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소녀는 어떻게 매년 1억 원씩 기부하는 의사가 됐을까요? [주말엔]

입력 2024.10.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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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대구의 한 의사가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독감 백신을 기부한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1억 4천여만 원 상당의 수입산 백신(프랑스 사노피의 '박씨그리프테트라주')을 노인복지시설에 기부했다는 소식이었는데, 관련 기사 내용 중 주목할 만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올해도 어김없이' 기부했다는 겁니다.

한 의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독감 백신을 기부했다는 소식 / 출처: 영남일보한 의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독감 백신을 기부했다는 소식 / 출처: 영남일보

이 의사는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대구·경북 노인복지시설과 관련 단체에 총 20억 원이 넘는 백신을 전달했습니다.

대체 어떤 계기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병원에 내어준 돈을 새롭게 환원하는 거죠"

기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 지난 10일,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한 내과 병원에서 박언휘 원장을 만났습니다.

대구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언휘 원장대구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언휘 원장

그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유를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환자분들이 저희 병원에 내어준 돈을 다시 새롭게 환원하는 거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아프게 하지 않게 위해서..."

어르신들이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감 백신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부했다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 것을 나누겠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요.

그는 오히려 "어르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 울릉도 소녀의 꿈

울릉도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닌 그는 어린 시절 섬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그런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이유는 외딴섬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울릉도는 아주 열악한 곳이었어요. 의사가 없어서 초등학교 때 제 친구들이 많이 죽었어요. 이유도 모르고 죽었죠."

열악했던 울릉도 의료 환경 / 출처: 자료화면 (1970년대)열악했던 울릉도 의료 환경 / 출처: 자료화면 (1970년대)

육지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의료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가벼운 질병인데도 큰 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박 원장은 기억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주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내가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 나를 일어서게 한 말, "의사는 직업이 아니야"

소녀는 의사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대구로 넘어왔고, 피나는 노력 끝에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의사가 되는 길은 절대 녹록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까지 겹치면서 다음 학기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도 직면했습니다.

힘겨웠던 대학 시절을 얘기하던 중 눈물을 보이는 박 원장힘겨웠던 대학 시절을 얘기하던 중 눈물을 보이는 박 원장

"당시 너무 힘들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많은 사람이 즐겁고 흥겨울 때 상대적인 슬픔이 더 커져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응급실에서 3일 후 깨어났는데, 여전히 절망적인 감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생명을 이렇게 하느냐며 꾸짖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의사'라는 직업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직업(Job)'이 아니고, 하늘이 준 '소명(Calling)'이라는 거예요."

그러자 어린 시절 슈바이처같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박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처럼 어려운 사람이 많을 건데, 내가 의사가 되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그때 다시 결심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그는 보건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돈을 빌려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 약속을 지키는 길

의사가 되고서도 그는 자신과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28년간 울릉도, 독도, 소록도 등 도서 산간벽지는 물론 베트남, 필리핀 등 해외 의료 사각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무료 의료봉사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보건소, 복지시설, 장애인시설을 방문해 어르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건강 관리를 제공하는 촉탁 진료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무료로 돌본 환자만 1만 5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박 원장의 울릉도 의료봉사 / 출처: KBS ‘사랑의 가족’ (2008년 방송)오랫동안 이어진 박 원장의 울릉도 의료봉사 / 출처: KBS ‘사랑의 가족’ (2008년 방송)

그의 이런 활동은 16년 전 KBS 교양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소개되기도 했는데,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 무료 진료에 나서는 모습 등이 영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지역적 특성 때문에 진료를 못 받는 분이 너무 많고요.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 KBS '사랑의 가족' (2008년 방송)

또, 지난 2016년엔 1억 원 이상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는 등 지역사회 공헌에 힘쓰고 있습니다.

■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

꿈을 이루기 위해 섬을 떠났던 소녀, 이제는 고향 울릉도에 있는 학교들에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는 의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박 원장에게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될게요."

이에 박 원장은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꿈"이라면서 "내가 멘토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이렇듯 남을 또울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그는 나눔을 위한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많이 가져야 많이 줄 수 있고, 많이 줄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박 원장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박 원장

스스로를 "전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의사"라고 칭하면서, 한 달 중 딱 이틀만 병원 문을 닫는 이유도 '더 많이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주머니에 천 원이 있으면 천 원밖에 못 주지만, 만 원이 있으면 9천 원을 줘도 천 원이 남는 거죠. 인생을 살아 보니까 제가 가진 만큼 더 줄 수 있는 거예요."

어릴 적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꾸준히 나눔의 길을 걸어온 박 원장.

그런데, 이 길에 처음 들어섰을 당시에는 이렇게나 많이 나누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이 물음에 박 원장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이거보다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요만큼밖에 못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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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도 소녀는 어떻게 매년 1억 원씩 기부하는 의사가 됐을까요? [주말엔]
    • 입력 2024-10-20 09:00:06
    주말엔

지난 7일 대구의 한 의사가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독감 백신을 기부한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1억 4천여만 원 상당의 수입산 백신(프랑스 사노피의 '박씨그리프테트라주')을 노인복지시설에 기부했다는 소식이었는데, 관련 기사 내용 중 주목할 만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올해도 어김없이' 기부했다는 겁니다.

한 의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독감 백신을 기부했다는 소식 / 출처: 영남일보
이 의사는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대구·경북 노인복지시설과 관련 단체에 총 20억 원이 넘는 백신을 전달했습니다.

대체 어떤 계기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오랫동안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병원에 내어준 돈을 새롭게 환원하는 거죠"

기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 지난 10일,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한 내과 병원에서 박언휘 원장을 만났습니다.

대구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언휘 원장
그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유를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환자분들이 저희 병원에 내어준 돈을 다시 새롭게 환원하는 거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아프게 하지 않게 위해서..."

어르신들이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감 백신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부했다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 것을 나누겠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요.

그는 오히려 "어르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 울릉도 소녀의 꿈

울릉도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닌 그는 어린 시절 섬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그런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이유는 외딴섬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울릉도는 아주 열악한 곳이었어요. 의사가 없어서 초등학교 때 제 친구들이 많이 죽었어요. 이유도 모르고 죽었죠."

열악했던 울릉도 의료 환경 / 출처: 자료화면 (1970년대)
육지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에 의료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가벼운 질병인데도 큰 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박 원장은 기억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주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내가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 나를 일어서게 한 말, "의사는 직업이 아니야"

소녀는 의사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대구로 넘어왔고, 피나는 노력 끝에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의사가 되는 길은 절대 녹록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까지 겹치면서 다음 학기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도 직면했습니다.

힘겨웠던 대학 시절을 얘기하던 중 눈물을 보이는 박 원장
"당시 너무 힘들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많은 사람이 즐겁고 흥겨울 때 상대적인 슬픔이 더 커져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응급실에서 3일 후 깨어났는데, 여전히 절망적인 감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생명을 이렇게 하느냐며 꾸짖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의사'라는 직업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직업(Job)'이 아니고, 하늘이 준 '소명(Calling)'이라는 거예요."

그러자 어린 시절 슈바이처같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박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처럼 어려운 사람이 많을 건데, 내가 의사가 되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그때 다시 결심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그는 보건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돈을 빌려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 약속을 지키는 길

의사가 되고서도 그는 자신과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28년간 울릉도, 독도, 소록도 등 도서 산간벽지는 물론 베트남, 필리핀 등 해외 의료 사각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무료 의료봉사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보건소, 복지시설, 장애인시설을 방문해 어르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건강 관리를 제공하는 촉탁 진료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무료로 돌본 환자만 1만 5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박 원장의 울릉도 의료봉사 / 출처: KBS ‘사랑의 가족’ (2008년 방송)
그의 이런 활동은 16년 전 KBS 교양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소개되기도 했는데,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 무료 진료에 나서는 모습 등이 영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지역적 특성 때문에 진료를 못 받는 분이 너무 많고요.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 KBS '사랑의 가족' (2008년 방송)

또, 지난 2016년엔 1억 원 이상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는 등 지역사회 공헌에 힘쓰고 있습니다.

■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

꿈을 이루기 위해 섬을 떠났던 소녀, 이제는 고향 울릉도에 있는 학교들에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는 의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박 원장에게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될게요."

이에 박 원장은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꿈"이라면서 "내가 멘토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이렇듯 남을 또울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그는 나눔을 위한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많이 가져야 많이 줄 수 있고, 많이 줄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박 원장
스스로를 "전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의사"라고 칭하면서, 한 달 중 딱 이틀만 병원 문을 닫는 이유도 '더 많이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주머니에 천 원이 있으면 천 원밖에 못 주지만, 만 원이 있으면 9천 원을 줘도 천 원이 남는 거죠. 인생을 살아 보니까 제가 가진 만큼 더 줄 수 있는 거예요."

어릴 적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꾸준히 나눔의 길을 걸어온 박 원장.

그런데, 이 길에 처음 들어섰을 당시에는 이렇게나 많이 나누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이 물음에 박 원장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이거보다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요만큼밖에 못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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