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 때문에 더는 죽지 않게”…절절한 호소에 법 바뀔까?

입력 2023.11.04 (11:00) 수정 2023.11.0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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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억 원의 손해배상은 제게 작은 미래도 그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막막합니다. 언제 이 막대한 비용을 갚게 될지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택배 상자를 잠시 내려놓고 국회를 찾은 노동자 강민욱 씨, 더불어민주당이 어제(3일) 연 이른바 '노란봉투법' 관련 간담회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털어놨습니다.

강 씨는 동료의 과로사 이후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택배노조 파업에 참여했다가 사측으로부터 20억원 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는데, 만약 노란봉투법이 그때도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강 씨는 파업 당시 사측이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며, "노조법 2조가 개정됐다면 국민 여러분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기업과 이에 맞서 파업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머리를 맞댄 노사의 대화하는 모습을 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간담회에는 노조 활동을 하다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린 당사자와 가족들이 직접 참석해 노란봉투법 처리를 호소했습니다.

2003년에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한진중공업 노조 고 김주익 씨의 형 김주현 씨는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동생은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고자 목숨을 바쳤단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KEC부부맞벌이 손배사업장 김진아 씨 또한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는 가장으로 손해배상을 받았는데, 대출금은 점점 불어나고 생활고는 너무나 힘들다"며 "정부가 국민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저희는 설 곳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최현환 지회장은 "숱한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는데 법과 재판부는 하나도 달라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압류 때문에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습니다.

■ 노란봉투법, '진짜 사장과의 교섭'·'손해배상 청구에 제한' 내용

'노란봉투법' 논의는 2009년 쌍용차 파업으로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 노조원들을 돕기 위해 노란 봉투에 성금을 담아 보냈던 시민운동에서 시작됐습니다.

앞으로는 아예 이런 일이 없게 하자며 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로 번져간 겁니다.

현행 노조법 2조는 사용자를 근로 계약 주체가 되는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로 보고 있는데, 2조 개정안은 여기에 '근로조건에 사실상의 영향력이 있는 자'를 추가해 사용자의 범위를 넓히는 내용입니다.

현행법상 하청·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등은 원청의 결정에 따라 노동조건이 바뀌지만 원청과 단체교섭을 할 수 없으므로, 사용자 범위를 이른바 '진짜 사장'인 원청까지 넓히고 원청과 교섭할 수 있게 해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입니다.

노조법 3조 개정안은 파업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에 제한을 두는 내용입니다.

이제까지는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과 파업을 결정한 노동조합이 배상 책임을 똑같이 졌고, 노동자 개인에게 수억 원의 손해배상금이 청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정안은 '손해배상 의무자별로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새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19대 국회에서 법 개정안이 발의된 이후 한동안 여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 이후 470억원 가량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며 다시 논의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난 6월, 대법원이 전체적으로 파업 노동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과 취지가 유사한 판결을 내리면서 민주당도 법안 통과에 더욱 힘을 실었습니다.

이제 국회 문턱은 단 하나 본회의만이 남아 있습니다.

어제 간담회를 계기로 더불어민주당은 '노란봉투법' 본회의 처리를 더욱 확고하게 공언했습니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손배소 가압류로 노동자 한 명이 아닌 가족의 삶까지 벼랑으로 내모는 현행법은 매우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며 "9일부터 13일까지 5일에 걸쳐 4개 법안(노란봉투법·방송3법)을 24시간 단위로 끊어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국민의힘 "'노란봉투법', 노사갈등 유발"...본회의 통과해도 '대통령 거부권'이 변수

경영계는 일찌감치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노조법 2조 개정안에 대해선 하청 노동자들이 직접 계약을 맺은 업체와 대화가 안 되면 협상 노력 없이 원청에 마구 교섭을 요구할 수 있으며, 3조 개정안에 대해서도 손해에 대한 책임 비율을 입증할 기준이 없으므로 배상이 제한되고 파업이 과격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협회 손경식 회장은 지난 2일 경총회관을 찾은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에게 "노란봉투법에 대해 경영계와 잘 협의하고 논의했으면 좋겠다"며 우려의 뜻을 에둘러 전달한 바 있습니다.

여당은 이런 경영계의 우려를 들어 야당이 법안 처리를 강행하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나서겠다는 입장입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업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노란봉투법을 민주당이 끝내 강행 처리한다면 산업 생태계가 혼란에 빠지고 노사 갈등이 격렬해질 것"이라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 자명하다"고 반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야당이 첨예한 쟁점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할 때 사회 전체의 갈등이 격화된다는 것은 지난 간호법 사태를 통해 분명히 확인된 사실"이고,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들에게 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민주당이 단독처리를 강행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원내대표의 공개 발언 이후 여당은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습니다. 필리버스터에 나설 것으로 알려진 국민의힘 의원만 어제(3일)까지 20명에 달했는데, 국회에서 '무제한 토론 점검 회의'도 열었습니다.

의석 수로만 따지면 10여 년을 끌어온 '노란봉투법'은 이번에야말로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또 다른 카드도 앞에 놓인 상황, 과연 노동자들의 절절한 호소에 국회가 응답할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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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4 11:00:13
    • 수정2023-11-04 11: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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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억 원의 손해배상은 제게 작은 미래도 그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막막합니다. 언제 이 막대한 비용을 갚게 될지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택배 상자를 잠시 내려놓고 국회를 찾은 노동자 강민욱 씨, 더불어민주당이 어제(3일) 연 이른바 '노란봉투법' 관련 간담회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털어놨습니다.

강 씨는 동료의 과로사 이후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택배노조 파업에 참여했다가 사측으로부터 20억원 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는데, 만약 노란봉투법이 그때도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강 씨는 파업 당시 사측이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며, "노조법 2조가 개정됐다면 국민 여러분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기업과 이에 맞서 파업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머리를 맞댄 노사의 대화하는 모습을 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간담회에는 노조 활동을 하다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린 당사자와 가족들이 직접 참석해 노란봉투법 처리를 호소했습니다.

2003년에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한진중공업 노조 고 김주익 씨의 형 김주현 씨는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동생은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고자 목숨을 바쳤단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KEC부부맞벌이 손배사업장 김진아 씨 또한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는 가장으로 손해배상을 받았는데, 대출금은 점점 불어나고 생활고는 너무나 힘들다"며 "정부가 국민의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저희는 설 곳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최현환 지회장은 "숱한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는데 법과 재판부는 하나도 달라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압류 때문에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습니다.

■ 노란봉투법, '진짜 사장과의 교섭'·'손해배상 청구에 제한' 내용

'노란봉투법' 논의는 2009년 쌍용차 파업으로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 노조원들을 돕기 위해 노란 봉투에 성금을 담아 보냈던 시민운동에서 시작됐습니다.

앞으로는 아예 이런 일이 없게 하자며 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로 번져간 겁니다.

현행 노조법 2조는 사용자를 근로 계약 주체가 되는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로 보고 있는데, 2조 개정안은 여기에 '근로조건에 사실상의 영향력이 있는 자'를 추가해 사용자의 범위를 넓히는 내용입니다.

현행법상 하청·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 등은 원청의 결정에 따라 노동조건이 바뀌지만 원청과 단체교섭을 할 수 없으므로, 사용자 범위를 이른바 '진짜 사장'인 원청까지 넓히고 원청과 교섭할 수 있게 해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입니다.

노조법 3조 개정안은 파업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에 제한을 두는 내용입니다.

이제까지는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과 파업을 결정한 노동조합이 배상 책임을 똑같이 졌고, 노동자 개인에게 수억 원의 손해배상금이 청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정안은 '손해배상 의무자별로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새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19대 국회에서 법 개정안이 발의된 이후 한동안 여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 이후 470억원 가량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며 다시 논의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난 6월, 대법원이 전체적으로 파업 노동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과 취지가 유사한 판결을 내리면서 민주당도 법안 통과에 더욱 힘을 실었습니다.

이제 국회 문턱은 단 하나 본회의만이 남아 있습니다.

어제 간담회를 계기로 더불어민주당은 '노란봉투법' 본회의 처리를 더욱 확고하게 공언했습니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손배소 가압류로 노동자 한 명이 아닌 가족의 삶까지 벼랑으로 내모는 현행법은 매우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며 "9일부터 13일까지 5일에 걸쳐 4개 법안(노란봉투법·방송3법)을 24시간 단위로 끊어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국민의힘 "'노란봉투법', 노사갈등 유발"...본회의 통과해도 '대통령 거부권'이 변수

경영계는 일찌감치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노조법 2조 개정안에 대해선 하청 노동자들이 직접 계약을 맺은 업체와 대화가 안 되면 협상 노력 없이 원청에 마구 교섭을 요구할 수 있으며, 3조 개정안에 대해서도 손해에 대한 책임 비율을 입증할 기준이 없으므로 배상이 제한되고 파업이 과격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한국경영자총협회 손경식 회장은 지난 2일 경총회관을 찾은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에게 "노란봉투법에 대해 경영계와 잘 협의하고 논의했으면 좋겠다"며 우려의 뜻을 에둘러 전달한 바 있습니다.

여당은 이런 경영계의 우려를 들어 야당이 법안 처리를 강행하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나서겠다는 입장입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업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노란봉투법을 민주당이 끝내 강행 처리한다면 산업 생태계가 혼란에 빠지고 노사 갈등이 격렬해질 것"이라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 자명하다"고 반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야당이 첨예한 쟁점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할 때 사회 전체의 갈등이 격화된다는 것은 지난 간호법 사태를 통해 분명히 확인된 사실"이고,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들에게 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민주당이 단독처리를 강행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원내대표의 공개 발언 이후 여당은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습니다. 필리버스터에 나설 것으로 알려진 국민의힘 의원만 어제(3일)까지 20명에 달했는데, 국회에서 '무제한 토론 점검 회의'도 열었습니다.

의석 수로만 따지면 10여 년을 끌어온 '노란봉투법'은 이번에야말로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또 다른 카드도 앞에 놓인 상황, 과연 노동자들의 절절한 호소에 국회가 응답할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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