At the frontline of climate action)'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심각성 등을 잘 담아낸 표지와 12달 등 14개 작품을 내년 기상달력의 사진으로 선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사진도 두 점이 선정됐습니다.

조은옥 작가의 '태풍의 흔적(Trace of Typhoon)'과 '윤성진 작가의 케이-버스(K-Bus)'인데요.

4월 사진으로 선정된 ‘태풍의 흔적(Trace of Typhoon)’, 조은옥(2022.9.6.)4월 사진으로 선정된 ‘태풍의 흔적(Trace of Typhoon)’, 조은옥(2022.9.6.)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다음 날, 경북 경주의 한 해안도로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도로 곳곳에 조각난 아스팔트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가운데,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높게 부서지는 모습을 자전거를 탄 시민이 바라보고 있습니다.절제된 색감으로 태풍의 위력과 그 앞에서 겸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11월 사진으로 선정된 ‘케이-버스(K-Bus)’, 윤성진(2022.8.8.)11월 사진으로 선정된 ‘케이-버스(K-Bus)’, 윤성진(2022.8.8.)

윤성진 작가는 지난해 8월 수도권 집중 호우 피해를 마주했던 순간을 아주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돌아오는 길, 집중호우로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상황에서 물살을 헤치고 운행하는 버스를 마주한 작가는 항상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사는 동안 이렇게 갑작스럽고, 많은 폭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살면서 보기 힘든 장면들을 눈 앞에서 마주한 순간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싶어서 현장에서 느꼈던 충격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 윤성진 작가

두 작품은 기후변화로 심화되는 자연재해와 이에 따른 기후행동의 필요성을 사진으로 잘 담아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각각 4월과 11월의 사진으로 선정됐습니다.

‘폭풍의 마지막 숨결(Storm's Last Breath)’, 보슈코 흐르기치(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폭풍의 마지막 숨결(Storm's Last Breath)’, 보슈코 흐르기치(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또 다른 표지 사진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프르냐보르에서 촬영된 낙뢰 사진이 실렸습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먹구름과 광활한 대지에 내리꽂히는 낙뢰는 자연 현상과 인간이 만든 구조물의 규모가 얼마나 크게 차이나는지 보여주는 듯 합니다.

다른 상징적인 장면들을 볼까요. 작가들의 이름은 생략했습니다.

세계기상기구 2024년 달력의 1월은 파키스탄 상하르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2022년 파키스탄을 덮친 홍수로 보급품을 지급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물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파장 위에서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흐트러졌습니다.
제목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Drowning in Despair)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Drowning in Despair)절망에 빠진 사람들(Drowning in Despair)

불어오는 모래 먼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걷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모습, 흑백사진으로 담담하게 그려졌습니다. 2월의 사진입니다.

모래먼지(Dust and Grit : A Glimpse of West Gonder)모래먼지(Dust and Grit : A Glimpse of West Gonder)

수퍼셀(Supercell storm)수퍼셀(Supercell storm)

위 사진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하늘의 장관을 연출했지만, 이탈리아에는 파괴적인 우박을 내렸던 수퍼셀(Supercell storm)의 모습입니다.

기후위기는 세계 곳곳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에서 부족한 식수를 구하기 위한 행렬입니다. 굽이치는 강물 옆을 위태롭게 이동합니다. 5월의 사진입니다.

기후변화와 빈 손(Climate Change and our Empty Hand)기후변화와 빈 손(Climate Change and our Empty Hand)

구냐 얄라 섬(Guna Yala island in Panama)구냐 얄라 섬(Guna Yala island in Panama)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에 빠진 파나마 북동 해안의 구나 얄라 섬의 모습도 2024년 6월을 장식했습니다. 20년 안에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는 곳인데, 2040년쯤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물 뜨러 가는 길(Journey for Water)물 뜨러 가는 길(Journey for Water)

방글라데시 삿키라의 해안 지역을 지나 저수지까지 깨끗한 물을 뜨러 가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위)과 몬순 우기에 식물 섬유의 재료인 황마를 채취하는 인도의 시골 마을 모습(하)도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몬순 우기의 시골 풍경(Rural Beauty of Monsoon Season)몬순 우기의 시골 풍경(Rural Beauty of Monsoon Season)

기후위기는 심각해집니다. 그래도 미래 세대의 웃음이 곧 희망입니다.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아프카니스탄의 소녀들을 세계기상기구는 주목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들(My Homeland Smiling Girls)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들(My Homeland Smiling Girls)

녹조가 뒤덮인 브라질 수레타마의 한 호수에서 맑은 물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세계기상기구가 꼽은 10월의 사진입니다.

녹색 호수(The Green Lake)녹색 호수(The Green Lake)

남극 레구필 곶에서 발견된 빙하는 스핑크스를 닮았습니다. 12월, 남극해의 스핑크스(Sphinxes of Frozen Waters)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코가 망가진 이집트의 스핑크스처럼 지구 온난화 앞에 점점 녹아내리고 있는 스핑크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남극해의 스핑크스(Sphinxes of Frozen Waters)남극해의 스핑크스(Sphinxes of Frozen Waters)

세계기상기구는 매년 19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다음 해 달력 사진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닥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사진 공모전의 주제가 계속해서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달력에 담긴 10여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볼 수 있지만, 어쩌면 미래에는 정말 사진으로만 남을지도 모르는 현재의 모습들은 단순히 날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남은 시간을 알리는 경고장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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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3-10-06 14: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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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피난처(Flood Refuge)’, 무함마드 암마드 호사인(방글라데시)
폭우로 흙탕물에 잠긴 집 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려놓지 못하는 여인은 그저 망연자실 창밖을 응시합니다.
그 표정에서 걱정과 두려움이 보입니다.

방글라데시 북부 쿠리그람구에서 촬영된 이 사진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홍수 피난처(Flood Refuge)'입니다.
방글라데시는 지난해 '최악의 홍수'로 일컬어지는 폭우 피해를 입었습니다.
몬순 우기에 내린 폭우로 인해 방글라데시에선 백여 명의 인명 피해와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홍수 피해는 매년 반복되고,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이를 대변하는 한 장의 사진, 당장이라도 피난을 가야 할 것 같은 이 장면이 세계기상기후(WMO)가 발간하는 2024년 달력의 표지 사진으로 선정됐습니다.

세계기상기구는 매년 19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과 관심을 높이기 위해 다음 해 달력 사진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세계기상기구의 2024년 달력 사진 공모전의 주제는 '기후행동의 전선에서(At the frontline of climate action)'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심각성 등을 잘 담아낸 표지와 12달 등 14개 작품을 내년 기상달력의 사진으로 선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사진도 두 점이 선정됐습니다.

조은옥 작가의 '태풍의 흔적(Trace of Typhoon)'과 '윤성진 작가의 케이-버스(K-Bus)'인데요.

4월 사진으로 선정된 ‘태풍의 흔적(Trace of Typhoon)’, 조은옥(2022.9.6.)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다음 날, 경북 경주의 한 해안도로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도로 곳곳에 조각난 아스팔트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가운데,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높게 부서지는 모습을 자전거를 탄 시민이 바라보고 있습니다.절제된 색감으로 태풍의 위력과 그 앞에서 겸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11월 사진으로 선정된 ‘케이-버스(K-Bus)’, 윤성진(2022.8.8.)
윤성진 작가는 지난해 8월 수도권 집중 호우 피해를 마주했던 순간을 아주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돌아오는 길, 집중호우로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상황에서 물살을 헤치고 운행하는 버스를 마주한 작가는 항상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사는 동안 이렇게 갑작스럽고, 많은 폭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살면서 보기 힘든 장면들을 눈 앞에서 마주한 순간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싶어서 현장에서 느꼈던 충격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 윤성진 작가

두 작품은 기후변화로 심화되는 자연재해와 이에 따른 기후행동의 필요성을 사진으로 잘 담아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각각 4월과 11월의 사진으로 선정됐습니다.

‘폭풍의 마지막 숨결(Storm's Last Breath)’, 보슈코 흐르기치(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또 다른 표지 사진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프르냐보르에서 촬영된 낙뢰 사진이 실렸습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먹구름과 광활한 대지에 내리꽂히는 낙뢰는 자연 현상과 인간이 만든 구조물의 규모가 얼마나 크게 차이나는지 보여주는 듯 합니다.

다른 상징적인 장면들을 볼까요. 작가들의 이름은 생략했습니다.

세계기상기구 2024년 달력의 1월은 파키스탄 상하르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2022년 파키스탄을 덮친 홍수로 보급품을 지급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물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파장 위에서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흐트러졌습니다.
제목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Drowning in Despair)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Drowning in Despair)
불어오는 모래 먼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걷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모습, 흑백사진으로 담담하게 그려졌습니다. 2월의 사진입니다.

모래먼지(Dust and Grit : A Glimpse of West Gonder)
수퍼셀(Supercell storm)
위 사진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촬영된 사진입니다. 하늘의 장관을 연출했지만, 이탈리아에는 파괴적인 우박을 내렸던 수퍼셀(Supercell storm)의 모습입니다.

기후위기는 세계 곳곳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에서 부족한 식수를 구하기 위한 행렬입니다. 굽이치는 강물 옆을 위태롭게 이동합니다. 5월의 사진입니다.

기후변화와 빈 손(Climate Change and our Empty Hand)
구냐 얄라 섬(Guna Yala island in Panama)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에 빠진 파나마 북동 해안의 구나 얄라 섬의 모습도 2024년 6월을 장식했습니다. 20년 안에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는 곳인데, 2040년쯤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물 뜨러 가는 길(Journey for Water)
방글라데시 삿키라의 해안 지역을 지나 저수지까지 깨끗한 물을 뜨러 가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위)과 몬순 우기에 식물 섬유의 재료인 황마를 채취하는 인도의 시골 마을 모습(하)도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몬순 우기의 시골 풍경(Rural Beauty of Monsoon Season)
기후위기는 심각해집니다. 그래도 미래 세대의 웃음이 곧 희망입니다.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아프카니스탄의 소녀들을 세계기상기구는 주목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들(My Homeland Smiling Girls)
녹조가 뒤덮인 브라질 수레타마의 한 호수에서 맑은 물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세계기상기구가 꼽은 10월의 사진입니다.

녹색 호수(The Green Lake)
남극 레구필 곶에서 발견된 빙하는 스핑크스를 닮았습니다. 12월, 남극해의 스핑크스(Sphinxes of Frozen Waters)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코가 망가진 이집트의 스핑크스처럼 지구 온난화 앞에 점점 녹아내리고 있는 스핑크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남극해의 스핑크스(Sphinxes of Frozen Waters)
세계기상기구는 매년 193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다음 해 달력 사진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닥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사진 공모전의 주제가 계속해서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달력에 담긴 10여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볼 수 있지만, 어쩌면 미래에는 정말 사진으로만 남을지도 모르는 현재의 모습들은 단순히 날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남은 시간을 알리는 경고장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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