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5·18 마지막 수배자 ‘합수(合水) 윤한봉’

입력 2024.08.29 (19:46) 수정 2024.08.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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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내일(30일)은 5·18 기념재단 설립 30주년입니다.

이 재단 설립을 주도한 게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입니다.

영상채록 5·18 오늘은 추모의 마음을 담아 고 윤한봉 선생을 기록합니다.

[리포트]

[윤한봉/생전 인터뷰 : "낮에는 숨어있고 이제 밤에만 나가서 시위 참가하고 그랬는데, (5월)21일에 가족들이 하도 그냥 들볶아서 광주를 빠져나왔어요. 그래가지고 21일 오후에 무장을 하는 것을 보고, 시민군들이죠. '아, 다시 (광주로) 들어가야겠다'해서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는데 공수부대들에 의해서 외곽이 봉쇄돼 가지고 못 들어가서 지방에 있다가 27일에 서울로 올라가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죠."]

[조진태/전 5·18기념재단 상임 이사 : "윤한봉은 호남 지역 특히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재야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을 잡아서 폭동과 폭도 그림을 그렸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전두환 일당들은 윤한봉을 (5·18 주모자로) 지목을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5월 17일 사전 검속에도 윤한봉은 안 잡혔어요."]

[윤한봉/생전 인터뷰 : "(대한민국) 영해를 벗어났다는 그 하나로 그냥 많이 울었죠. 울면서 하여튼 가신 영령들과 동지들께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싸우다가 변함없는 촌놈 윤한봉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좀 많이 했죠."]

[신소하/고 윤한봉 부인 : "망명생활 수칙이라고 그래요. 그걸 정하셨어요. 그러면서 첫 번째, 미국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도 쓰지 않고. 그 다음에 절대로 자기 물건 갖지 않는다. 내 것 갖지 않는다. 그 감옥에 있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그리고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서 허리띠 풀고 자지 않는다."]

[윤한봉/생전 인터뷰 : "학습을 통해서 의식화된 청년들로 한청년이라는 것을 조직했어요. 한국청년연합이라는 것을 미국에 그동안에 없었던 이 조직적인 청년 운동이 이제 (미)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니까 그 당시로 봤을 때 미국 사회에서는 우리 동포 사회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었죠. 이를테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다든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한다든가, 핵무기 철거를 요구한다든가…."]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신소하/고 윤한봉 부인 : "처음에 귀국하셨을 때 막 이렇게 움직이실 때 정치하려고 한다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본인은 절대로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맡고 그냥 재단 만들 때 탄생할 수 있도록 도운 거죠."]

[조진태/전 5·18기념재단 상임 이사 : "시민들이 5·18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나 (오월단체) 내부 시끄러움 때문에 굉장히 또 외면하고 이런 상황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5·18재단)창립 선언문에도 나와 있지만 '5·18은 5월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이다. 그리고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희생이자 봉사다'. 5·18 기념재단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그런 기본 자세, 태도를 규정한 부분이거든요."]

[윤한봉/생전 인터뷰 : "전국 각지에서 그런 기념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5·18이 전국화됐냐 그건 아니거든요. 5·18정신과 자세의 생활화, 이게 되냐 안 되냐의 문제죠. 광주 스스로 5·18정신을 생활화하지 않고는, 5·18 자세를 생활화하지 않고는 다른 데다가 전국화를 이야기해도 호소력이 없다. 5·18 이전부터 가졌던 광주의 진보성을 되살려야 한다."]

기획·취재:류성호/촬영:이성현/구성:박은영 편집:심혜영/그래픽:박누리/영상제공:5·18기념재단·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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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 5·18] 5·18 마지막 수배자 ‘합수(合水) 윤한봉’
    • 입력 2024-08-29 19:46:24
    • 수정2024-08-29 20:16:03
    뉴스7(광주)
[앵커]

내일(30일)은 5·18 기념재단 설립 30주년입니다.

이 재단 설립을 주도한 게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입니다.

영상채록 5·18 오늘은 추모의 마음을 담아 고 윤한봉 선생을 기록합니다.

[리포트]

[윤한봉/생전 인터뷰 : "낮에는 숨어있고 이제 밤에만 나가서 시위 참가하고 그랬는데, (5월)21일에 가족들이 하도 그냥 들볶아서 광주를 빠져나왔어요. 그래가지고 21일 오후에 무장을 하는 것을 보고, 시민군들이죠. '아, 다시 (광주로) 들어가야겠다'해서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는데 공수부대들에 의해서 외곽이 봉쇄돼 가지고 못 들어가서 지방에 있다가 27일에 서울로 올라가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죠."]

[조진태/전 5·18기념재단 상임 이사 : "윤한봉은 호남 지역 특히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재야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을 잡아서 폭동과 폭도 그림을 그렸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전두환 일당들은 윤한봉을 (5·18 주모자로) 지목을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5월 17일 사전 검속에도 윤한봉은 안 잡혔어요."]

[윤한봉/생전 인터뷰 : "(대한민국) 영해를 벗어났다는 그 하나로 그냥 많이 울었죠. 울면서 하여튼 가신 영령들과 동지들께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싸우다가 변함없는 촌놈 윤한봉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좀 많이 했죠."]

[신소하/고 윤한봉 부인 : "망명생활 수칙이라고 그래요. 그걸 정하셨어요. 그러면서 첫 번째, 미국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도 쓰지 않고. 그 다음에 절대로 자기 물건 갖지 않는다. 내 것 갖지 않는다. 그 감옥에 있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그리고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서 허리띠 풀고 자지 않는다."]

[윤한봉/생전 인터뷰 : "학습을 통해서 의식화된 청년들로 한청년이라는 것을 조직했어요. 한국청년연합이라는 것을 미국에 그동안에 없었던 이 조직적인 청년 운동이 이제 (미)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니까 그 당시로 봤을 때 미국 사회에서는 우리 동포 사회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었죠. 이를테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다든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한다든가, 핵무기 철거를 요구한다든가…."]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신소하/고 윤한봉 부인 : "처음에 귀국하셨을 때 막 이렇게 움직이실 때 정치하려고 한다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본인은 절대로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맡고 그냥 재단 만들 때 탄생할 수 있도록 도운 거죠."]

[조진태/전 5·18기념재단 상임 이사 : "시민들이 5·18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나 (오월단체) 내부 시끄러움 때문에 굉장히 또 외면하고 이런 상황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5·18재단)창립 선언문에도 나와 있지만 '5·18은 5월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이다. 그리고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희생이자 봉사다'. 5·18 기념재단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그런 기본 자세, 태도를 규정한 부분이거든요."]

[윤한봉/생전 인터뷰 : "전국 각지에서 그런 기념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5·18이 전국화됐냐 그건 아니거든요. 5·18정신과 자세의 생활화, 이게 되냐 안 되냐의 문제죠. 광주 스스로 5·18정신을 생활화하지 않고는, 5·18 자세를 생활화하지 않고는 다른 데다가 전국화를 이야기해도 호소력이 없다. 5·18 이전부터 가졌던 광주의 진보성을 되살려야 한다."]

기획·취재:류성호/촬영:이성현/구성:박은영 편집:심혜영/그래픽:박누리/영상제공:5·18기념재단·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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