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일본인이 또렷하게 기억하는 위안부 [창+]

입력 2024.08.17 (10:00) 수정 2024.08.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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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 중에서]

<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오키나와 역사연구가
오키나와 현이 (평화의 초석을) 건립했을 때, 여백이 있는 비석을 일부러 더 세웠어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이름 새겨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비석에) 이름 올리는 작업이 진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오키모토 씨가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됐다 유골조차 돌아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0년 쯤 전부터였습니다.
특설수상근무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이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관련 증언 등을 청취하며 곳곳에서 접한 것은 아리랑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 오키나와 역사연구가
(기자: 마쓰다 할아버지의 아리랑에 대해서인데요. 그것도 선생님이 처음으로?)
네 맞아요.
(기자: 갑자기 노래를 했나요?)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밤이 되면 역시나 고향이 그리워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불렀지’라면서 아리랑을 불러줬어요. 깜짝 놀랐죠. 게다가 한국어로 부르는 거예요.\
아카지마에서는 ‘아리랑 고개’에 가셨어요?
(기자: 갔습니다.)
그렇군요. 그곳에도 아리랑 노래를 부를 줄 아는 할머니가, 아카지마에 신조 씨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기자: 신조 씨는 지금...)
이미 돌아가셨어요.

옛 일본군 지휘소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스산함에
미사일이 들어찬 자위대 기지를 바라보며 밀려드는 또 다른 이질감.
방치된 조선인 징용자의 무덤을 찾은 가슴 아픈 시간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시미즈 하야코/ 미야코지마 주민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저도 별로 안내한 적이 없고요. 전부터 신경이 쓰였어요. (전쟁 당시) 조선인인지 한국인의 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주변에는 일본군의 위령비가 많이 서 있는데요. 8월15일이 가까워지면 위령제가 열리기 때문에 그 전에 깨끗하게 잡초를 뽑습니다만, 이곳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늘 이렇게 풀만 무성하죠.

그렇게 미야코지마에서 여정이 끝나가던 날,
위안부 누나들을 만났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위안소 주변에도 소나 말의 꼴을 베러 부근을 왔다갔다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일본군 막사였는데 예쁜 누나들이 보여서 왜 병사 숙소에 여성들이 있나하고 의아했죠. 소학교 5학년 시선으로 보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정말 예쁜 누나들이었어요. 그게 첫인상이었죠.
‘고추가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고추 없니?’라고 말을 걸어온 거예요.
한 친구가 ‘누나가 말하는 고추는 미야코지마 말로 ‘구스’를 말한다‘고...
5,6월 경이었으니까 고추가 새빨갛게 잘 익을 무렵이었죠. 부근 집에서 대여섯 개 정도 고추를 받아서 ‘누나 이거에요?’ 하니까, ‘맞다’면서 ‘고마워’하고는 받았어요.
(일본군이) 군기제라는 행사를 열었는데 위안소에 있던 누나들도 그 행사에서 아리랑을 부르면서 춤을 췄습니다.
손수건 같은 것을 흔들면서 양쪽으로 나뉘어 노래를 부르고 주민들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빨래를 하고,
군 행사에서 춤과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의미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갔고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 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리랑이 유행한 것은 마을 누나들과 함께 빨래하면서 교류했기 때문이에요. 아리랑을 부르면서 어울렸던 마을 누나들은 한 명도 남지 않았어요. 다들 나이가 드셔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도 100살을 바라봅니다.
언제까지 아리랑을 부른 누나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기자: 아리랑 부르실 수 있어요?)
아리랑?
(기자: 부르실 수 있어요?)
좀 아냐고?
(기자: 아세요?)
아니
(기자: 모른다고요? 잊어버리셨구나. 잊어버리셨대요.)
아리랑은요... 처음 한 줄 두 줄...이정도 밖에 지금은 기억이 안나요.
(기자: 옛날에는 다 외우셨던 거죠?)
아리랑을 계속 불러왔던 마을 누나들도 이제는 아무도 없어. 다들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오늘은 힘을 내 그 누나들을 처음 봤던 그곳에 왔습니다.
햇볕 쨍쨍하던 어느 날 빨래터를 다녀오다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이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이렇게 초목이 무성하니까 그늘에서 잠깐 쉬었던 거죠
그때 우리가 이 앞을 지나갔어요.
우리 집이 바로 저 뒤편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위안부들이 몸을 기댔던 바로 그 돌에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를 새겼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으로서 후세에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뭔가 알만한 것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입으로 말해서 전달하는 것은 제가 죽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시사기획창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아리랑 #오키나와아리랑 #징용 #군속 #위안부 #일본군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오키나와전투 #다큐멘터리 #KBS


방영일자: 2024년 8월 13일 22시 1TV/유튜브 <시사기획 창 – 오키나와 아리랑>


'시사기획 창'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039&ref=pMenu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Eb31RoX5RnfYENmnyokN8A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hang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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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오키나와 역사연구가
오키나와 현이 (평화의 초석을) 건립했을 때, 여백이 있는 비석을 일부러 더 세웠어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이름 새겨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비석에) 이름 올리는 작업이 진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오키모토 씨가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됐다 유골조차 돌아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0년 쯤 전부터였습니다.
특설수상근무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이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관련 증언 등을 청취하며 곳곳에서 접한 것은 아리랑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인터뷰> 오키모토 후키코/ 오키나와 역사연구가
(기자: 마쓰다 할아버지의 아리랑에 대해서인데요. 그것도 선생님이 처음으로?)
네 맞아요.
(기자: 갑자기 노래를 했나요?)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밤이 되면 역시나 고향이 그리워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불렀지’라면서 아리랑을 불러줬어요. 깜짝 놀랐죠. 게다가 한국어로 부르는 거예요.\
아카지마에서는 ‘아리랑 고개’에 가셨어요?
(기자: 갔습니다.)
그렇군요. 그곳에도 아리랑 노래를 부를 줄 아는 할머니가, 아카지마에 신조 씨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기자: 신조 씨는 지금...)
이미 돌아가셨어요.

옛 일본군 지휘소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스산함에
미사일이 들어찬 자위대 기지를 바라보며 밀려드는 또 다른 이질감.
방치된 조선인 징용자의 무덤을 찾은 가슴 아픈 시간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시미즈 하야코/ 미야코지마 주민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저도 별로 안내한 적이 없고요. 전부터 신경이 쓰였어요. (전쟁 당시) 조선인인지 한국인의 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주변에는 일본군의 위령비가 많이 서 있는데요. 8월15일이 가까워지면 위령제가 열리기 때문에 그 전에 깨끗하게 잡초를 뽑습니다만, 이곳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늘 이렇게 풀만 무성하죠.

그렇게 미야코지마에서 여정이 끝나가던 날,
위안부 누나들을 만났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위안소 주변에도 소나 말의 꼴을 베러 부근을 왔다갔다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일본군 막사였는데 예쁜 누나들이 보여서 왜 병사 숙소에 여성들이 있나하고 의아했죠. 소학교 5학년 시선으로 보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정말 예쁜 누나들이었어요. 그게 첫인상이었죠.
‘고추가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고추 없니?’라고 말을 걸어온 거예요.
한 친구가 ‘누나가 말하는 고추는 미야코지마 말로 ‘구스’를 말한다‘고...
5,6월 경이었으니까 고추가 새빨갛게 잘 익을 무렵이었죠. 부근 집에서 대여섯 개 정도 고추를 받아서 ‘누나 이거에요?’ 하니까, ‘맞다’면서 ‘고마워’하고는 받았어요.
(일본군이) 군기제라는 행사를 열었는데 위안소에 있던 누나들도 그 행사에서 아리랑을 부르면서 춤을 췄습니다.
손수건 같은 것을 흔들면서 양쪽으로 나뉘어 노래를 부르고 주민들은 그녀들이 일본군의 빨래를 하고,
군 행사에서 춤과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의미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갔고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 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리랑이 유행한 것은 마을 누나들과 함께 빨래하면서 교류했기 때문이에요. 아리랑을 부르면서 어울렸던 마을 누나들은 한 명도 남지 않았어요. 다들 나이가 드셔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도 100살을 바라봅니다.
언제까지 아리랑을 부른 누나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기자: 아리랑 부르실 수 있어요?)
아리랑?
(기자: 부르실 수 있어요?)
좀 아냐고?
(기자: 아세요?)
아니
(기자: 모른다고요? 잊어버리셨구나. 잊어버리셨대요.)
아리랑은요... 처음 한 줄 두 줄...이정도 밖에 지금은 기억이 안나요.
(기자: 옛날에는 다 외우셨던 거죠?)
아리랑을 계속 불러왔던 마을 누나들도 이제는 아무도 없어. 다들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오늘은 힘을 내 그 누나들을 처음 봤던 그곳에 왔습니다.
햇볕 쨍쨍하던 어느 날 빨래터를 다녀오다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이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이렇게 초목이 무성하니까 그늘에서 잠깐 쉬었던 거죠
그때 우리가 이 앞을 지나갔어요.
우리 집이 바로 저 뒤편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위안부들이 몸을 기댔던 바로 그 돌에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를 새겼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미야코지마 주민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으로서 후세에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뭔가 알만한 것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입으로 말해서 전달하는 것은 제가 죽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시사기획창 #오키나와 #미야코지마 #아리랑 #오키나와아리랑 #징용 #군속 #위안부 #일본군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오키나와전투 #다큐멘터리 #KBS


방영일자: 2024년 8월 13일 22시 1TV/유튜브 <시사기획 창 – 오키나와 아리랑>


'시사기획 창'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039&ref=pMenu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Eb31RoX5RnfYENmnyokN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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