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넘버 3’ 축출 사태…민주주의는 어떻게 다수를 배반하는가?

입력 2023.10.06 (06:02) 수정 2023.10.0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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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 흔든 꼬리…공화당 '소수 강경파'의 반란

미국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다음 서열인 하원 의장이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2백 년이 넘는 미 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하원 의장 축출 사태에 미국 의회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에 빠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지난달 30일, 연방 정부의 업무가 정지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45일짜리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이른바 '셧다운' 사태를 면했습니다.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낸 임시 예산안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요구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이 빠졌고, 공화당 강경파들이 요구해 온 예산 대폭 삭감안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목전에 닥친 '셧다운' 사태만은 피해보자는 일종의 '타협안'이었던 셈입니다.

미 하원에서 이 임시 예산안 통과를 밀어부친 사람이 공화당 소속 캐빈 매카시 전 하원 의장인데, 공화당 내 강경파 의원들은 매카시 의장이 임시 예산안 통과 때 민주당 편을 들었다면서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공화당 내 강경파 의원들은 결국 매카시 의장의 '뒷거래' 의혹까지 제기하면서 해임안을 냈고, 해임안은 하루 만에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결과는 찬성 216, 반대 210 가결이었습니다. 민주당의 몰표에 공화당 내 '친 트럼프' 성향 강경파 의원 8명의 표가 더해진 결과였습니다.

미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의석 차이는 9석에 불과합니다.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은 스무 명 남짓에 불과하지만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공화, 민주 양당 사이에서 결정권, 이른바 '캐스팅 보트'를 쥔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넘버 3 ' 축출 사태, '트럼프 책사'의 작품?

민주당 의원들과 합세해 매카시 의장을 해임한 공화당 초강경파 의원들은 지난 1월에도 무려 15번이나 투표에 투표를 거듭한 끝에서야 매카시 의원에게 하원 의장 자리를 내줬습니다. 지난 5월 당시 매카시 의장이 바이든 대통령과 부채한도 상향을 위한 협상에 나섰을 때도 반대했습니다. 공화당 초강경파 의원들이 내세우는 건 '재정 지출 축소'와 '세금 감면'을 통한 작은 정부입니다.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강하고, 불법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번 매카시 의장 축출 사태로 미국 의회 정치는 민주당 대 공화당의 대결뿐 아니라, 공화당 내분이라는 또 다른 전선과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런 공화당 내분의 배경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사'로 유명한 스티브 배넌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매카시 의장의 해임을 주도한 공화당 '맷 게이츠' 의원과 '낸시 메이스' 하원 의원은 해임 사태 바로 다음 날 배넌의 팟캐스트 스튜디오를 찾았습니다. 배넌은 게이츠 의원을 "하원 의장 축출의 설계자이자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청취자들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코로나 방역 조치에도 반대했던 배넌이 팟캐스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지층의 분노와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이걸 온라인 모금으로까지 연결시키는 '순환 구조'의 '핵심 고리'라고 전했습니다.

공화당 내 지지기반이 약한 초강경파 의원들이 배넌을 통해 지지층과 직접 소통해 온라인 모금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되면서 더이상 당내 '기득권' 세력에게만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배넌은 강경파 의원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법 개정안은 최대한 충격적으로 만들어라. 당신이 폭스뉴스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도울 것이다."

혼돈의 미 의회…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수'를 배반하는가?

공화당 내에서 매카시 전 하원의장의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 8명은 하원 전체 의석 수 435명의 1.8%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매카시 전 의장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당론을 모은 민주당과 손잡은 공화당 내 소수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민주주의가 위기해 처했을 때의 모습을 보고싶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이번 사태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셜 미디어와 케이블 뉴스들이 정치인들을 유권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미국 내 정치학자들의 분석을 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에 대한 여러 접근도 함께 실었습니다. 이안 샤피로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정당은 매우 강하다는 것"이라면서, "최근 정당은 소수의 주변부 사람들에게 통제되면서 약화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공화, 민주 어느 한 정당이 확실하게 우세한 주가 늘고 있습니다. 샤피로 교수는 이걸 "정당 외곽 일부 활동가들이 예비 선거를 통해 사실상 지역구 의원을 결정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번 하원 의장 해임안 통과 과정에서 지켜봤듯이 소수의 극단적인 진영이 정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심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알렉스 키사르 하버드대 캐네디스쿨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는 이미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하원에서 드러난 '무질서의 위기'가 증세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조셉 포스텔 힐사이드 칼리지 정치학과 교수는 "매카시에 반대했던 하원 의원들은 더이상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갈등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한다"고 우려했습니다.

미 하원은 다음 주 중반 새 하원 의장 선출 절차에 들어갑니다. 여야 의석 차가 불과 9석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에도 강경파 지지가 필수적인 상황입니다. 당내 경선은 공화당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와 짐 조던 법사위원장의 2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미국 언론들의 평가입니다. 둘 다 당내 강경파로 분류됩니다.

초유의 하원 의장 해임 사태로 '극한 대립'의 정치를 보여줬던 미 하원은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대니얼 지블렛 하버드대 교수는 하원 의장 해임 사태와관련한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붕괴 전 단계는 정치적 교착상태와 아무것도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극도의 기능 장애"라고 짚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정부의 기능장애는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권위주의가 싹트는 전주곡이 돼 왔다"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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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 흔든 꼬리…공화당 '소수 강경파'의 반란

미국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다음 서열인 하원 의장이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2백 년이 넘는 미 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하원 의장 축출 사태에 미국 의회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에 빠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지난달 30일, 연방 정부의 업무가 정지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45일짜리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이른바 '셧다운' 사태를 면했습니다.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낸 임시 예산안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요구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이 빠졌고, 공화당 강경파들이 요구해 온 예산 대폭 삭감안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목전에 닥친 '셧다운' 사태만은 피해보자는 일종의 '타협안'이었던 셈입니다.

미 하원에서 이 임시 예산안 통과를 밀어부친 사람이 공화당 소속 캐빈 매카시 전 하원 의장인데, 공화당 내 강경파 의원들은 매카시 의장이 임시 예산안 통과 때 민주당 편을 들었다면서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공화당 내 강경파 의원들은 결국 매카시 의장의 '뒷거래' 의혹까지 제기하면서 해임안을 냈고, 해임안은 하루 만에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결과는 찬성 216, 반대 210 가결이었습니다. 민주당의 몰표에 공화당 내 '친 트럼프' 성향 강경파 의원 8명의 표가 더해진 결과였습니다.

미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의석 차이는 9석에 불과합니다.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은 스무 명 남짓에 불과하지만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공화, 민주 양당 사이에서 결정권, 이른바 '캐스팅 보트'를 쥔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넘버 3 ' 축출 사태, '트럼프 책사'의 작품?

민주당 의원들과 합세해 매카시 의장을 해임한 공화당 초강경파 의원들은 지난 1월에도 무려 15번이나 투표에 투표를 거듭한 끝에서야 매카시 의원에게 하원 의장 자리를 내줬습니다. 지난 5월 당시 매카시 의장이 바이든 대통령과 부채한도 상향을 위한 협상에 나섰을 때도 반대했습니다. 공화당 초강경파 의원들이 내세우는 건 '재정 지출 축소'와 '세금 감면'을 통한 작은 정부입니다.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강하고, 불법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번 매카시 의장 축출 사태로 미국 의회 정치는 민주당 대 공화당의 대결뿐 아니라, 공화당 내분이라는 또 다른 전선과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런 공화당 내분의 배경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사'로 유명한 스티브 배넌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매카시 의장의 해임을 주도한 공화당 '맷 게이츠' 의원과 '낸시 메이스' 하원 의원은 해임 사태 바로 다음 날 배넌의 팟캐스트 스튜디오를 찾았습니다. 배넌은 게이츠 의원을 "하원 의장 축출의 설계자이자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청취자들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코로나 방역 조치에도 반대했던 배넌이 팟캐스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지층의 분노와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이걸 온라인 모금으로까지 연결시키는 '순환 구조'의 '핵심 고리'라고 전했습니다.

공화당 내 지지기반이 약한 초강경파 의원들이 배넌을 통해 지지층과 직접 소통해 온라인 모금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되면서 더이상 당내 '기득권' 세력에게만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배넌은 강경파 의원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법 개정안은 최대한 충격적으로 만들어라. 당신이 폭스뉴스에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도울 것이다."

혼돈의 미 의회…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수'를 배반하는가?

공화당 내에서 매카시 전 하원의장의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 8명은 하원 전체 의석 수 435명의 1.8%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매카시 전 의장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당론을 모은 민주당과 손잡은 공화당 내 소수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민주주의가 위기해 처했을 때의 모습을 보고싶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이번 사태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셜 미디어와 케이블 뉴스들이 정치인들을 유권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미국 내 정치학자들의 분석을 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에 대한 여러 접근도 함께 실었습니다. 이안 샤피로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정당은 매우 강하다는 것"이라면서, "최근 정당은 소수의 주변부 사람들에게 통제되면서 약화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공화, 민주 어느 한 정당이 확실하게 우세한 주가 늘고 있습니다. 샤피로 교수는 이걸 "정당 외곽 일부 활동가들이 예비 선거를 통해 사실상 지역구 의원을 결정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번 하원 의장 해임안 통과 과정에서 지켜봤듯이 소수의 극단적인 진영이 정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심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알렉스 키사르 하버드대 캐네디스쿨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는 이미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하원에서 드러난 '무질서의 위기'가 증세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조셉 포스텔 힐사이드 칼리지 정치학과 교수는 "매카시에 반대했던 하원 의원들은 더이상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갈등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한다"고 우려했습니다.

미 하원은 다음 주 중반 새 하원 의장 선출 절차에 들어갑니다. 여야 의석 차가 불과 9석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에도 강경파 지지가 필수적인 상황입니다. 당내 경선은 공화당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와 짐 조던 법사위원장의 2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미국 언론들의 평가입니다. 둘 다 당내 강경파로 분류됩니다.

초유의 하원 의장 해임 사태로 '극한 대립'의 정치를 보여줬던 미 하원은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대니얼 지블렛 하버드대 교수는 하원 의장 해임 사태와관련한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붕괴 전 단계는 정치적 교착상태와 아무것도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극도의 기능 장애"라고 짚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정부의 기능장애는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권위주의가 싹트는 전주곡이 돼 왔다"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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