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암, 딸은 장애”…‘삼성 반도체 3라인’의 끝나지 않은 고통
입력 2024.11.1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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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반도체 직업병'을 세상에 알린 고 황유미 씨가 숨진 지 17년이 지났습니다. 황 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3라인에서 일하다 23살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번엔 황 씨와 같은 곳에서 일했던 또 다른 노동자 2명과 이들의 자녀 3명이 산업재해 신청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오늘(11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삼성 LED 암, 자녀 질환 집단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고 산재 피해 인정을 촉구했습니다.
■ '반도체 3라인' 어떤 곳이길래…엄마는 대장암·딸은 자폐성 장애
반도체 3라인은 1988년 만들어진 초창기 라인으로, 당시 노동자들은 반도체 웨이퍼를 강산·강염기성 화학물질에 직접 담갔다 빼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었죠.
3라인은 2009년 LED 라인으로 바뀐 뒤에도 기존 구식 설비를 그대로 운용해, 다른 라인들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게 노동자들의 설명입니다.
1997년부터 2019년까지 18년 11개월 동안 삼성 반도체에서 일했던 유 모 씨는 대장암 4기 투병 중이다. 유 씨의 딸은 자폐성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1997년부터 이곳에서 일했던 47살 유 모 씨는 '왁스 본딩' 공정이 특히 위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 보호장구는 앞치마와 빨간 고무장갑뿐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2008년 한 차례 유산을 겪고, 2010년 첫딸이 태어났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눈 맞춤도, 말도 느렸습니다.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지 '엄마'라는 말을 듣는 게 소원이었다고 유 씨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직업병이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2019년 명예퇴직 후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처럼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진 동료들이 여럿이란 걸 알고, 처음으로 회사를 의심해 보게 됐습니다.
유 씨는 현재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딸은 2016년 자폐성 장애 2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장암 등 소화기암과 자폐성 장애는 모두 삼성전자 지원보상위원회 신청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유 씨는 용기를 내어 산재를 신청해 보기로 했습니다.
■ 노동자 2명·자녀 3명 산재 신청…"우연이 아닐 것"
이곳에서 유 씨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함께 산재를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한 명은 쌍둥이 자녀 2명이 지적장애와 경계성 지능 장애 판정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지난 7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두 20년 넘게 삼성 반도체·LED 공정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쌍둥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사원들 모두가 너무나 열악한 LED 환경에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며 "손으로 뜨거운 핫 플레이트 위의 웨이퍼를 분리하거나, 맨손으로 계면활성제를 이용해 웨이퍼를 세정하거나, 형광체를 아무런 보호구 없이 수작업으로 배합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퇴직 후 LED 동료들의 근황을 확인하다 보니 이상하게 아픈 자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단지 내 아이뿐 아니라, 반도체와 LED 라인에 근무했었던 많은 사람들이 본인과 2세의 건강을 잃었다는 것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숨진 이 씨의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40살이 될 때까지 20년 넘도록 삼성을 위해 일한 성실한 동생"이라며 "우리 동생이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해야 하는지 꼭 밝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유 씨를 비롯한 삼성 반도체 노동자 2명과 자녀 3명은 오늘(11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 산재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유 씨는 이들 외에도 본인이 암에 걸리거나 지적장애, 자폐, 희귀질환을 가진 자녀를 둔 동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모두 1990년대 입사해 비슷한 공정에서 일했다는 점에서 직업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 씨는 "우연이 아닐 수 있겠구나 의심하게 됐다"며 "저와 같은 자녀들이 있는데 세상에 얘기하지 않은 많은 동료, 선배, 후배들이 있을 테니 용기를 내 산재 확인을 받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반올림 조승규 노무사는 "피해자들의 산재 인정은 당연하고, 이를 넘어서 3라인의 열악한 상황이 숨김없이 드러나기를, 그리고 더 이상 삼성을 비롯한 전자 산업에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 노동자들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고 말했습니다.
■ 현행법상 '태아 산재' 인정 안 돼…노동계, '소급 적용' 주장
하지만 현행법상 이들의 자녀는 산재 인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오랜 사회적 논의 끝에 이른바 '태아산재법'(산재보험법 개정안)이 지난해 1월 시행됐지만, 이들의 자녀는 법 시행일 이전에 태어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느슨한 안전보건 인식,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근무했지만, 정작 현행법으로는 자녀의 산재 피해를 보호받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겁니다.
노동계는 이 같은 태아산재법의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며, 법 개정을 촉구했습니다.
특히 학습장애나 자폐 같은 경우는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나 파악할 수 있는 장애로 산재 신청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지적하며, '소급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박다혜 변호사(법률사무소 고른)는 "(현행법은) 뒤늦게 제도를 알게 되거나 산재 신청을 결심한 가정에 대해선 사실상 산재 신청권을 차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오늘(11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LED 노동자들의 암과 그 자녀들의 질환에 대한 산재 인정을 촉구했다.
반올림은 "정부와 삼성이 피해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LED 라인의 피해자 상황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 조사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도 연대 입장문을 내고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작업 환경과 안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라며 "사측에 적극적으로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래픽: 이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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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암, 딸은 장애”…‘삼성 반도체 3라인’의 끝나지 않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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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반도체 직업병'을 세상에 알린 고 황유미 씨가 숨진 지 17년이 지났습니다. 황 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3라인에서 일하다 23살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번엔 황 씨와 같은 곳에서 일했던 또 다른 노동자 2명과 이들의 자녀 3명이 산업재해 신청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오늘(11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삼성 LED 암, 자녀 질환 집단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고 산재 피해 인정을 촉구했습니다.
■ '반도체 3라인' 어떤 곳이길래…엄마는 대장암·딸은 자폐성 장애
반도체 3라인은 1988년 만들어진 초창기 라인으로, 당시 노동자들은 반도체 웨이퍼를 강산·강염기성 화학물질에 직접 담갔다 빼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었죠.
3라인은 2009년 LED 라인으로 바뀐 뒤에도 기존 구식 설비를 그대로 운용해, 다른 라인들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게 노동자들의 설명입니다.
1997년부터 이곳에서 일했던 47살 유 모 씨는 '왁스 본딩' 공정이 특히 위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 보호장구는 앞치마와 빨간 고무장갑뿐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2008년 한 차례 유산을 겪고, 2010년 첫딸이 태어났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눈 맞춤도, 말도 느렸습니다.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지 '엄마'라는 말을 듣는 게 소원이었다고 유 씨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직업병이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2019년 명예퇴직 후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처럼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진 동료들이 여럿이란 걸 알고, 처음으로 회사를 의심해 보게 됐습니다.
유 씨는 현재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딸은 2016년 자폐성 장애 2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장암 등 소화기암과 자폐성 장애는 모두 삼성전자 지원보상위원회 신청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유 씨는 용기를 내어 산재를 신청해 보기로 했습니다.
■ 노동자 2명·자녀 3명 산재 신청…"우연이 아닐 것"
이곳에서 유 씨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함께 산재를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한 명은 쌍둥이 자녀 2명이 지적장애와 경계성 지능 장애 판정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지난 7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두 20년 넘게 삼성 반도체·LED 공정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쌍둥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사원들 모두가 너무나 열악한 LED 환경에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며 "손으로 뜨거운 핫 플레이트 위의 웨이퍼를 분리하거나, 맨손으로 계면활성제를 이용해 웨이퍼를 세정하거나, 형광체를 아무런 보호구 없이 수작업으로 배합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퇴직 후 LED 동료들의 근황을 확인하다 보니 이상하게 아픈 자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단지 내 아이뿐 아니라, 반도체와 LED 라인에 근무했었던 많은 사람들이 본인과 2세의 건강을 잃었다는 것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숨진 이 씨의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40살이 될 때까지 20년 넘도록 삼성을 위해 일한 성실한 동생"이라며 "우리 동생이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해야 하는지 꼭 밝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유 씨는 이들 외에도 본인이 암에 걸리거나 지적장애, 자폐, 희귀질환을 가진 자녀를 둔 동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모두 1990년대 입사해 비슷한 공정에서 일했다는 점에서 직업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 씨는 "우연이 아닐 수 있겠구나 의심하게 됐다"며 "저와 같은 자녀들이 있는데 세상에 얘기하지 않은 많은 동료, 선배, 후배들이 있을 테니 용기를 내 산재 확인을 받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반올림 조승규 노무사는 "피해자들의 산재 인정은 당연하고, 이를 넘어서 3라인의 열악한 상황이 숨김없이 드러나기를, 그리고 더 이상 삼성을 비롯한 전자 산업에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 노동자들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고 말했습니다.
■ 현행법상 '태아 산재' 인정 안 돼…노동계, '소급 적용' 주장
하지만 현행법상 이들의 자녀는 산재 인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오랜 사회적 논의 끝에 이른바 '태아산재법'(산재보험법 개정안)이 지난해 1월 시행됐지만, 이들의 자녀는 법 시행일 이전에 태어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느슨한 안전보건 인식,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근무했지만, 정작 현행법으로는 자녀의 산재 피해를 보호받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겁니다.
노동계는 이 같은 태아산재법의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며, 법 개정을 촉구했습니다.
특히 학습장애나 자폐 같은 경우는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나 파악할 수 있는 장애로 산재 신청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지적하며, '소급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박다혜 변호사(법률사무소 고른)는 "(현행법은) 뒤늦게 제도를 알게 되거나 산재 신청을 결심한 가정에 대해선 사실상 산재 신청권을 차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반올림은 "정부와 삼성이 피해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LED 라인의 피해자 상황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 조사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도 연대 입장문을 내고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작업 환경과 안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라며 "사측에 적극적으로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래픽: 이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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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경 기자 6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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