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 태극기 꽂고 돌아온다 했는데”…고 오용순 일병 유해 유가족 송환

입력 2024.03.29 (15:13) 수정 2024.03.2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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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2003년 강원도 횡성군 압곡리 일대에서 발굴된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고 오용순 일병으로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1951년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가겠다’며 가족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던 오 일병은 오늘(29일) 70여 년이 지나 가족의 품에 다시 안겼습니다. 국유단은 경기도 부천 유가족의 자택에서 ‘호국영웅 귀한 행사’를 열고 ‘호국영웅 귀환 패’와 신원확인 통지서 등을 전달했습니다.

군은 2003년 5월 압곡리 일대에서 지역주민과 참전용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굴작업을 하던 중 4구의 유해를 발견했습니다.

국유단은 2013년 9월 고인의 남동생 오백순씨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했으나, 당시 기술적 요인으로 유전자 분석 후 전사자와 유가족 간의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올해 2월 국유단은 과거에 유전자 분석이 이뤄진 유해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유해가 발견된 지역을 대상으로 유해와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를 다시 분석해 고인과의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2000년 4월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래로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총 228명으로 늘었습니다. 오 일병은 올해 들어 첫 번째로 확인된 사례입니다.

1931년 10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 이후 청년단에 가입했고, 무주지역 마을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며 청년 대상으로 목총사격 훈련을 지도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제8사단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 기록에 따르면 고인은 국군 제8사단 소속으로, 의성지구, 영천지구, 영원-맹산 등 전투를 거친 후 횡성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던 1951년 2월 12일 스무살에 전사했습니다.

고인의 남동생 오백순 씨는 “전쟁 중 북진 과정에서 형님이 ‘한 달 후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통일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70여 년 넘어서야 다시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여동생 오용이 씨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찾아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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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2003년 강원도 횡성군 압곡리 일대에서 발굴된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고 오용순 일병으로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1951년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가겠다’며 가족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던 오 일병은 오늘(29일) 70여 년이 지나 가족의 품에 다시 안겼습니다. 국유단은 경기도 부천 유가족의 자택에서 ‘호국영웅 귀한 행사’를 열고 ‘호국영웅 귀환 패’와 신원확인 통지서 등을 전달했습니다.

군은 2003년 5월 압곡리 일대에서 지역주민과 참전용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굴작업을 하던 중 4구의 유해를 발견했습니다.

국유단은 2013년 9월 고인의 남동생 오백순씨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했으나, 당시 기술적 요인으로 유전자 분석 후 전사자와 유가족 간의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올해 2월 국유단은 과거에 유전자 분석이 이뤄진 유해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유해가 발견된 지역을 대상으로 유해와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를 다시 분석해 고인과의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2000년 4월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래로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총 228명으로 늘었습니다. 오 일병은 올해 들어 첫 번째로 확인된 사례입니다.

1931년 10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 이후 청년단에 가입했고, 무주지역 마을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며 청년 대상으로 목총사격 훈련을 지도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제8사단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 기록에 따르면 고인은 국군 제8사단 소속으로, 의성지구, 영천지구, 영원-맹산 등 전투를 거친 후 횡성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던 1951년 2월 12일 스무살에 전사했습니다.

고인의 남동생 오백순 씨는 “전쟁 중 북진 과정에서 형님이 ‘한 달 후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통일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70여 년 넘어서야 다시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여동생 오용이 씨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찾아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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