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픽] 미쓰비시는 망했고 현대차는 흥했다…누적생산 1억대 돌파

입력 2024.10.02 (17:57) 수정 2024.10.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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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슈픽입니다.

네모 나게 각진 다부진 모양새.

1974년 출시된 대한민국 1호 국산차, 현대차의 포닙니다.

'마이카 시대' '오너드라이버'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부르짖던 시절 비교적 연령대가 되는 분들에게 포니는 '우리 아빠 첫차'로 기억될 겁니다.

포니를 필두로 자동차 산업에 시동을 걸었던 현대자동차가 누적 생산량 1억 대를 달성했습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에서 추억의 자동차가 보입니다.

현대의 포니입니다.

7, 80년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품인 포니는 사실상 우리나라의 첫 국민차입니다.

고 정주영 선대회장의 동생 정세영 회장이 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지금도 그를 포니 정으로 기억하는 이윱니다.

1976년엔 첫 해외 수출에 성공합니다.

수출국은 에콰도르, 당시 5대가 팔렸습니다.

이후 현대차는 1986년 엑셀을 앞세워 미국 수출 시장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고장이 잦아 이내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출발할 때 뒤에서 밀어야 하고, 내리막길에서만 달리는 1인용 썰매가 뭔지 아냐, 바로 현대다, 90년대 미국의 한 토크쇼에선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왔을 정돕니다.

그로부턴 절치부심의 세월이었습니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소나타, 아반떼, 그랜저를 출시하며 국내외에서 히트를 쳤습니다.

1991년 독자 개발한 알파 엔진이 기술 독립의 중대한 계기가 됐습니다.

1999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던진 승부수 ‘10년·10만 마일 보증수리' 입니다.

이를 계기로 대미 수출이 3년 만에 3배로 늘었습니다.

[고 정주영/1981년 9월/현대그룹 선대 회장 : "신설동 뒷골목 빈터에다 함석으로 자동차 앞 대가리만 들여놓고 엔진 뜯어 수리할 수 있게 대장간 하나 차려놓고서는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쌀가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소 주인으로 방향을 튼 게 한국 자동차 산업의 시발이었습니다.

아무리 큰 고장도 무조건 3일 이내,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사업 철학이 통했습니다.

2000년 ‘왕자의 난’이후 현대가 주력한 품질 최우선 경영.

고급차 브랜드인 에쿠스, 제네시스가 출범한 것도 이때부텁니다.

현대차가 최근 또 하나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글로벌 누적 생산량 ‘1억 대’ 앞서 1억 대를 생산한 업체는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토요타 닛산 혼다, 독일 폭스바겐 등 6곳뿐입니다.

현대차가 기술을 얻어썼던 일본 미쓰비시가 수렁에 빠진 현실은 격세지감을 안기기에 충분합니다.

현대차 2억 대 시대로의 출발을 알린 1억한번째 차량은 전기차 ‘아이오닉 5’입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대전환 시대 승리의 필살기는 품질과 신뢰입니다.

댓글부대를 동원해 현대차를 '흉기차'로 조롱하며 저가 공세중인 중국의 추격도 뿌리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슈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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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0-02 17:57:13
    • 수정2024-10-02 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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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슈픽입니다.

네모 나게 각진 다부진 모양새.

1974년 출시된 대한민국 1호 국산차, 현대차의 포닙니다.

'마이카 시대' '오너드라이버'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부르짖던 시절 비교적 연령대가 되는 분들에게 포니는 '우리 아빠 첫차'로 기억될 겁니다.

포니를 필두로 자동차 산업에 시동을 걸었던 현대자동차가 누적 생산량 1억 대를 달성했습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에서 추억의 자동차가 보입니다.

현대의 포니입니다.

7, 80년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품인 포니는 사실상 우리나라의 첫 국민차입니다.

고 정주영 선대회장의 동생 정세영 회장이 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지금도 그를 포니 정으로 기억하는 이윱니다.

1976년엔 첫 해외 수출에 성공합니다.

수출국은 에콰도르, 당시 5대가 팔렸습니다.

이후 현대차는 1986년 엑셀을 앞세워 미국 수출 시장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고장이 잦아 이내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출발할 때 뒤에서 밀어야 하고, 내리막길에서만 달리는 1인용 썰매가 뭔지 아냐, 바로 현대다, 90년대 미국의 한 토크쇼에선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왔을 정돕니다.

그로부턴 절치부심의 세월이었습니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소나타, 아반떼, 그랜저를 출시하며 국내외에서 히트를 쳤습니다.

1991년 독자 개발한 알파 엔진이 기술 독립의 중대한 계기가 됐습니다.

1999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던진 승부수 ‘10년·10만 마일 보증수리' 입니다.

이를 계기로 대미 수출이 3년 만에 3배로 늘었습니다.

[고 정주영/1981년 9월/현대그룹 선대 회장 : "신설동 뒷골목 빈터에다 함석으로 자동차 앞 대가리만 들여놓고 엔진 뜯어 수리할 수 있게 대장간 하나 차려놓고서는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쌀가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소 주인으로 방향을 튼 게 한국 자동차 산업의 시발이었습니다.

아무리 큰 고장도 무조건 3일 이내,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사업 철학이 통했습니다.

2000년 ‘왕자의 난’이후 현대가 주력한 품질 최우선 경영.

고급차 브랜드인 에쿠스, 제네시스가 출범한 것도 이때부텁니다.

현대차가 최근 또 하나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글로벌 누적 생산량 ‘1억 대’ 앞서 1억 대를 생산한 업체는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토요타 닛산 혼다, 독일 폭스바겐 등 6곳뿐입니다.

현대차가 기술을 얻어썼던 일본 미쓰비시가 수렁에 빠진 현실은 격세지감을 안기기에 충분합니다.

현대차 2억 대 시대로의 출발을 알린 1억한번째 차량은 전기차 ‘아이오닉 5’입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대전환 시대 승리의 필살기는 품질과 신뢰입니다.

댓글부대를 동원해 현대차를 '흉기차'로 조롱하며 저가 공세중인 중국의 추격도 뿌리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슈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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