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마세요” 글자만…위험 식품에 ‘점자’가 없다

입력 2024.11.0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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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집에 있던 시각장애인 80대 여성은 문밖에서 이웃과 그 지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수 2병을 꺼내 건넸습니다.

그런데 두 명 중 한 명이 갑자기 '속이 탄다, 속이 답답하다'며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습니다. 2병 중 1병은 음료수가 아니라 '식용 빙초산'이었습니다. 병의 길이와 형태가 워낙 비슷해 시각 장애인 여성이 착각했던 겁니다.

빙초산을 마신 남성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급성 독물중독으로 숨졌습니다. 결국 시각장애인 여성은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지난달 15일, 울산지방법원은 "빙초산을 건넨 사실을 촉감 또는 다른 사람에게 문의하는 방법으로 알 수 있었다"면서도, 피해자 가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을 참작해 금고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시각장애인인 80대 여성을 "치매 노인들을 상대로 봉사활동도 하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와 같은 경로당에서 노래 교실을 다니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웃'이자 '봉사활동도 하던 착한 사람'은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 됐습니다.

■ "섭취하지 말라" 글로만…시각장애인에겐 소용없어


취재진은 시중에서 판매 중인 식용 빙초산과 비타민 음료를 구매해 그 모양을 비교해봤습니다.

빙초산의 경우, 눌러서 따는 안전 뚜껑이 끼워져 있지만, 병 표면에 어떠한 점자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의 촉감, 길이가 비타민 음료와 같았습니다.

식용 빙초산의 뒷면을 확인해 봤습니다. 위험 사항을 안내하며 "직접 섭취하거나 음용하지 마십시오"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1급 시각장애인이었던 여성이 이 문구를 읽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법원에서도 여성의 상태를 "문자의 인지나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직접 먹으면 안 되는 제품'이라는 안내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 갈 길 먼 '식품 점자 표기'…"위험 제품 의무화라도 먼저 해야"


제4조의2(시각ㆍ청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및 음성ㆍ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의 표시)
① 식품 등을 제조ㆍ가공ㆍ소분하거나 수입하는 자는 식품 등에 시각ㆍ청각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는 점자 및 음성ㆍ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의 표시를 할 수 있다.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한국소비자원이 2년 전 조사한 식품 점자 표시 현황을 보면, 321개의 식품 중 121개 제품에만 점자 표시가 있었습니다. 62.3% 제품에는 점자가 없는 겁니다. 식품의 점자 표시는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법률에도 '점자 표시를 할 수 있다'고만 되어있지, 강제할 권한은 없습니다.

장애인 단체는 적어도 마시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식품에 대해서는 하루빨리 '점자 표시 의무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윤현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울산지부 집행위원장은 "시각장애인에게 식품을 구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기업과, 점자 표시를 의무화하는 정책적·제도적 보완을 미처 하지 못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마시면 위험성이 있는 식품에 대해서는 반드시 점자 표기를 하도록 지금이라도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식품 정보 점자 표시를 의무화하는 개정안은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국회를 계류하기만 했습니다.

오늘(4일)은 '한글 점자의 날'이 98주년을 맞은 날입니다.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 권리를 높이고 점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말 점자의 역사는 100년을 향해가고 있지만, 정작 시각장애인의 권리인 점자를 식품에서 찾아보긴 어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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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지마세요” 글자만…위험 식품에 ‘점자’가 없다
    • 입력 2024-11-04 16: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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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집에 있던 시각장애인 80대 여성은 문밖에서 이웃과 그 지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수 2병을 꺼내 건넸습니다.

그런데 두 명 중 한 명이 갑자기 '속이 탄다, 속이 답답하다'며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습니다. 2병 중 1병은 음료수가 아니라 '식용 빙초산'이었습니다. 병의 길이와 형태가 워낙 비슷해 시각 장애인 여성이 착각했던 겁니다.

빙초산을 마신 남성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급성 독물중독으로 숨졌습니다. 결국 시각장애인 여성은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지난달 15일, 울산지방법원은 "빙초산을 건넨 사실을 촉감 또는 다른 사람에게 문의하는 방법으로 알 수 있었다"면서도, 피해자 가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을 참작해 금고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시각장애인인 80대 여성을 "치매 노인들을 상대로 봉사활동도 하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와 같은 경로당에서 노래 교실을 다니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웃'이자 '봉사활동도 하던 착한 사람'은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 됐습니다.

■ "섭취하지 말라" 글로만…시각장애인에겐 소용없어


취재진은 시중에서 판매 중인 식용 빙초산과 비타민 음료를 구매해 그 모양을 비교해봤습니다.

빙초산의 경우, 눌러서 따는 안전 뚜껑이 끼워져 있지만, 병 표면에 어떠한 점자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의 촉감, 길이가 비타민 음료와 같았습니다.

식용 빙초산의 뒷면을 확인해 봤습니다. 위험 사항을 안내하며 "직접 섭취하거나 음용하지 마십시오"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1급 시각장애인이었던 여성이 이 문구를 읽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법원에서도 여성의 상태를 "문자의 인지나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직접 먹으면 안 되는 제품'이라는 안내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 갈 길 먼 '식품 점자 표기'…"위험 제품 의무화라도 먼저 해야"


제4조의2(시각ㆍ청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및 음성ㆍ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의 표시)
① 식품 등을 제조ㆍ가공ㆍ소분하거나 수입하는 자는 식품 등에 시각ㆍ청각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는 점자 및 음성ㆍ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의 표시를 할 수 있다.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한국소비자원이 2년 전 조사한 식품 점자 표시 현황을 보면, 321개의 식품 중 121개 제품에만 점자 표시가 있었습니다. 62.3% 제품에는 점자가 없는 겁니다. 식품의 점자 표시는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법률에도 '점자 표시를 할 수 있다'고만 되어있지, 강제할 권한은 없습니다.

장애인 단체는 적어도 마시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식품에 대해서는 하루빨리 '점자 표시 의무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윤현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울산지부 집행위원장은 "시각장애인에게 식품을 구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기업과, 점자 표시를 의무화하는 정책적·제도적 보완을 미처 하지 못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마시면 위험성이 있는 식품에 대해서는 반드시 점자 표기를 하도록 지금이라도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식품 정보 점자 표시를 의무화하는 개정안은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국회를 계류하기만 했습니다.

오늘(4일)은 '한글 점자의 날'이 98주년을 맞은 날입니다. 시각장애인의 점자 사용 권리를 높이고 점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말 점자의 역사는 100년을 향해가고 있지만, 정작 시각장애인의 권리인 점자를 식품에서 찾아보긴 어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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