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5·18 마지막 수배자 합수(合水) 윤한봉

입력 2024.11.26 (10:49) 수정 2024.11.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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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상채록 5·18>은 5·18기념재단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고 윤한봉 소장의 삶과 활동을 기록한다. 그는 1980년 수배돼 1993년 수배가 풀린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로 재단 창립의 밑돌을 놓았다. 이를 위해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본명 신경희) 씨와 민족미래연구소 생활을 같이한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를 인터뷰했다. 스스로 합수(合水 똥물)라 불리길 원했던 윤한봉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들이다.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 씨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 씨

■결심하면 지키는 사람…"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윤한봉(1948~2007)
- 1948년 전남 강진 출생
- 전남대 축산학과 중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활동으로 투옥(1974)
- 현대문화연구소장
- 미국으로 밀항 망명(1981년)
- 재미한국청년연합 소사
- 민족미래연구소장
- 2007년 6월 27일 타계(향년 59세)

5·18기념재단에서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 씨를 만났다. 신 씨는 윤한봉 소장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부부가 되기 전부터 부르던 호칭을 버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윤 소장이 미국 망명 시절 맺어졌다. 윤 소장이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만들었고 신 씨는 그곳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미국 동포사회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만난 사이다.

애틋한 연애사가 있을까? 민주화 운동가의 프러포즈란 어땠을까? 어떻게 결혼했냐고 물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윤한봉 소장의 수배가 해제되고 1993년 11월 윤 소장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뒤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더란다. 민족학교 총무를 맡고 있을 때다.

"'잘 들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 말씀하시려나보다 싶어서 메모지를 놓고 펜을 딱 들고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랬더니 본인이 결혼을 하신대요. 그러면서 나더러 나오래요. 그래서 내가 순간적으로는 '본인이 결혼하는데 왜 나더러 나오라 하지?' 난 그때만 해도 몰랐으니까. 뭐 들러리를 서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신부 이름으로 내 본명을 딱 대시더라고요. 내가 깜짝 놀라고 그때부터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 좀 차리고 있다가 생각 좀 해보겠다고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하자고 그랬죠."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 미국 필라델피아로 가족 이민을 갔던 신 씨는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통보'같은 세상 무뚝뚝한 프러포즈에 그는 왜 응했을까?

신 씨는 윤 소장을 존경했다. 조직의 지도자이면서도 한없이 낮은 곳에 임했던 태도를 오랫동안 옆에서 봐온 이의 마음이다.

그가 말하는 일화 하나. "거실 같은 데 코너에 먼지가 쌓이잖아요, 머리카락 같은. 미국에서는 카펫을 쓰니까 이렇게 쌓여요. 그러면 그런 걸 걸레 갖고 다니면서 닦으셔요. 남들은 안 해 아무도. 근데 그런 걸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움직이시는 걸 내가 봤어요."

결심하면 지키는 사람. 윤한봉은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자기 대신 죽었다고 생각해 미국 망명 생활에서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을 했다.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던 생활 수칙을 고수했다.

"광주 운동(5·18)이라든가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자기로 인해서 고문당하고 피해가 있을 것 같으니까 망명을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해서 망명 생활 수칙을 정하셨어요. 첫 번째, 미국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도 쓰지 않는다. 운전하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샤워가 없고 목욕이었으니까, 샤워하지 않고 목욕을 한 달에 두 번 한다. 그 다음에 절대로 자기 물건 갖지 않는다. 감옥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그리고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서 허리띠 풀고 자지 않는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소유물이 작은 가방이었다. 신문 스크랩, 메모, 서류 등이 든 일종의 서류 가방. 본인은 그걸 '똥가방'이라 불렀고 신소하 씨는 그걸 '학습 가방'이라고 불렀다.

무소유의 삶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다. 윤한봉 평전(윤재성,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창비)에서는 미국 동포 김동건 부부, 김상돈 부부, 최진환, 홍기완 씨 등을 꼽았다.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

■"앞장서 일하지만 명예는 본인이 결코 갖지 않았다"

윤한봉 소장은 귀국 후 5·18재단 설립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항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 망명의 부채 의식이 스스로를 몰아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 소장이 귀국 뒤 1994년에 만든 '민족미래연구소'에서 사무국장을 한 조진태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에게 윤 소장의 얘기를 청해 들었다.
"우선 기금 마련도 신통치 않았고 또 추진하려고 하는 주체 사이에 내부 갈등도 있었고 주도를 누가 하느냐 그런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던 차에 윤한봉 선생이 귀국하게 되면서 본인이 적극적으로 재단 설립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고요. 보다 명확한 것은 기념 사업을 국가가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국가 폭력에 의해서 광주 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됐는데 그 기념 사업을 국가가 한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민간 주도로 기념사업을 전개해야 된다, 이게 윤한봉이란 사람의 명확한 입장이자 방향이었던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주변의 오월 관련 단체도 설득을 하고 70년대부터 같이 활동을 해왔던 선배 어른들, 동료들을 설득하면서 '서로 통합해서 재단 설립하자' 이런 역할을 하셨던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는 스스로를 '사실상 윤한봉의 비서실장'이라 칭했다. 십수 년의 공백,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조진태 전 이사는 '희생정신'이라고 했다.

"앞장서 어떤 일이든지 하지만 그러나 모든 명예는 본인이 절대 가지지 않아 왔던 그런 부분이 아마 같이 활동을 했던 동료, 그리고 선배, 원로 선생님들에게 많은 신뢰가 결정적으로 작동을 했다고 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윤한봉 선생을 보면 굉장한 리얼리스트거든요.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닥칠 요소들, 위험 요소들에 대해서 굉장히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그걸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아주 명쾌하게 합리적인 방안을 찾거든요."

인터뷰 중인 윤한봉 소장 생전 모습(KBS 1TV, 1999년 5월 16일 정수복의 세상읽기 2회)인터뷰 중인 윤한봉 소장 생전 모습(KBS 1TV, 1999년 5월 16일 정수복의 세상읽기 2회)

■ 합수(合水)라 불리길 원했던 사람…'대동 세상'의 거름이 되다

본인이 주도해 만든 미국의 한청련, 민족학교에서 '소사'(小使: 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를 자처했던 이력에서 윤 소장의 태도는 일관된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스스로 지은 호가 합수(合水)다. 조진태 이사는 합수를 두 가지 의미로 얘기했다.
"전라도 말로 똥물이거든요. 똥, 오줌물, 헛간에…어떻게 보면 가장 더러운 물이죠. 그런데 그 합수가 농작물을 키우는 데 가장 귀중한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도 있고 한편으로는 물이 합해져서 큰, 작은 실개천들이 합해져서 큰물을 이룬다는 뜻도…"

하지만 궂은 일, 꼭 필요하지만 누군가 나서지 않는 일에서는 기꺼이 직책을 맡았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상임대표, 김남주 시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김남주 기념사업회장,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세상에서 너무도 할 일이 많았지만 윤 소장은 폐기종이 악화돼 폐이식 수술을 받았고 이후 거부 반응으로 병세가 나빠져 숨졌다. 2007년 6월 29일, 만 59세였다.

바뀌는 세태 속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던 사람, 그가 남아있다면 어떤 일을 계속했을까? KBS 영상자료실을 들춰 생전 인터뷰 자료를 찾아 육성을 들었다.

"5·18 정신을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항쟁 정신 또 하나는 대동정신. (…) 그런데 80년대 전두환·노태우의 그 억압과 맞싸우는 과정에서 항쟁 정신만이 전면에서 생활화돼버렸어요. 두려움 없이 전국에서 싸웠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대동정신 부분이 등한시했어요. 그래서 나는 1992년 이후에 변화된 상황에서는 대동정신을 되살려내야 한다."
(KBS 1TV, 1999년 5월 16일 방송, 정수복의 세상읽기 2회)

윤한봉 없는 세상이 벌써 17년이 지났다. 2024년 오늘이라면 윤한봉 소장은 어떤 얘기를 할까? 그가 직접 썼다는 5·18 기념재단의 창립 선언문으로 그에 대한 직접 인터뷰를 대신한다.

그동안 항쟁정신의 기념과 계승에 비해 게을렀던 대동정신의 기념과 계승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5·18기념재단」이 어려운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창립되었습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닌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각계의 시민들과 5월민중항쟁 관련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함께 힘을 모아 항쟁진상, 조사사업, 기념사업, 장학사업, 학술·연구·문화사업, 홍보·출판사업, 자선·복지사업, 5월정신 실천자들에 대한 시상사업을 해나갈「5·18기념재단」을 마침내 창립하였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임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임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임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 1994년 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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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5·18] 5·18 마지막 수배자 합수(合水) 윤한봉
    • 입력 2024-11-26 10:49:55
    • 수정2024-11-26 10: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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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영상채록 5·18&gt;은 5·18기념재단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고 윤한봉 소장의 삶과 활동을 기록한다. 그는 1980년 수배돼 1993년 수배가 풀린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로 재단 창립의 밑돌을 놓았다. 이를 위해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본명 신경희) 씨와 민족미래연구소 생활을 같이한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를 인터뷰했다. 스스로 합수(合水 똥물)라 불리길 원했던 윤한봉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들이다.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 씨
■결심하면 지키는 사람…"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윤한봉(1948~2007)
- 1948년 전남 강진 출생
- 전남대 축산학과 중퇴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활동으로 투옥(1974)
- 현대문화연구소장
- 미국으로 밀항 망명(1981년)
- 재미한국청년연합 소사
- 민족미래연구소장
- 2007년 6월 27일 타계(향년 59세)

5·18기념재단에서 고 윤한봉 소장의 부인 신소하 씨를 만났다. 신 씨는 윤한봉 소장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부부가 되기 전부터 부르던 호칭을 버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윤 소장이 미국 망명 시절 맺어졌다. 윤 소장이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만들었고 신 씨는 그곳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미국 동포사회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만난 사이다.

애틋한 연애사가 있을까? 민주화 운동가의 프러포즈란 어땠을까? 어떻게 결혼했냐고 물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윤한봉 소장의 수배가 해제되고 1993년 11월 윤 소장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뒤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더란다. 민족학교 총무를 맡고 있을 때다.

"'잘 들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 말씀하시려나보다 싶어서 메모지를 놓고 펜을 딱 들고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랬더니 본인이 결혼을 하신대요. 그러면서 나더러 나오래요. 그래서 내가 순간적으로는 '본인이 결혼하는데 왜 나더러 나오라 하지?' 난 그때만 해도 몰랐으니까. 뭐 들러리를 서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신부 이름으로 내 본명을 딱 대시더라고요. 내가 깜짝 놀라고 그때부터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 좀 차리고 있다가 생각 좀 해보겠다고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하자고 그랬죠."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 미국 필라델피아로 가족 이민을 갔던 신 씨는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통보'같은 세상 무뚝뚝한 프러포즈에 그는 왜 응했을까?

신 씨는 윤 소장을 존경했다. 조직의 지도자이면서도 한없이 낮은 곳에 임했던 태도를 오랫동안 옆에서 봐온 이의 마음이다.

그가 말하는 일화 하나. "거실 같은 데 코너에 먼지가 쌓이잖아요, 머리카락 같은. 미국에서는 카펫을 쓰니까 이렇게 쌓여요. 그러면 그런 걸 걸레 갖고 다니면서 닦으셔요. 남들은 안 해 아무도. 근데 그런 걸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움직이시는 걸 내가 봤어요."

결심하면 지키는 사람. 윤한봉은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자기 대신 죽었다고 생각해 미국 망명 생활에서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을 했다.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던 생활 수칙을 고수했다.

"광주 운동(5·18)이라든가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자기로 인해서 고문당하고 피해가 있을 것 같으니까 망명을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해서 망명 생활 수칙을 정하셨어요. 첫 번째, 미국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도 쓰지 않는다. 운전하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샤워가 없고 목욕이었으니까, 샤워하지 않고 목욕을 한 달에 두 번 한다. 그 다음에 절대로 자기 물건 갖지 않는다. 감옥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그리고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서 허리띠 풀고 자지 않는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소유물이 작은 가방이었다. 신문 스크랩, 메모, 서류 등이 든 일종의 서류 가방. 본인은 그걸 '똥가방'이라 불렀고 신소하 씨는 그걸 '학습 가방'이라고 불렀다.

무소유의 삶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다. 윤한봉 평전(윤재성,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창비)에서는 미국 동포 김동건 부부, 김상돈 부부, 최진환, 홍기완 씨 등을 꼽았다.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
■"앞장서 일하지만 명예는 본인이 결코 갖지 않았다"

윤한봉 소장은 귀국 후 5·18재단 설립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항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 망명의 부채 의식이 스스로를 몰아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 소장이 귀국 뒤 1994년에 만든 '민족미래연구소'에서 사무국장을 한 조진태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에게 윤 소장의 얘기를 청해 들었다.
"우선 기금 마련도 신통치 않았고 또 추진하려고 하는 주체 사이에 내부 갈등도 있었고 주도를 누가 하느냐 그런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던 차에 윤한봉 선생이 귀국하게 되면서 본인이 적극적으로 재단 설립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고요. 보다 명확한 것은 기념 사업을 국가가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국가 폭력에 의해서 광주 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됐는데 그 기념 사업을 국가가 한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민간 주도로 기념사업을 전개해야 된다, 이게 윤한봉이란 사람의 명확한 입장이자 방향이었던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주변의 오월 관련 단체도 설득을 하고 70년대부터 같이 활동을 해왔던 선배 어른들, 동료들을 설득하면서 '서로 통합해서 재단 설립하자' 이런 역할을 하셨던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조진태 전 5·18재단 상임이사는 스스로를 '사실상 윤한봉의 비서실장'이라 칭했다. 십수 년의 공백,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조진태 전 이사는 '희생정신'이라고 했다.

"앞장서 어떤 일이든지 하지만 그러나 모든 명예는 본인이 절대 가지지 않아 왔던 그런 부분이 아마 같이 활동을 했던 동료, 그리고 선배, 원로 선생님들에게 많은 신뢰가 결정적으로 작동을 했다고 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윤한봉 선생을 보면 굉장한 리얼리스트거든요.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닥칠 요소들, 위험 요소들에 대해서 굉장히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그걸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아주 명쾌하게 합리적인 방안을 찾거든요."

인터뷰 중인 윤한봉 소장 생전 모습(KBS 1TV, 1999년 5월 16일 정수복의 세상읽기 2회)
■ 합수(合水)라 불리길 원했던 사람…'대동 세상'의 거름이 되다

본인이 주도해 만든 미국의 한청련, 민족학교에서 '소사'(小使: 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를 자처했던 이력에서 윤 소장의 태도는 일관된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스스로 지은 호가 합수(合水)다. 조진태 이사는 합수를 두 가지 의미로 얘기했다.
"전라도 말로 똥물이거든요. 똥, 오줌물, 헛간에…어떻게 보면 가장 더러운 물이죠. 그런데 그 합수가 농작물을 키우는 데 가장 귀중한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도 있고 한편으로는 물이 합해져서 큰, 작은 실개천들이 합해져서 큰물을 이룬다는 뜻도…"

하지만 궂은 일, 꼭 필요하지만 누군가 나서지 않는 일에서는 기꺼이 직책을 맡았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상임대표, 김남주 시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김남주 기념사업회장, 들불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세상에서 너무도 할 일이 많았지만 윤 소장은 폐기종이 악화돼 폐이식 수술을 받았고 이후 거부 반응으로 병세가 나빠져 숨졌다. 2007년 6월 29일, 만 59세였다.

바뀌는 세태 속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던 사람, 그가 남아있다면 어떤 일을 계속했을까? KBS 영상자료실을 들춰 생전 인터뷰 자료를 찾아 육성을 들었다.

"5·18 정신을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항쟁 정신 또 하나는 대동정신. (…) 그런데 80년대 전두환·노태우의 그 억압과 맞싸우는 과정에서 항쟁 정신만이 전면에서 생활화돼버렸어요. 두려움 없이 전국에서 싸웠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대동정신 부분이 등한시했어요. 그래서 나는 1992년 이후에 변화된 상황에서는 대동정신을 되살려내야 한다."
(KBS 1TV, 1999년 5월 16일 방송, 정수복의 세상읽기 2회)

윤한봉 없는 세상이 벌써 17년이 지났다. 2024년 오늘이라면 윤한봉 소장은 어떤 얘기를 할까? 그가 직접 썼다는 5·18 기념재단의 창립 선언문으로 그에 대한 직접 인터뷰를 대신한다.

그동안 항쟁정신의 기념과 계승에 비해 게을렀던 대동정신의 기념과 계승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5·18기념재단」이 어려운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창립되었습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닌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각계의 시민들과 5월민중항쟁 관련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함께 힘을 모아 항쟁진상, 조사사업, 기념사업, 장학사업, 학술·연구·문화사업, 홍보·출판사업, 자선·복지사업, 5월정신 실천자들에 대한 시상사업을 해나갈「5·18기념재단」을 마침내 창립하였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임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임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임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 1994년 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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