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4·3이 없었더라면”…고순자 할머니의 기억
입력 2024.02.01 (19:45)
수정 2024.02.0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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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 어느덧 100번째 증언자입니다.
고순자 할머니는 4·3 당시 아버지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가족도 도피하다시피 육지로 피신해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우리 아버지가 고창옥, 고창옥 하면 하귀 가면 다 알았어요.우리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했었나 봐요. 그 당시에는 단국중학교(하귀중학원),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설립해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4·3 관련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친정 아버지를 먼저 잡아들이고 좀 시끄러웠죠. 4·3 사건 때 (다른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을 갔는데 우리는 산으로 안 가고 바닷가로 갔어요. 바닷가 (하귀)가문동. 옛날에는 관덕정 마당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거기서 와서 아버지를 무조건 데려갔어요. 한번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형사들이 네 명이 왔어요. 여름이어서 자리 회를 해 드렸는데 그걸 먹는데 와서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안 돌아온 거에요. 고향 문중회 우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 집에 왔다고 그때 나는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아 나왔어요. (벌금형 받고)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친정(작은아버지), 이제 아들은 살아있어요. 아들을 업고 뛰어가는데 쏘아버리니까 (작은)아버지는 죽고 그 아들은 동네 사람이 업어 왔는데. 우리 할아버지, 우리 친정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혀가고 들어가고 아주 힘드니까 자살해버렸어요. (하귀리) 궤물에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해서 (전북) 이리, 이리 가서 초가집 독채를 빌어서 (살았어요.)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친구가 거기서 당면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가서 살면서 지냈는데 내내 마포에서 살다가 아버지 먼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어머니 돌아가시고 했는데 아버지 (수시로 경찰에)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지금은 4·3 (분위기가) 밝아져서 서로가 대화도 하고 하지만 옛날에는 쉬쉬했어, 말도 못하고 서로가 쉬쉬했어요. 우리가 제주도 살았으면 아주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거기(육지) 가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이라도 (아버지 특별재심 무죄 판결)이렇게 해주니까 너무 고마워. 4·3사건을 그대로 놔뒀으면 너무 억울할 건데, 그래도 늦게나마."]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 어느덧 100번째 증언자입니다.
고순자 할머니는 4·3 당시 아버지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가족도 도피하다시피 육지로 피신해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우리 아버지가 고창옥, 고창옥 하면 하귀 가면 다 알았어요.우리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했었나 봐요. 그 당시에는 단국중학교(하귀중학원),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설립해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4·3 관련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친정 아버지를 먼저 잡아들이고 좀 시끄러웠죠. 4·3 사건 때 (다른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을 갔는데 우리는 산으로 안 가고 바닷가로 갔어요. 바닷가 (하귀)가문동. 옛날에는 관덕정 마당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거기서 와서 아버지를 무조건 데려갔어요. 한번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형사들이 네 명이 왔어요. 여름이어서 자리 회를 해 드렸는데 그걸 먹는데 와서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안 돌아온 거에요. 고향 문중회 우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 집에 왔다고 그때 나는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아 나왔어요. (벌금형 받고)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친정(작은아버지), 이제 아들은 살아있어요. 아들을 업고 뛰어가는데 쏘아버리니까 (작은)아버지는 죽고 그 아들은 동네 사람이 업어 왔는데. 우리 할아버지, 우리 친정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혀가고 들어가고 아주 힘드니까 자살해버렸어요. (하귀리) 궤물에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해서 (전북) 이리, 이리 가서 초가집 독채를 빌어서 (살았어요.)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친구가 거기서 당면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가서 살면서 지냈는데 내내 마포에서 살다가 아버지 먼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어머니 돌아가시고 했는데 아버지 (수시로 경찰에)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지금은 4·3 (분위기가) 밝아져서 서로가 대화도 하고 하지만 옛날에는 쉬쉬했어, 말도 못하고 서로가 쉬쉬했어요. 우리가 제주도 살았으면 아주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거기(육지) 가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이라도 (아버지 특별재심 무죄 판결)이렇게 해주니까 너무 고마워. 4·3사건을 그대로 놔뒀으면 너무 억울할 건데, 그래도 늦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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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증언] “4·3이 없었더라면”…고순자 할머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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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2-01 19:45:44
- 수정2024-02-01 22:19:45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 어느덧 100번째 증언자입니다.
고순자 할머니는 4·3 당시 아버지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가족도 도피하다시피 육지로 피신해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우리 아버지가 고창옥, 고창옥 하면 하귀 가면 다 알았어요.우리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했었나 봐요. 그 당시에는 단국중학교(하귀중학원),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설립해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4·3 관련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친정 아버지를 먼저 잡아들이고 좀 시끄러웠죠. 4·3 사건 때 (다른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을 갔는데 우리는 산으로 안 가고 바닷가로 갔어요. 바닷가 (하귀)가문동. 옛날에는 관덕정 마당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거기서 와서 아버지를 무조건 데려갔어요. 한번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형사들이 네 명이 왔어요. 여름이어서 자리 회를 해 드렸는데 그걸 먹는데 와서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안 돌아온 거에요. 고향 문중회 우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 집에 왔다고 그때 나는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아 나왔어요. (벌금형 받고)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친정(작은아버지), 이제 아들은 살아있어요. 아들을 업고 뛰어가는데 쏘아버리니까 (작은)아버지는 죽고 그 아들은 동네 사람이 업어 왔는데. 우리 할아버지, 우리 친정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혀가고 들어가고 아주 힘드니까 자살해버렸어요. (하귀리) 궤물에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해서 (전북) 이리, 이리 가서 초가집 독채를 빌어서 (살았어요.)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친구가 거기서 당면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가서 살면서 지냈는데 내내 마포에서 살다가 아버지 먼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어머니 돌아가시고 했는데 아버지 (수시로 경찰에)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지금은 4·3 (분위기가) 밝아져서 서로가 대화도 하고 하지만 옛날에는 쉬쉬했어, 말도 못하고 서로가 쉬쉬했어요. 우리가 제주도 살았으면 아주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거기(육지) 가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이라도 (아버지 특별재심 무죄 판결)이렇게 해주니까 너무 고마워. 4·3사건을 그대로 놔뒀으면 너무 억울할 건데, 그래도 늦게나마."]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 어느덧 100번째 증언자입니다.
고순자 할머니는 4·3 당시 아버지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가족도 도피하다시피 육지로 피신해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우리 아버지가 고창옥, 고창옥 하면 하귀 가면 다 알았어요.우리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했었나 봐요. 그 당시에는 단국중학교(하귀중학원),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설립해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4·3 관련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친정 아버지를 먼저 잡아들이고 좀 시끄러웠죠. 4·3 사건 때 (다른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을 갔는데 우리는 산으로 안 가고 바닷가로 갔어요. 바닷가 (하귀)가문동. 옛날에는 관덕정 마당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거기서 와서 아버지를 무조건 데려갔어요. 한번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형사들이 네 명이 왔어요. 여름이어서 자리 회를 해 드렸는데 그걸 먹는데 와서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것이 안 돌아온 거에요. 고향 문중회 우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었어요.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 집에 왔다고 그때 나는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아 나왔어요. (벌금형 받고)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친정(작은아버지), 이제 아들은 살아있어요. 아들을 업고 뛰어가는데 쏘아버리니까 (작은)아버지는 죽고 그 아들은 동네 사람이 업어 왔는데. 우리 할아버지, 우리 친정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잡혀가고 들어가고 아주 힘드니까 자살해버렸어요. (하귀리) 궤물에서."]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해서 (전북) 이리, 이리 가서 초가집 독채를 빌어서 (살았어요.) (서울 마포에서) 아버지 친구가 거기서 당면공장도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가서 살면서 지냈는데 내내 마포에서 살다가 아버지 먼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어머니 돌아가시고 했는데 아버지 (수시로 경찰에)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고순자/4·3희생자 유족 : "지금은 4·3 (분위기가) 밝아져서 서로가 대화도 하고 하지만 옛날에는 쉬쉬했어, 말도 못하고 서로가 쉬쉬했어요. 우리가 제주도 살았으면 아주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거기(육지) 가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이라도 (아버지 특별재심 무죄 판결)이렇게 해주니까 너무 고마워. 4·3사건을 그대로 놔뒀으면 너무 억울할 건데, 그래도 늦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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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두 기자 yyd9212@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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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윤 기자 jaey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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