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아리랑 고개’를 아시나요? [창+]

입력 2024.08.14 (07:01) 수정 2024.08.1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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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해변에서 만난 사슴. 아카지마는 산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아카지마 해변에서 만난 사슴. 아카지마는 산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산홋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아카지마가 나타납니다.

주변 해역이 게라마 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 빛깔을 자랑하는 아카지마(島).아름다운 바다 빛깔을 자랑하는 아카지마(島).

■ 아카지마에 솟은 '아리랑 고개'

현지 주민이 직접 세운 ‘아리랑 고개’ 간판현지 주민이 직접 세운 ‘아리랑 고개’ 간판

아카지마는 태평양 전쟁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일대 지역 가운데서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섬입니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도 많습니다.

일본군이 미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는 건, 그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군속'이 있었다는 말이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카지마 섬 중앙에 위치한 고개에 왜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조선 징용자들을 연구하며 섬 주민들을 만나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와의 인터뷰를 옮겨보겠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에 있던 자살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 기자]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 역사속 '아리랑' 기록으로 남은 2010년 KBS의 인터뷰

드론으로 촬영한 아카지마의 아리랑 고개. 가운데 헬기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이 고개의 정상으로 위안부 등이 저기에 올라 고개 넘어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드론으로 촬영한 아카지마의 아리랑 고개. 가운데 헬기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이 고개의 정상으로 위안부 등이 저기에 올라 고개 넘어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2010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아카지마를 찾은 KBS취재진은 가네시마 기쿠에 씨를 만납니다. 위안소에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당시 모습을 기억해 냈고, '아리랑'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카메라 앞에서 일본어 가사가 붙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렀던 가네시마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카지마에도 아리랑을 부를 수 있었던 주민들이 꽤 있었지만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상태입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에서 영상으로 남은 '기억의 아리랑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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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창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아리랑 #오키나와아리랑 #징용 #군속 #위안부 #일본군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오키나와전투 #다큐멘터리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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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의 ‘아리랑 고개’를 아시나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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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해변에서 만난 사슴. 아카지마는 산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산홋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아카지마가 나타납니다.

주변 해역이 게라마 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 빛깔을 자랑하는 아카지마(島).
■ 아카지마에 솟은 '아리랑 고개'

현지 주민이 직접 세운 ‘아리랑 고개’ 간판
아카지마는 태평양 전쟁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일대 지역 가운데서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섬입니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도 많습니다.

일본군이 미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는 건, 그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군속'이 있었다는 말이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카지마 섬 중앙에 위치한 고개에 왜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조선 징용자들을 연구하며 섬 주민들을 만나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와의 인터뷰를 옮겨보겠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에 있던 자살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 기자]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 역사속 '아리랑' 기록으로 남은 2010년 KBS의 인터뷰

드론으로 촬영한 아카지마의 아리랑 고개. 가운데 헬기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이 고개의 정상으로 위안부 등이 저기에 올라 고개 넘어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2010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아카지마를 찾은 KBS취재진은 가네시마 기쿠에 씨를 만납니다. 위안소에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당시 모습을 기억해 냈고, '아리랑'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카메라 앞에서 일본어 가사가 붙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렀던 가네시마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카지마에도 아리랑을 부를 수 있었던 주민들이 꽤 있었지만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상태입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에서 영상으로 남은 '기억의 아리랑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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