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살 독립운동가의 한숨 “하나로 뭉쳐야 할텐데”

입력 2024.08.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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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 빼앗긴 주권을 찾은 지 79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 당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애국지사)들에게 광복절은 더욱 특별한 날일텐데요.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독립운동가는 단 5명.
이 가운데, 제주에 살고 계신 독립운동가 101살 강태선 옹을 직접 만나뵈었습니다.

■ 둘로 쪼개진 광복절 행사에 "이러면 안 되는데"

광복절인 어제(15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자택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강태선 옹은 TV로 경축식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기뻐야 할 날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강 옹은 서로 화합해서 함께 모여서 광복절을 맞아야 할 텐데 텔레비전을 보니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사상 초유로 정부와 독립운동단체가 따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저런 꼴 안보고 행복했을 텐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질끈 눈을 감았습니다.

■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 운동하는 건 당연한 일"

꼬박 한 세기를 살아낸 강 옹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징병으로 끌려가던 조선인 학생들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일본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의 '내선일체'를 주입시키며, 일본 천왕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19살 소년은 일제의 통치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그는 당시 손문의 '삼민주의'를 탐독하며 민족주의와 민권주의, 민생주의가 민족의 구원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얻고, 뜻이 같은 조선인들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동지들과 계몽운동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던 도중, 1943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맙니다.

경찰과 검찰청 검사국에서 3개월씩 모두 6개월간 갖은 고문과 함께 '여운형을 아느냐' '박열을 아느냐'는 등의 심문이 이어졌고, 그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무섭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강 옹은 "이래도 죽음, 저래도 죽음인데 독립운동하다가 죽으면 그것이 내 보람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가 조선 사람인데 조선 독립 운동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재판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 "하나로 뭉쳐야 통일도 할 수 있는데" 지도자들을 향한 당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뒤 고향 제주로 돌아온 지도 어언 79년이 흘렀습니다.

강 옹은 "풀려날 당시 몸무게가 45kg였다"며 "아마 해방이 되지 않아 징역형을 그대로 살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고초가 무색하게, 올해 광복절을 지켜보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강 옹은 "어떻게든 단합이 잘 돼야 통일도 할 수가 있는데, 자기 자신들도 이렇게 하면서 통일을 하려면 어렵지 않느냐"며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을 겨냥해 "이번 사단만 하더라도 국민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민족 정기를 함양시키면서 독립정신을 배양하는 자리를 놓고 다툼을 하면서 분열이 생겼다"며 "이 분쟁이 통일된 나라를 바라던 우리들의 가슴에 못을 박게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강 옹은 "우리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그때 그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며 "그 정신으로 싸우지 말고 서로 타협하면서 완전히 뭉쳐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안에선 부모가 자식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듯,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부모 된 마음으로 전 국민이 어떻게든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살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

■ 전국 첫 생존 애국지사 기림비…"순국선열들에게 미안한 마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강 옹의 자택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생존 애국지사 5명 가운데 처음으로, 강 옹의 자택 마당에 '애국지사 기림비'가 세워진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제막식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을 하는 자생의료재단이 살아생전 자부심을 안겨드리고, 이들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 준비한 겁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독립운동가는 마냥 웃지 못했습니다.

강 옹은 "나보다도 더 고통받고 목숨까지 바친 순국선열들이 있는데, 미비한 이런 공로를 가지고서 무슨 기념물까지 만드냐"며 "고맙긴 하지만 순국선열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에 송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마산의 심종보, 대구의 지원호 등 동지들을 떠올리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 아버지를 존경하며 따랐던 강 옹의 큰 아들, 강대성 씨는 어수선한 광복절에 근심이 깊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로했습니다.

강대성 씨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완전한 광복이 된 것 같지 않고, 아직도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며 "이런 게 앞으로 남아있는 유족들이나 후세들이 해야 할 그런 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연관 기사] 101살 생존 독립운동가의 한숨…“하나가 돼야 할 텐데”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3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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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1살 독립운동가의 한숨 “하나로 뭉쳐야 할텐데”
    • 입력 2024-08-16 16: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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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 빼앗긴 주권을 찾은 지 79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 당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애국지사)들에게 광복절은 더욱 특별한 날일텐데요.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독립운동가는 단 5명.
이 가운데, 제주에 살고 계신 독립운동가 101살 강태선 옹을 직접 만나뵈었습니다.

■ 둘로 쪼개진 광복절 행사에 "이러면 안 되는데"

광복절인 어제(15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자택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강태선 옹은 TV로 경축식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기뻐야 할 날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강 옹은 서로 화합해서 함께 모여서 광복절을 맞아야 할 텐데 텔레비전을 보니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사상 초유로 정부와 독립운동단체가 따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저런 꼴 안보고 행복했을 텐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질끈 눈을 감았습니다.

■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 운동하는 건 당연한 일"

꼬박 한 세기를 살아낸 강 옹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징병으로 끌려가던 조선인 학생들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일본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의 '내선일체'를 주입시키며, 일본 천왕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19살 소년은 일제의 통치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그는 당시 손문의 '삼민주의'를 탐독하며 민족주의와 민권주의, 민생주의가 민족의 구원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얻고, 뜻이 같은 조선인들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동지들과 계몽운동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던 도중, 1943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맙니다.

경찰과 검찰청 검사국에서 3개월씩 모두 6개월간 갖은 고문과 함께 '여운형을 아느냐' '박열을 아느냐'는 등의 심문이 이어졌고, 그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무섭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강 옹은 "이래도 죽음, 저래도 죽음인데 독립운동하다가 죽으면 그것이 내 보람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가 조선 사람인데 조선 독립 운동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재판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 "하나로 뭉쳐야 통일도 할 수 있는데" 지도자들을 향한 당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뒤 고향 제주로 돌아온 지도 어언 79년이 흘렀습니다.

강 옹은 "풀려날 당시 몸무게가 45kg였다"며 "아마 해방이 되지 않아 징역형을 그대로 살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고초가 무색하게, 올해 광복절을 지켜보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강 옹은 "어떻게든 단합이 잘 돼야 통일도 할 수가 있는데, 자기 자신들도 이렇게 하면서 통일을 하려면 어렵지 않느냐"며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을 겨냥해 "이번 사단만 하더라도 국민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민족 정기를 함양시키면서 독립정신을 배양하는 자리를 놓고 다툼을 하면서 분열이 생겼다"며 "이 분쟁이 통일된 나라를 바라던 우리들의 가슴에 못을 박게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강 옹은 "우리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그때 그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며 "그 정신으로 싸우지 말고 서로 타협하면서 완전히 뭉쳐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안에선 부모가 자식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듯,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부모 된 마음으로 전 국민이 어떻게든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살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

■ 전국 첫 생존 애국지사 기림비…"순국선열들에게 미안한 마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강 옹의 자택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생존 애국지사 5명 가운데 처음으로, 강 옹의 자택 마당에 '애국지사 기림비'가 세워진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제막식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을 하는 자생의료재단이 살아생전 자부심을 안겨드리고, 이들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 준비한 겁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독립운동가는 마냥 웃지 못했습니다.

강 옹은 "나보다도 더 고통받고 목숨까지 바친 순국선열들이 있는데, 미비한 이런 공로를 가지고서 무슨 기념물까지 만드냐"며 "고맙긴 하지만 순국선열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에 송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마산의 심종보, 대구의 지원호 등 동지들을 떠올리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평생 아버지를 존경하며 따랐던 강 옹의 큰 아들, 강대성 씨는 어수선한 광복절에 근심이 깊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로했습니다.

강대성 씨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완전한 광복이 된 것 같지 않고, 아직도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며 "이런 게 앞으로 남아있는 유족들이나 후세들이 해야 할 그런 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연관 기사] 101살 생존 독립운동가의 한숨…“하나가 돼야 할 텐데”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3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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