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오키나와에 남은 위안부의 흔적 [창+]

입력 2024.08.16 (07:01) 수정 2024.08.1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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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 중에서 ]

<인터뷰> 홍윤신/ 오키나와대 국제커뮤니케이션 학과교수, ‘오키나와 전쟁과 위안소’ 저자
(오키나와 위안소) 책도 가지고 오셨네요. 이게 그 책의 영문판이에요. 그리고 ‘미야코지마 위안소’ 책은 이거예요. (위안소가) 전부 비행장 주변에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야코지마에는 이렇게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위안소 건립을 할 때 몇 명이 동원됐나. 그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느 정도 위안소를 건립했나. ‘요새건축6중대’라는 위안소를 만드는 (전문) 부대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 위안소가)147군데였었고,
(전쟁 말기)갑자기 많은 수의 위안소를 건립해야 되니까. 민가를 접수해서 위안소를 만든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오키나와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집을 위안소로 빼앗긴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위안소라는 것이 마을로 들어갔다는 얘기죠. (주민 증언들에는) 위안부를 “굉장히 동정한다”거나 “차별 받았다”거나 이 여성들이 “굉장히 불쌍했다”든지. 자기의 경험과 같이 비교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을 속 위안소. 오키나와에 아리랑의 흔적이 폭넓게 남은 실마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1945년 아마미오시마/김원영 ’어떤 한국인의 오키나와 생존수기‘ 중에서]
"한쪽에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옆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6~7명의 섬 아가씨들이 모여 앉아 부르는 노랫소리다.
아리랑이 이런 작은 섬에까지 알려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오키나와 본 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산호빛 바다가 푸르름을 더해주는 섬, 아카지마입니다.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만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그래서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도 많이 가지고 있는 섬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거의 무너져 내린 토굴.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아카지마 주민
(조선 군속들이) 도망을 가잖아요? 이 ‘호’의 목적은 도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군 지시로) 조선인들이 구덩이를 직접 판 뒤, 그리고 이 안에 갇힌 거예요. 물론 최소한의 음식은 주었어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한반도에서 끌려와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
특히 전쟁 말기 물자 부족은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아카지마 주민
호가 몇 군데 있습니다. 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훔쳐서 먹다가 그걸 들키잖아요? 그러면 처형을 당하는 거예요. 여기를 노다산이라고 하는데, (조선인) 7명인가를 처형했는데...

자살특공정을 숨길 동굴을 파고, 이를 바다로 옮기던 것도 모두 전쟁 지원을 위해 동원된 조선인 군속들이었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끝자락 한 켠에 자리잡은 집 두 칸.
옛 위안소 건물입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 아카지마 주민
여기가 요나미네 집안의 집이고, 저기는 긴조 집이에요. 오른쪽 요나미네의 집은 (위안소를 만들려고) 강제로 퇴거시켰어요.
(위안부는 몇 명이나 있었나요?)
7명이에요. 7명 중 한 명은 고향에 아이도 있었다고 해요. 당시 강제로 끌려왔잖아요. 거짓말에 속아서 왔잖아요.

그리고 위안소를 나서면 길은 마을 뒤편의 고개로 이어집니다.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면 팍팍한 다리를 잠시 쉬어가야할 것 같은 곳.
아카지마 사람들은 이곳을 ‘아리랑 고개’라고 부릅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 아카지마 주민
(기자: 선생님, 이쪽이 북쪽이죠?)
북쪽입니다.
(기자: 그리고 위안부들이)
고개가 있잖아요. 여기서 보면 한국은 북쪽이잖아요. 고향을 생각하면서...
(기자: 아리랑을 불렀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잖아요. 서로 위로하면서...

<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오키나와 역사연구가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의 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기자: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인터뷰> 故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긴조 씨 집이지요.
(기자: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기자: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기자: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
일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할아버지는 항구에서 군수물자 하역 작업 등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던 징용자, 즉 조선인 군속들로부터
아리랑을 배웠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한국말은 모르지만 아리랑은 저녁이 돼 식사가 끝나면 불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향수에 젖어 불렀지 않았을까...

일본군을 무서워하던 소년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당시 병사를 보면 이렇게 했어요. 일본군이요. 동창생 아버지가 바다에서 (일본군에) 살해당하고 가족까지 그런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 일도 있었지만 일본군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어요. 말을 했다가는 첩자로 몰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인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고, 친절한 이들이었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조선인) 하토야마 씨가 부반장이었어요. 그가 파준 도장이 이거예요.
(어머니 도장인거죠?)
그래서 절대 버릴 수가 없어요. 집 앞에 있는 칠리향 나무를 잘라서 이렇게 파줬으니까요.

그리고 아리랑만큼이나 깊숙하게 각인된 한마디가 있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한국어라고는 전혀 몰랐지만, ‘아이고 죽겠다’라고 10.10 공습 당시 말했어요.
(조선인) 군속들은 나무 아래에 숨었어요. 그렇게 ‘아이고 죽겠다’라고 말한 사람이...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이고 죽겠다’는 게요. ‘나 이제 죽는다’라는 뜻인가요?


#시사기획창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아리랑 #오키나와아리랑 #징용 #군속 #위안부 #일본군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오키나와전투 #다큐멘터리 #KBS


방영일자: 2024년 8월 13일 22시 1TV/유튜브 <시사기획 창 – 오키나와 아리랑>


'시사기획 창'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039&ref=pMenu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Eb31RoX5RnfYENmnyokN8A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hang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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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 중에서 ]

<인터뷰> 홍윤신/ 오키나와대 국제커뮤니케이션 학과교수, ‘오키나와 전쟁과 위안소’ 저자
(오키나와 위안소) 책도 가지고 오셨네요. 이게 그 책의 영문판이에요. 그리고 ‘미야코지마 위안소’ 책은 이거예요. (위안소가) 전부 비행장 주변에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야코지마에는 이렇게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위안소 건립을 할 때 몇 명이 동원됐나. 그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느 정도 위안소를 건립했나. ‘요새건축6중대’라는 위안소를 만드는 (전문) 부대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 위안소가)147군데였었고,
(전쟁 말기)갑자기 많은 수의 위안소를 건립해야 되니까. 민가를 접수해서 위안소를 만든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오키나와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집을 위안소로 빼앗긴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위안소라는 것이 마을로 들어갔다는 얘기죠. (주민 증언들에는) 위안부를 “굉장히 동정한다”거나 “차별 받았다”거나 이 여성들이 “굉장히 불쌍했다”든지. 자기의 경험과 같이 비교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을 속 위안소. 오키나와에 아리랑의 흔적이 폭넓게 남은 실마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1945년 아마미오시마/김원영 ’어떤 한국인의 오키나와 생존수기‘ 중에서]
"한쪽에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옆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6~7명의 섬 아가씨들이 모여 앉아 부르는 노랫소리다.
아리랑이 이런 작은 섬에까지 알려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오키나와 본 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산호빛 바다가 푸르름을 더해주는 섬, 아카지마입니다.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만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그래서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도 많이 가지고 있는 섬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거의 무너져 내린 토굴.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아카지마 주민
(조선 군속들이) 도망을 가잖아요? 이 ‘호’의 목적은 도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군 지시로) 조선인들이 구덩이를 직접 판 뒤, 그리고 이 안에 갇힌 거예요. 물론 최소한의 음식은 주었어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한반도에서 끌려와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
특히 전쟁 말기 물자 부족은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아카지마 주민
호가 몇 군데 있습니다. 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훔쳐서 먹다가 그걸 들키잖아요? 그러면 처형을 당하는 거예요. 여기를 노다산이라고 하는데, (조선인) 7명인가를 처형했는데...

자살특공정을 숨길 동굴을 파고, 이를 바다로 옮기던 것도 모두 전쟁 지원을 위해 동원된 조선인 군속들이었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끝자락 한 켠에 자리잡은 집 두 칸.
옛 위안소 건물입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 아카지마 주민
여기가 요나미네 집안의 집이고, 저기는 긴조 집이에요. 오른쪽 요나미네의 집은 (위안소를 만들려고) 강제로 퇴거시켰어요.
(위안부는 몇 명이나 있었나요?)
7명이에요. 7명 중 한 명은 고향에 아이도 있었다고 해요. 당시 강제로 끌려왔잖아요. 거짓말에 속아서 왔잖아요.

그리고 위안소를 나서면 길은 마을 뒤편의 고개로 이어집니다.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면 팍팍한 다리를 잠시 쉬어가야할 것 같은 곳.
아카지마 사람들은 이곳을 ‘아리랑 고개’라고 부릅니다.

<인터뷰> 요나미네 마사지/ 아카지마 주민
(기자: 선생님, 이쪽이 북쪽이죠?)
북쪽입니다.
(기자: 그리고 위안부들이)
고개가 있잖아요. 여기서 보면 한국은 북쪽이잖아요. 고향을 생각하면서...
(기자: 아리랑을 불렀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잖아요. 서로 위로하면서...

<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오키나와 역사연구가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의 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기자: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인터뷰> 故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긴조 씨 집이지요.
(기자: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기자: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기자: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
일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할아버지는 항구에서 군수물자 하역 작업 등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던 징용자, 즉 조선인 군속들로부터
아리랑을 배웠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한국말은 모르지만 아리랑은 저녁이 돼 식사가 끝나면 불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향수에 젖어 불렀지 않았을까...

일본군을 무서워하던 소년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당시 병사를 보면 이렇게 했어요. 일본군이요. 동창생 아버지가 바다에서 (일본군에) 살해당하고 가족까지 그런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 일도 있었지만 일본군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어요. 말을 했다가는 첩자로 몰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인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고, 친절한 이들이었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조선인) 하토야마 씨가 부반장이었어요. 그가 파준 도장이 이거예요.
(어머니 도장인거죠?)
그래서 절대 버릴 수가 없어요. 집 앞에 있는 칠리향 나무를 잘라서 이렇게 파줬으니까요.

그리고 아리랑만큼이나 깊숙하게 각인된 한마디가 있습니다.

<인터뷰> 마쓰다 기쿠시게/오키나와 요미탄손 주민
한국어라고는 전혀 몰랐지만, ‘아이고 죽겠다’라고 10.10 공습 당시 말했어요.
(조선인) 군속들은 나무 아래에 숨었어요. 그렇게 ‘아이고 죽겠다’라고 말한 사람이...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이고 죽겠다’는 게요. ‘나 이제 죽는다’라는 뜻인가요?


#시사기획창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아리랑 #오키나와아리랑 #징용 #군속 #위안부 #일본군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오키나와전투 #다큐멘터리 #KBS


방영일자: 2024년 8월 13일 22시 1TV/유튜브 <시사기획 창 – 오키나와 아리랑>


'시사기획 창'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039&ref=pMe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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