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지 마세요” 제주소방에서 ‘주의보’ 내린 까닭

입력 2024.03.2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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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연례행사처럼 쓰는 사건·사고 기사가 있습니다. 119에서 출동한 '길 잃음' 사고입니다.

처음 들으면 '실종 신고도 아니고, 무슨 길을 잃었다고 119에 신고하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지만, 실제 제주에서는 매년 이맘때 숲과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건씩 119상황실에 걸려옵니다.

■ 소고기보다 비싼 '고사리' 꺾으러 전국에서 제주行

봄이 오면 제주 산간 벌판과 오름 등지에 이른 새벽부터 모자를 쓰고 앞치마와 가방을 둘러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를 꺾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지요. 바로 봄비를 촉촉이 맞으며 자란 야생 고사리를 채취하는 광경입니다.

제주 곶자왈과 풀숲에서 자란 야생 고사리는 예로부터 '궐채'라고 불리며 임금에게 진상했던 특산품이었을 정도로 맛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잘 말린 제주 고사리는 웬만한 한우 부위보다도 값을 비싸게 쳐주기도 합니다.

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채취한 고사리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채취한 고사리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갓 자란 통통하고 여린 고사리를 손으로 '똑, 똑' 꺾는 맛을 잊지 못해, 봄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토박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고사리 채취객이 제주의 산과 들로 향합니다.

■ 최근 5년간 길 잃음 사고 41.4%가 고사리 채취 중 발생

문제는 고사리를 하나라도 더 꺾으려다가 길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주 곶자왈 등 풀숲과 들녘을 돌아다니며 고사리를 꺾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줄도 모르기 일쑤. 특히 지형지물을 알아보기 힘든 곶자왈(숲)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 119 등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겁니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제주도소방안전본부에서 출동을 나간 '길 잃음 사고'는 모두 459건으로, 이 가운데 고사리를 꺾다가 길을 잃은 경우가 41.4%(190건)를 차지했습니다. 대부분 건강 상태가 양호해 곧바로 귀가 조치했지만, 고사리 채취에 나섰다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올봄에도 벌써 고사리 채취객이 길을 잃었다는 신고가 4건(27일 기준) 접수됐습니다. 지난 27일 낮 1시 20분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일대에서 홀로 고사리를 꺾던 50대 여성이 길을 잃었다고 119에 신고해,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20여 분 만에 이 여성을 찾았습니다.

제주 서귀포시 산록남로변의 한 공동목장에서 주민들이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다. 연합뉴스제주 서귀포시 산록남로변의 한 공동목장에서 주민들이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보다 하루 앞선 26일에도 제주시 조천읍에서 고사리를 채취하다가 길을 잃은 60대 여성이 119에 구조되는 등, 이날 하루 동안 '고사리 길 잃음' 사고만 3건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나 홀로 고사리 채취'가 아니어도 길을 잃기도 합니다.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다가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해 일행도 잃고 길도 잃게 되는 경우입니다. 지난해 4월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서 "함께 고사리를 꺾던 어머니가 없어졌다"며 딸이 신고해, 경찰과 소방당국이 40여 분 만에 80대 여성을 구조하기도 했습니다.

■ 제주소방, 봄철 '길 잃음 안전사고 주의보' 발령

한편 고사리 꺾기 외에도 등산 또는 오름 탐방에 나섰다가, 또는 올레·둘레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며 119에 신고하는 사례도 최근 5년간 각각 150건, 119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소방 당국은 고사리를 채취할 땐 반드시 일행과 함께 다니고, 휴대전화와 예비 배터리, 호루라기 등 주변에 위치를 알릴 장비를 챙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길을 잃어 119에 구조 요청을 할 때 전신주 번호(위)와 국가지점 번호를 불러줘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 신속히 찾을 수 있다. 제주도소방안전본부 제공길을 잃어 119에 구조 요청을 할 때 전신주 번호(위)와 국가지점 번호를 불러줘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 신속히 찾을 수 있다. 제주도소방안전본부 제공

오랜 시간 길을 헤맬 경우 탈진하거나 다칠 수도 있어, 자신의 위치를 빨리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119에 신고할 때에는 주변 건물의 번호판이나 간판 전화번호, 도로명판에 있는 도로명과 번호, 전신주에 적힌 번호와 국가지점 번호 등을 불러주는 것이 신속한 수색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 제주에선 '풍력 발전기'에도 식별 번호를 표시해, 길을 잃었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날씨 예보를 미리 확인해 무리한 야외활동을 삼가고, 고사리 꺾기 등을 할 때는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일행과 서로 위치를 알려야 합니다. 또 방향을 잃어버리는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외투, 물, 비상식량과 손전등을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사고 예방법은 나 홀로 너무 멀리, 또 깊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고사리 삼매경'에 빠져 땅만 보고 가다가, 주변이 어둑어둑해진 줄도 모르는 상황에 닥쳐 119를 누르는 일이 올해는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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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 잃지 마세요” 제주소방에서 ‘주의보’ 내린 까닭
    • 입력 2024-03-28 17: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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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연례행사처럼 쓰는 사건·사고 기사가 있습니다. 119에서 출동한 '길 잃음' 사고입니다.

처음 들으면 '실종 신고도 아니고, 무슨 길을 잃었다고 119에 신고하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지만, 실제 제주에서는 매년 이맘때 숲과 덤불 속에서 길을 잃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건씩 119상황실에 걸려옵니다.

■ 소고기보다 비싼 '고사리' 꺾으러 전국에서 제주行

봄이 오면 제주 산간 벌판과 오름 등지에 이른 새벽부터 모자를 쓰고 앞치마와 가방을 둘러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를 꺾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지요. 바로 봄비를 촉촉이 맞으며 자란 야생 고사리를 채취하는 광경입니다.

제주 곶자왈과 풀숲에서 자란 야생 고사리는 예로부터 '궐채'라고 불리며 임금에게 진상했던 특산품이었을 정도로 맛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잘 말린 제주 고사리는 웬만한 한우 부위보다도 값을 비싸게 쳐주기도 합니다.

지난해 제27회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일대 들판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채취한 고사리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갓 자란 통통하고 여린 고사리를 손으로 '똑, 똑' 꺾는 맛을 잊지 못해, 봄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토박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고사리 채취객이 제주의 산과 들로 향합니다.

■ 최근 5년간 길 잃음 사고 41.4%가 고사리 채취 중 발생

문제는 고사리를 하나라도 더 꺾으려다가 길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주 곶자왈 등 풀숲과 들녘을 돌아다니며 고사리를 꺾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줄도 모르기 일쑤. 특히 지형지물을 알아보기 힘든 곶자왈(숲)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 119 등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겁니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제주도소방안전본부에서 출동을 나간 '길 잃음 사고'는 모두 459건으로, 이 가운데 고사리를 꺾다가 길을 잃은 경우가 41.4%(190건)를 차지했습니다. 대부분 건강 상태가 양호해 곧바로 귀가 조치했지만, 고사리 채취에 나섰다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올봄에도 벌써 고사리 채취객이 길을 잃었다는 신고가 4건(27일 기준) 접수됐습니다. 지난 27일 낮 1시 20분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일대에서 홀로 고사리를 꺾던 50대 여성이 길을 잃었다고 119에 신고해,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20여 분 만에 이 여성을 찾았습니다.

제주 서귀포시 산록남로변의 한 공동목장에서 주민들이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보다 하루 앞선 26일에도 제주시 조천읍에서 고사리를 채취하다가 길을 잃은 60대 여성이 119에 구조되는 등, 이날 하루 동안 '고사리 길 잃음' 사고만 3건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나 홀로 고사리 채취'가 아니어도 길을 잃기도 합니다. 고사리 꺾기에 몰두하다가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해 일행도 잃고 길도 잃게 되는 경우입니다. 지난해 4월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서 "함께 고사리를 꺾던 어머니가 없어졌다"며 딸이 신고해, 경찰과 소방당국이 40여 분 만에 80대 여성을 구조하기도 했습니다.

■ 제주소방, 봄철 '길 잃음 안전사고 주의보' 발령

한편 고사리 꺾기 외에도 등산 또는 오름 탐방에 나섰다가, 또는 올레·둘레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며 119에 신고하는 사례도 최근 5년간 각각 150건, 119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소방 당국은 고사리를 채취할 땐 반드시 일행과 함께 다니고, 휴대전화와 예비 배터리, 호루라기 등 주변에 위치를 알릴 장비를 챙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길을 잃어 119에 구조 요청을 할 때 전신주 번호(위)와 국가지점 번호를 불러줘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 신속히 찾을 수 있다. 제주도소방안전본부 제공
오랜 시간 길을 헤맬 경우 탈진하거나 다칠 수도 있어, 자신의 위치를 빨리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119에 신고할 때에는 주변 건물의 번호판이나 간판 전화번호, 도로명판에 있는 도로명과 번호, 전신주에 적힌 번호와 국가지점 번호 등을 불러주는 것이 신속한 수색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 제주에선 '풍력 발전기'에도 식별 번호를 표시해, 길을 잃었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날씨 예보를 미리 확인해 무리한 야외활동을 삼가고, 고사리 꺾기 등을 할 때는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일행과 서로 위치를 알려야 합니다. 또 방향을 잃어버리는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외투, 물, 비상식량과 손전등을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사고 예방법은 나 홀로 너무 멀리, 또 깊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고사리 삼매경'에 빠져 땅만 보고 가다가, 주변이 어둑어둑해진 줄도 모르는 상황에 닥쳐 119를 누르는 일이 올해는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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