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 한빛원전 2호기.
우리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당장 내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인간의 목숨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저 맘 편히 무병장수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기대를 할 뿐이겠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수명이 정해진 것들도 있습니다. 공학적인 설계로 탄생하는 물건들이 그렇습니다. 이걸 '설계수명'이라고 부릅니다. 기계의 성능과 안전성이 담보되는 시한을 의미합니다.
■ 마흔 살 되는 원전들…줄줄이 '수명 만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설계수명을 놓고 다시 시끄럽습니다. 국내 원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수로 원전'의 설계수명은 40년입니다. 1980년대 지어진 원전들은 이미 마흔 살이 됐거나, 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흔 살이 넘으면 원칙적으로 원전 문을 닫아야 합니다.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돌리면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인간처럼 끝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만들 때부터 정해진 수명이 만료됐으니 원전을 폐쇄하면 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빛원전 1·2호기 수명 연장 관련 절차 철회를 촉구하는 환경단체의 기자회견 (한빛핵발전소 대응 호남권공동행동 제공)
그런데 이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당연히 최대한 원전을 오래 돌리려고 합니다. 원전이 문을 닫으면 그동안 공급하던 전력은 어디서 확보하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정부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의 허가를 받으면 10년 더 돌릴 수 있고, 아니면 폐쇄해야 합니다. '수명 연장'을 놓고 논란이 거센 이유입니다.
■ 전남 영광 한빛원전 1·2호기, 수명 연장 놓고 벌써 진통
서해안에 있는 유일한 원자력발전소인 전남 영광군의 한빛원전 역시 수명 연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한빛원전 1호기는 1986년, 2호기는 87년에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설계수명 40년을 계산해 보면 1호기는 내년에, 2호기는 내후년에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한빛원전 측은 지난해 이미 수명 연장 절차에 돌입했는데, 초기 절차인 주민 의견 수렴부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원전 측은 발전소를 10년 더 돌렸을 때 주변에 방사선이 얼마나 발생하는지를 예측한 평가서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를 한빛원전 반경 30km에 있는 지방자치단체 6곳(영광, 함평, 장성, 담양, 고창, 부안)에 보냈고,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공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수원이 자치단체에 공람을 요청한 방사선 환경영향 평가서 초안.
하지만 평가서를 접한 일부 주민들과 환경단체는 여러 지적을 쏟아냈습니다. 주민들이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고, 주민 보호 대책 등은 미흡하다는 등의 비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평가서를 받은 지자체 6곳 가운데 4곳은 한수원에 보완을 요청하며 공람 절차를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 한수원, 지자체 대상 행정소송 냈다 철회하기도
갈등이 더 첨예해진 건, 지난달 한수원이 공람을 보류하는 지자체들에 행정소송을 내면서부터였습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행정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한수원은 3개월 이상 공람이 보류된 것을 그냥 두면 권리가 상실될 수 있어서 부득이하게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과한 압박이라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간 공람을 보류하던 영광군이 지난달 25일 공람을 개시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습니다. 한수원의 압박 때문에 절차를 시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수원은 최근 행정소송을 철회했고, 영광군도 “내부 검토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지 압박 때문에 공람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원전 반대 단체는 "전문 용어로 이뤄진 평가서 초안을 열람한 주민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서명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며 "영광군은 지금이라도 주민 공람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안 좋은 만큼, 공람 절차가 끝나고 이뤄질 공청회도 파행을 겪을 수 있단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 5년 안에 원전 10기 수명 만료…대책 있나?
원전 수명 연장 문제는 영광군과 주변 자치단체만의 일이 아닙니다. 고리원전 2호기의 수명 연장을 놓고도 부산 지역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고리 3호기, 내년에는 고리 4호기, 내후년에는 월성 2호기의 수명이 끝납니다. 이렇게 앞으로 5년 안에 원전 10기의 수명이 만료됩니다.
원전 수명 연장은 논란과 찬반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앞서 큰 진통을 겪었던 경주 월성 1호기와 부산 고리 1호기의 수명 연장과 폐쇄 때도 그랬습니다. 정부의 원전 정책마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발생한 막대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지역사회로 전가되고 있습니다.
■ "주민 의견 수렴, 절차적 정의 실현돼야"
앞선 사례의 교훈은 원전 폐쇄든, 연장 운영이든 절차적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민 의견 수렴이 형식적으로 이뤄지지 않도록 한수원과 자치단체가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우려를 줄일 만한 대책 마련도 절실합니다.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면 지금도 처리 장소를 못 찾고 있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더 늘어나는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또 그간 여러 사건과 사고가 발생했던 한빛 1·2호기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해답을 내놓아야 할 거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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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 살 원전…수명 연장 기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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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2-03 07:01:31
우리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당장 내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인간의 목숨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저 맘 편히 무병장수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기대를 할 뿐이겠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수명이 정해진 것들도 있습니다. 공학적인 설계로 탄생하는 물건들이 그렇습니다. 이걸 '설계수명'이라고 부릅니다. 기계의 성능과 안전성이 담보되는 시한을 의미합니다.
■ 마흔 살 되는 원전들…줄줄이 '수명 만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설계수명을 놓고 다시 시끄럽습니다. 국내 원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수로 원전'의 설계수명은 40년입니다. 1980년대 지어진 원전들은 이미 마흔 살이 됐거나, 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흔 살이 넘으면 원칙적으로 원전 문을 닫아야 합니다.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돌리면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인간처럼 끝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만들 때부터 정해진 수명이 만료됐으니 원전을 폐쇄하면 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당연히 최대한 원전을 오래 돌리려고 합니다. 원전이 문을 닫으면 그동안 공급하던 전력은 어디서 확보하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정부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의 허가를 받으면 10년 더 돌릴 수 있고, 아니면 폐쇄해야 합니다. '수명 연장'을 놓고 논란이 거센 이유입니다.
■ 전남 영광 한빛원전 1·2호기, 수명 연장 놓고 벌써 진통
서해안에 있는 유일한 원자력발전소인 전남 영광군의 한빛원전 역시 수명 연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한빛원전 1호기는 1986년, 2호기는 87년에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설계수명 40년을 계산해 보면 1호기는 내년에, 2호기는 내후년에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한빛원전 측은 지난해 이미 수명 연장 절차에 돌입했는데, 초기 절차인 주민 의견 수렴부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원전 측은 발전소를 10년 더 돌렸을 때 주변에 방사선이 얼마나 발생하는지를 예측한 평가서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를 한빛원전 반경 30km에 있는 지방자치단체 6곳(영광, 함평, 장성, 담양, 고창, 부안)에 보냈고,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공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평가서를 접한 일부 주민들과 환경단체는 여러 지적을 쏟아냈습니다. 주민들이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고, 주민 보호 대책 등은 미흡하다는 등의 비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평가서를 받은 지자체 6곳 가운데 4곳은 한수원에 보완을 요청하며 공람 절차를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 한수원, 지자체 대상 행정소송 냈다 철회하기도
갈등이 더 첨예해진 건, 지난달 한수원이 공람을 보류하는 지자체들에 행정소송을 내면서부터였습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행정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한수원은 3개월 이상 공람이 보류된 것을 그냥 두면 권리가 상실될 수 있어서 부득이하게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과한 압박이라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간 공람을 보류하던 영광군이 지난달 25일 공람을 개시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습니다. 한수원의 압박 때문에 절차를 시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수원은 최근 행정소송을 철회했고, 영광군도 “내부 검토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지 압박 때문에 공람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원전 반대 단체는 "전문 용어로 이뤄진 평가서 초안을 열람한 주민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서명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며 "영광군은 지금이라도 주민 공람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안 좋은 만큼, 공람 절차가 끝나고 이뤄질 공청회도 파행을 겪을 수 있단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 5년 안에 원전 10기 수명 만료…대책 있나?
원전 수명 연장 문제는 영광군과 주변 자치단체만의 일이 아닙니다. 고리원전 2호기의 수명 연장을 놓고도 부산 지역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고리 3호기, 내년에는 고리 4호기, 내후년에는 월성 2호기의 수명이 끝납니다. 이렇게 앞으로 5년 안에 원전 10기의 수명이 만료됩니다.
원전 수명 연장은 논란과 찬반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앞서 큰 진통을 겪었던 경주 월성 1호기와 부산 고리 1호기의 수명 연장과 폐쇄 때도 그랬습니다. 정부의 원전 정책마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발생한 막대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지역사회로 전가되고 있습니다.
■ "주민 의견 수렴, 절차적 정의 실현돼야"
앞선 사례의 교훈은 원전 폐쇄든, 연장 운영이든 절차적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민 의견 수렴이 형식적으로 이뤄지지 않도록 한수원과 자치단체가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우려를 줄일 만한 대책 마련도 절실합니다.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면 지금도 처리 장소를 못 찾고 있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더 늘어나는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또 그간 여러 사건과 사고가 발생했던 한빛 1·2호기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해답을 내놓아야 할 거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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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희 기자 shar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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