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쪽 문제일 가능성 높다”…‘태아 산재’ 첫 인정했지만

입력 2024.07.05 (06:00) 수정 2024.07.05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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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살아왔었죠. 그런데 2019년, ‘태아 산재’가 공론화되면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정 모 씨의 아들은 올해 16살이지만, 3살 수준의 언어를 구사합니다. 또래보다 키가 많이 작고, 왼쪽 눈과 왼쪽 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심장엔 판막 기형이 있어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라야 했습니다.

병명은 ‘차지(CHARGE) 증후군’, 여러 장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기형이 나타나는 선천성 질환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근무 환경 탓일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정 씨는 20대 시절 삼성전자 LCD 공정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별다른 안전 보호구 없이 독한 약품을 다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자주 구토 증세가 일었고, 그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의심을 품게 된 건, 뉴스를 통해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들이 암과 백혈병을 앓는 모습을 접한 뒤였습니다.

‘우리 아이도 혹시 내가 일했던 환경 때문에 아프게 된 걸까?’, 정 씨는 2021년 아버지로선 처음으로 ‘태아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아빠 ‘태아산재’, 첫 업무관련성 인정…승인 안 된 이유는? (KBS 뉴스9, 2024.07.0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03052

■ 아빠 ‘업무 관련성’ 첫 인정…“부계 쪽 생식세포 영향”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정 씨 산재 신청 2년 반 만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놨습니다.

“자녀의 상병 ‘차지증후군’은 근로자의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정 씨 업무와 자녀 질병 간의 ‘관련성’을 인정한 겁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업무와 태아 질병 사이의 인과 관계가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위원회는 정 씨 아들의 경우 난자 수정 이전에 정자 중 하나가 유전자적으로 문제가 생겨 (선천성 질병이) 발생했고 태아 발생 과정 중에 나타난 것은 아니므로 ‘부계 쪽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여성의 경우 난자를 체내에 보관하고 있는 기간이 길어 생식세포에 유전자 영향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 수개월마다 생식세포 분열로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므로 유전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정 씨 아들과 같은 CHD7 유전자 돌연변이는 부계 기원이 대부분이고, 15번 염색체 이상 역시 정 씨가 수태 기간에 근무했던 사업장의 근무 환경이 연관이 있을 거로 추정된다고도 했습니다.


‘남성 반도체 근로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있었습니다.

위원회는 선천성 심장질환의 경우 남성 반도체 근로자에게서 높은 위험도를 나타낸다며, 정 씨가 일했던 시기 등을 고려하면 생식독성 물질인 ‘벤젠’의 일시적 고농도 노출이 가능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작업 환경상 정 씨가 직접 근무했던 LCD TFT(박막 트랜지스터) 공정뿐 아니라 다른 공정들에서 온 다양한 화학물질에 함께 노출됐을 수 있고, 독성 물질 간 복합적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정 씨 사례에 대한 판정은, 향후 다른 남성 근로자들에게도 산재 신청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산재 급여는 ‘불승인’…“현행법상 ‘아빠’는 안 된다”

하지만 정 씨에 대한 산재 급여는 최종적으로 ‘불승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정 씨가 ‘아빠’, 즉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객님의 경우 법령에서 정한 ‘임신 중인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부득이 불승인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현행 산재보험법상 태아 산재는 ‘임신 중인 근로자’, 즉 여성에 대해서만 인정됩니다.


정 씨의 경우 유해인자 노출 사실과 이로 인해 자녀의 질병이 발생한 사실이 모두 인정됐는데도, 산재 급여를 받을 순 없는 겁니다.

정 씨는 이번 판정에 대해 “이제 하나의 산을 넘은 것 같다”면서도 22대 국회에서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법이 없으니까 당연히 이 결과가 최선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내용을 다 읽어봤는데, 태아 산재를 그냥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제주의료원) 간호사분들도 태아 산재를 인정받았지만, 법이 없었잖아요. 그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는 이제 법이 바뀌어야죠. 지금은 어머니에 대한 태아 산재만 승인되게 돼 있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태아 산재도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데 힘써주시길 부탁드려요.
- 정00 / 아빠 ‘태아 산재’ 신청

■ 제주의료원 간호사 사건과 ‘판박이’…법 개정 추진될까

업무 관련성은 인정하지만 현행법에 규정이 없어 산재로 승인할 수 없다는 공단의 이번 결정은, 태아 산재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2009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독성 약물 노출 등으로 인해 유산하거나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는데, 당시에도 공단은 법적으로 태아 산재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2020년 4월 태아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산재보험법이 개정됐는데, 여전히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유해물질에 노출된 경우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겁니다.


정 씨 사건을 대리해온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에게 오랜 법정 싸움을 강요하지 말고, 아버지 태아 산재도 산재보험이 적용되도록 산재보험법을 즉각 개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반올림은 “노동자 본인의 산재, 어머니 태아 산재, 아버지 태아 산재는 모두 업무로 인해 건강을 잃었다는 본질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픽: 이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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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7-05 06:00:51
    • 수정2024-07-05 07: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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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모 씨의 아들은 올해 16살이지만, 3살 수준의 언어를 구사합니다. 또래보다 키가 많이 작고, 왼쪽 눈과 왼쪽 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심장엔 판막 기형이 있어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라야 했습니다.

병명은 ‘차지(CHARGE) 증후군’, 여러 장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기형이 나타나는 선천성 질환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근무 환경 탓일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정 씨는 20대 시절 삼성전자 LCD 공정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별다른 안전 보호구 없이 독한 약품을 다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자주 구토 증세가 일었고, 그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의심을 품게 된 건, 뉴스를 통해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들이 암과 백혈병을 앓는 모습을 접한 뒤였습니다.

‘우리 아이도 혹시 내가 일했던 환경 때문에 아프게 된 걸까?’, 정 씨는 2021년 아버지로선 처음으로 ‘태아 산재’를 신청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아빠 ‘태아산재’, 첫 업무관련성 인정…승인 안 된 이유는? (KBS 뉴스9, 2024.07.0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03052

■ 아빠 ‘업무 관련성’ 첫 인정…“부계 쪽 생식세포 영향”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정 씨 산재 신청 2년 반 만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놨습니다.

“자녀의 상병 ‘차지증후군’은 근로자의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정 씨 업무와 자녀 질병 간의 ‘관련성’을 인정한 겁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업무와 태아 질병 사이의 인과 관계가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위원회는 정 씨 아들의 경우 난자 수정 이전에 정자 중 하나가 유전자적으로 문제가 생겨 (선천성 질병이) 발생했고 태아 발생 과정 중에 나타난 것은 아니므로 ‘부계 쪽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여성의 경우 난자를 체내에 보관하고 있는 기간이 길어 생식세포에 유전자 영향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 수개월마다 생식세포 분열로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므로 유전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정 씨 아들과 같은 CHD7 유전자 돌연변이는 부계 기원이 대부분이고, 15번 염색체 이상 역시 정 씨가 수태 기간에 근무했던 사업장의 근무 환경이 연관이 있을 거로 추정된다고도 했습니다.


‘남성 반도체 근로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있었습니다.

위원회는 선천성 심장질환의 경우 남성 반도체 근로자에게서 높은 위험도를 나타낸다며, 정 씨가 일했던 시기 등을 고려하면 생식독성 물질인 ‘벤젠’의 일시적 고농도 노출이 가능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작업 환경상 정 씨가 직접 근무했던 LCD TFT(박막 트랜지스터) 공정뿐 아니라 다른 공정들에서 온 다양한 화학물질에 함께 노출됐을 수 있고, 독성 물질 간 복합적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정 씨 사례에 대한 판정은, 향후 다른 남성 근로자들에게도 산재 신청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산재 급여는 ‘불승인’…“현행법상 ‘아빠’는 안 된다”

하지만 정 씨에 대한 산재 급여는 최종적으로 ‘불승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정 씨가 ‘아빠’, 즉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객님의 경우 법령에서 정한 ‘임신 중인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부득이 불승인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현행 산재보험법상 태아 산재는 ‘임신 중인 근로자’, 즉 여성에 대해서만 인정됩니다.


정 씨의 경우 유해인자 노출 사실과 이로 인해 자녀의 질병이 발생한 사실이 모두 인정됐는데도, 산재 급여를 받을 순 없는 겁니다.

정 씨는 이번 판정에 대해 “이제 하나의 산을 넘은 것 같다”면서도 22대 국회에서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은 법이 없으니까 당연히 이 결과가 최선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내용을 다 읽어봤는데, 태아 산재를 그냥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제주의료원) 간호사분들도 태아 산재를 인정받았지만, 법이 없었잖아요. 그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는 이제 법이 바뀌어야죠. 지금은 어머니에 대한 태아 산재만 승인되게 돼 있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태아 산재도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데 힘써주시길 부탁드려요.
- 정00 / 아빠 ‘태아 산재’ 신청

■ 제주의료원 간호사 사건과 ‘판박이’…법 개정 추진될까

업무 관련성은 인정하지만 현행법에 규정이 없어 산재로 승인할 수 없다는 공단의 이번 결정은, 태아 산재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2009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독성 약물 노출 등으로 인해 유산하거나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는데, 당시에도 공단은 법적으로 태아 산재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2020년 4월 태아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산재보험법이 개정됐는데, 여전히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유해물질에 노출된 경우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겁니다.


정 씨 사건을 대리해온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에게 오랜 법정 싸움을 강요하지 말고, 아버지 태아 산재도 산재보험이 적용되도록 산재보험법을 즉각 개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반올림은 “노동자 본인의 산재, 어머니 태아 산재, 아버지 태아 산재는 모두 업무로 인해 건강을 잃었다는 본질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픽: 이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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