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경기만큼 치열했던 중국의 외교전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10.09 (08:02) 수정 2023.10.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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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영 CCTV에서 제작하는 콘텐츠 중에 '대국외교최전선(大國外交最前線)'이라는 짤막한 동영상 콘텐츠가 있습니다. MC가 프로그램명 그대로 '외교의 최전선'을 직접 가보고 2~3분가량 짧게 의미와 전망을 짚어주는 형식입니다. 매번 방문 장소가 바뀌는데, 최근 회차에서 이 프로그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집중 조명한 곳은 바로 아시안게임 현장이었습니다.

어제(8일) 아시안게임이 폐막했습니다. 그간 선수들의 경기에 울고 웃는 사이 미처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중국의 아시안게임 외교전을 더 늦기 전에 짤막하게나마 짚어봅니다.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내외가 항저우를 방문한 모습. (출처:CCTV, 网易)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내외가 항저우를 방문한 모습. (출처:CCTV, 网易)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각국 정상과 정부 고위 인사들이 속속 항저우를 찾았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를 기회로 정상들을 맞이하며 양자 회담을 잇따라 가졌는데, 이 가운데 중국 언론이 가장 주목한 사람은 바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었습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학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 속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이유로 얻은 별칭입니다. 이런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국제사회가 친절할 리 없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고립됐고,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알아사드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여러 차례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알아사드 대통령이 기댈 수 있었던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은 시리아와 계속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알아사드 정부를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에 수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번 방중은 2004년 이후 19년만입니다. 알아사드 대통령이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시 주석과의 회담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국제 무대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인겁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얻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이 좀처럼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려웠던 지역이 바로 중동인데, 시리아와의 외교 관계 강화를 통해 중동지역 세력 확보의 발판을 다지고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덕수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회담 사진. (출처 : 신화통신)한덕수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회담 사진. (출처 : 신화통신)

한덕수 총리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시 주석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회담을 조율 중이었던 시점부터 “한덕수 총리가 방중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하는 것은 한국이 중국의 아시안게임 개최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가지고 있고 양국 관계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만큼 중국도 이를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한 총리는 이번 정부 들어 중국을 방문한 한국 정부 인사 가운데 최고위 인사입니다. 통상 아시안게임 개막식에는 장관급 인사를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한 총리가 직접 항저우를 방문한 것은 최근 경색되고 있는 한중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의지를 충분히 드러낸 셈입니다.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 대립이 두드러지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더이상 한미일 연대가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중국으로서도 한중 관계 악화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적당한 계기와 적합한 시점을 찾아 관계 개선 시그널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연대와 화합의 장으로 기능하는 아시안게임이 그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양국 관계 개선에 있어 보다 더 전향적인 결과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되어야 도출될 수 있겠지만, 이에 앞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 주석은 회담에서 "중한관계의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발전은 양국과 양국 국민의 공통 이익에 부합하며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도 이롭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에서 각국 지도자들을 맞이하는 모습 (출처 : CCTV)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에서 각국 지도자들을 맞이하는 모습 (출처 : CCTV)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한덕수 총리 외에도 시 주석은 동티모르 총리, 캄보디아 국왕, 쿠웨이트 왕세자, 네팔 총리를 잇따라 만나는 숨 가쁜 외교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시 주석은 이번 샤나나 구스마웅 동티모르 총리와의 회담에서 양국 외교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습니다. 이후 동티모르 대통령이 군사협력은 논의한 적이 없다며 과도한 의미 부여에 선을 긋기는 했지만, 중국이 동티모르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남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해 중국이 솔로몬제도와 안보 협정을 맺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남태평양 섬나라들을 순방한 것의 연장 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주목할만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덕수 총리를 제외한 5명과의 회담 결과에 모두 '일대일로'에 대한 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의 탈퇴 의사를 밝히고 중국이 채무를 무기로 항구 등 회원국의 각종 인프라 운영권을 따낸다는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무엇보다 대항마 격인 미국의 경제회랑 구상까지 제시되며 최근 일대일로는 주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 걸쳐 자국의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확대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우군을 확보할 수 있는 일대일로는 중국에게 있어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프로젝트입니다. 중국은 이번 아시안게임을 찾은 각 국 대표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일대일로에 대한 지지를 확인받고 10주년을 맞이한 일대일로 회원국과의 연대를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 겸 대변인 엑스 캡처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 겸 대변인 엑스 캡처

중국 외교부 화춘잉 부장조리 겸 대변인은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계정에 중국 장위페이 선수와 일본 이케에 리카코 선수가 수영 경기 후 포옹하는 동영상을 게재하며 진정한 스포츠맨십과 우정이 빛났다고 적었습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와 이에 따른 반일감정 고조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최근 중일 관계와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스포츠 무대 위에서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갈등과 대립보다는 화합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앞서 언급한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 역시 아시안게임이 계기였기에 우군 만들기 및 그에 이은 미·중 사이 대립 구도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국이 발 빠른 외교 일정을 숨 가쁘게 이어간 것 역시 이 같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물론,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기존의 외교 관계에서 파생된 갈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인도 사이 영토 분쟁이 그대로 노출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이 마찰을 빚고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주(州) 출신 우슈 선수 3명에게 중국이 여권에 스테이플러로 비자를 부착하는 스테이플드 비자를 내주면서 선수들이 출국하지 못했습니다. 인도 당국은 스테이플드 비자는 출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중국이 이를 알면서도 이 비자를 발급해 사실상 입국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게 인도 측 주장입니다. 아누라그 타쿠르 인도 스포츠부 장관은 항의 차원에서 항저우 아시안게임 방문을 취소했습니다.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마오닝 대변인은 "중국은 각국 선수들이 합법적인 신분증명서를 가지고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중국 정부는 소위 '아루나찰프라데시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남티베트 지역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입니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스포츠 외교가 대립 구도 보다는 연대와 화합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무대이긴 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외교 갈등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

2019년에 열린 제2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사진2019년에 열린 제2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사진

코끼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 주석이 이번 아시안게임 개막 축사를 통해 그간 공식 석상에서 늘 그래왔듯 '냉전적 사고와 진영 대립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어쩐지 오히려 냉전이라는 수사가 곧잘 붙곤 하는 미·중 간의 갈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언제나 압도적으로 많은 금메달을 따내며 늘 종합성적 1위를 차지하는 중국이지만, 외교전에서는 미국이라는 강자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안게임으로 어느정도 잊혀진 듯 했던 대립 구도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예정된 일입니다.

일주일쯤 뒤인 오는 17일, 베이징에서 '제3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열립니다. 당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참석이 예정돼 있는 만큼 중러 사이 결속과 연대를 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앞서 지난달 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이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ndia-Middle East-Europe Economic Corridor·IMEC)' 구상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인도와 중동, 유럽을 잇는 철도와 해운 수송로를 구축해서 석유 등의 에너지와 상품을 운반 한다는 게 골자인데 일대일로에 대한 대항마 성격이 짙습니다. 영토분쟁과 아시안게임 참여 문제를 두고 최근 사이가 껄끄러운 인도와 미국에 우호적인 서방국가들이 참여 하는 만큼 중국은 이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일대일로 포럼에는 130여 개국 대표가 참여할 예정입니다. 그간 주요 정상외교 무대에는 종종 불참하면서도 스스로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국 행사는 최대한 활용해 대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던 시 주석은 이번에도 일대일로 포럼에서 이른바 '안방 외교'에 주력하며 일대일로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11월에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만남입니다. 아시안게임은 끝났지만, 중국의 숨 가쁜 외교전은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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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안게임, 경기만큼 치열했던 중국의 외교전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10-09 08:02:12
    • 수정2023-10-12 17: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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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영 CCTV에서 제작하는 콘텐츠 중에 '대국외교최전선(大國外交最前線)'이라는 짤막한 동영상 콘텐츠가 있습니다. MC가 프로그램명 그대로 '외교의 최전선'을 직접 가보고 2~3분가량 짧게 의미와 전망을 짚어주는 형식입니다. 매번 방문 장소가 바뀌는데, 최근 회차에서 이 프로그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집중 조명한 곳은 바로 아시안게임 현장이었습니다.

어제(8일) 아시안게임이 폐막했습니다. 그간 선수들의 경기에 울고 웃는 사이 미처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중국의 아시안게임 외교전을 더 늦기 전에 짤막하게나마 짚어봅니다.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내외가 항저우를 방문한 모습. (출처:CCTV, 网易)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각국 정상과 정부 고위 인사들이 속속 항저우를 찾았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를 기회로 정상들을 맞이하며 양자 회담을 잇따라 가졌는데, 이 가운데 중국 언론이 가장 주목한 사람은 바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었습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학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 속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이유로 얻은 별칭입니다. 이런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국제사회가 친절할 리 없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고립됐고,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알아사드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여러 차례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알아사드 대통령이 기댈 수 있었던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은 시리아와 계속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알아사드 정부를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에 수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번 방중은 2004년 이후 19년만입니다. 알아사드 대통령이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시 주석과의 회담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국제 무대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인겁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얻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이 좀처럼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려웠던 지역이 바로 중동인데, 시리아와의 외교 관계 강화를 통해 중동지역 세력 확보의 발판을 다지고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덕수 총리와 시진핑 주석의 회담 사진. (출처 : 신화통신)
한덕수 총리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시 주석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회담을 조율 중이었던 시점부터 “한덕수 총리가 방중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하는 것은 한국이 중국의 아시안게임 개최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가지고 있고 양국 관계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만큼 중국도 이를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한 총리는 이번 정부 들어 중국을 방문한 한국 정부 인사 가운데 최고위 인사입니다. 통상 아시안게임 개막식에는 장관급 인사를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한 총리가 직접 항저우를 방문한 것은 최근 경색되고 있는 한중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의지를 충분히 드러낸 셈입니다.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 대립이 두드러지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더이상 한미일 연대가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중국으로서도 한중 관계 악화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적당한 계기와 적합한 시점을 찾아 관계 개선 시그널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연대와 화합의 장으로 기능하는 아시안게임이 그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양국 관계 개선에 있어 보다 더 전향적인 결과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되어야 도출될 수 있겠지만, 이에 앞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 주석은 회담에서 "중한관계의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발전은 양국과 양국 국민의 공통 이익에 부합하며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도 이롭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에서 각국 지도자들을 맞이하는 모습 (출처 : CCTV)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한덕수 총리 외에도 시 주석은 동티모르 총리, 캄보디아 국왕, 쿠웨이트 왕세자, 네팔 총리를 잇따라 만나는 숨 가쁜 외교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시 주석은 이번 샤나나 구스마웅 동티모르 총리와의 회담에서 양국 외교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습니다. 이후 동티모르 대통령이 군사협력은 논의한 적이 없다며 과도한 의미 부여에 선을 긋기는 했지만, 중국이 동티모르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남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해 중국이 솔로몬제도와 안보 협정을 맺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남태평양 섬나라들을 순방한 것의 연장 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주목할만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덕수 총리를 제외한 5명과의 회담 결과에 모두 '일대일로'에 대한 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의 탈퇴 의사를 밝히고 중국이 채무를 무기로 항구 등 회원국의 각종 인프라 운영권을 따낸다는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무엇보다 대항마 격인 미국의 경제회랑 구상까지 제시되며 최근 일대일로는 주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 걸쳐 자국의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확대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우군을 확보할 수 있는 일대일로는 중국에게 있어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프로젝트입니다. 중국은 이번 아시안게임을 찾은 각 국 대표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일대일로에 대한 지지를 확인받고 10주년을 맞이한 일대일로 회원국과의 연대를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 겸 대변인 엑스 캡처
중국 외교부 화춘잉 부장조리 겸 대변인은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계정에 중국 장위페이 선수와 일본 이케에 리카코 선수가 수영 경기 후 포옹하는 동영상을 게재하며 진정한 스포츠맨십과 우정이 빛났다고 적었습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와 이에 따른 반일감정 고조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최근 중일 관계와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스포츠 무대 위에서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갈등과 대립보다는 화합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앞서 언급한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 역시 아시안게임이 계기였기에 우군 만들기 및 그에 이은 미·중 사이 대립 구도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국이 발 빠른 외교 일정을 숨 가쁘게 이어간 것 역시 이 같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물론,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기존의 외교 관계에서 파생된 갈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인도 사이 영토 분쟁이 그대로 노출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이 마찰을 빚고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주(州) 출신 우슈 선수 3명에게 중국이 여권에 스테이플러로 비자를 부착하는 스테이플드 비자를 내주면서 선수들이 출국하지 못했습니다. 인도 당국은 스테이플드 비자는 출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중국이 이를 알면서도 이 비자를 발급해 사실상 입국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게 인도 측 주장입니다. 아누라그 타쿠르 인도 스포츠부 장관은 항의 차원에서 항저우 아시안게임 방문을 취소했습니다.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마오닝 대변인은 "중국은 각국 선수들이 합법적인 신분증명서를 가지고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중국 정부는 소위 '아루나찰프라데시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남티베트 지역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입니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스포츠 외교가 대립 구도 보다는 연대와 화합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무대이긴 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외교 갈등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

2019년에 열린 제2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사진
코끼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 주석이 이번 아시안게임 개막 축사를 통해 그간 공식 석상에서 늘 그래왔듯 '냉전적 사고와 진영 대립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어쩐지 오히려 냉전이라는 수사가 곧잘 붙곤 하는 미·중 간의 갈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언제나 압도적으로 많은 금메달을 따내며 늘 종합성적 1위를 차지하는 중국이지만, 외교전에서는 미국이라는 강자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안게임으로 어느정도 잊혀진 듯 했던 대립 구도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예정된 일입니다.

일주일쯤 뒤인 오는 17일, 베이징에서 '제3회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열립니다. 당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참석이 예정돼 있는 만큼 중러 사이 결속과 연대를 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앞서 지난달 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이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ndia-Middle East-Europe Economic Corridor·IMEC)' 구상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인도와 중동, 유럽을 잇는 철도와 해운 수송로를 구축해서 석유 등의 에너지와 상품을 운반 한다는 게 골자인데 일대일로에 대한 대항마 성격이 짙습니다. 영토분쟁과 아시안게임 참여 문제를 두고 최근 사이가 껄끄러운 인도와 미국에 우호적인 서방국가들이 참여 하는 만큼 중국은 이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일대일로 포럼에는 130여 개국 대표가 참여할 예정입니다. 그간 주요 정상외교 무대에는 종종 불참하면서도 스스로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국 행사는 최대한 활용해 대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던 시 주석은 이번에도 일대일로 포럼에서 이른바 '안방 외교'에 주력하며 일대일로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11월에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만남입니다. 아시안게임은 끝났지만, 중국의 숨 가쁜 외교전은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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