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를 바라보는 유럽의 동상이몽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5.02.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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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 미국인들이 프랑스를 대하는 선망과 선입견이 담겨있다.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 미국인들이 프랑스를 대하는 선망과 선입견이 담겨있다.

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세계가 난리입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미 무역에서 큰 흑자를 내는 일부 국가들을 콕 집어 '관세 폭탄'을 물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수십 년 동안 상식으로 여겨지던 세계 자유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당장 트럼프 대통령 요구대로 마약과 불법 이민자 근절에 나서겠다고 약속하면서, 관세 부과를 한 달 유예 받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기로 한 협상이 뭔지, 세계에 보이고 있습니다.

■ '다음 관세 타깃' 유럽…"관세 폭탄 현실화하면 세계 GDP 7% 손실"

유럽도 복잡한 상황이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미국이 유럽연합(EU)과의 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다며, 미국의 석유와 가스를 대규모 구매하지 않는다면 '끝장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유럽을 두고, "아주 아주 나쁜 국가들이 미국을 학대한다"면서 다음 관세 대상은 유럽이라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실제 미국은 유럽연합의 최대 수출국입니다. 유럽연합 전체 수출의 거의 20%를 차지합니다. 2023년 기준 미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1,600억 달러(약 233조 원) 흑자를, 서비스 교역에서 1억 1천만 달러(약 1천6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당연히 유럽은 미국발 '관세 폭탄'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유럽연합의 수장은 단호한 대처를 약속했고, 경제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엄포'가 현실화하면 장기적으로 세계 GDP의 6.4%를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를 합친 것과 같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27개 나라로 이루어진 유럽연합의 내부 분위기는 미묘합니다. 경제·안보 상황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 '문화·영토' 걸린 프랑스·덴마크, 미국에 강경 기조

먼저, 프랑스는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만큼 큰 미련이 없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에서도 언급되듯, 미국인들에게 프랑스는 환상의 도시입니다. 패션뿐 아니라 음식과 화장품까지, 아름다움과 문화와 관련해선 선망의 대상입니다.

미국은 프랑스의 화장품과 와인 등에 추가 관세 카드를 만지작대고 있지만, 프랑스는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만약 우리가 무역 측면에서 공격당한다면, 유럽은 진정한 강대국으로서 스스로 일어서 대응해야 한다"며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유럽에 경종을 울린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유럽연합은 더 단합하게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에 마음이 상한 덴마크도 강경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편입 의사를 여러 차례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미국이 EU에 관세를 부과하면 집단적이고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유럽연합 상반기 순회 의장국인 폴란드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도 "우리는 완전히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관세 전쟁이나 무역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미국 의존도 높은 독일·영국,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 줄다리기

다만, 독일과 영국은 조금 다릅니다.

독일은 경제와 안보 모두에서 미국 의존도가 높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주류인 독일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자동차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켜 독일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또한 독일은 서유럽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앞서 2020년 6월 트럼프는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25%, 약 1만 2,000명을 철수시켜 6,400명은 본국으로 송환하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와 벨기에에 재배치하도록 명령한 바 있습니다. 독일이 방위비 분담금을 충분히 내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번에도 독일은 미국과 대립각을 세울 경우 얻을 이익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 같은 부담 사이에서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가까운 영국은 더 복잡합니다. 미국은 영국의 최대 교역국인 데다, 2023년 기준 영국이 직접 투자받은 금액은 영국의 대미 직접 투자액의 2배입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우리는 영미 무역 관계를 강한 유대로 쌓아나가고 싶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고 매우 건설적인 관계를 구축했다"고 밝혔습니다.

동시에,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한 뒤 경제성장률이 미진합니다. 최근 키어 스타머 총리는 유럽연합 탈퇴 이후 최근 처음으로 벨기에에서 열린 유럽연합 국방 분야 정상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또, 유럽연합에 재가입하지는 않더라도 연합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국이 유럽에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면 보복 관세를 꺼내겠다고도 시사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상황입니다.

■ 미국 비판하던 유럽, 중국 '테무·쉬인' 견제 관세 부과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든 보호 무역 정책에 매력을 느낀 건 유럽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미국이 자유무역 시장을 흔든다며 관세 정책을 비판하던 유럽도, 중국에 대해서는 관세 카드를 꺼내 든 겁니다.

앞서 유럽연합은 현지 시각 5일,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전자상거래를 위한 포괄적 구상'을 채택했습니다. 유럽연합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시장을 저해하는 저가 상품 범람에 대응하는 관세 정책을 만들겠다는 건데, 사실상 중국 온라인 플랫폼을 겨냥한 겁니다.

초저가 상품으로 급성장 중인 중국의 테무와 쉬인 등을 조준해, 150유로 미만의 소액 수입품에 대한 면세 혜택을 없애고 취급 수수료까지 부과할 방침을 검토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구멍'을 틀어막겠다며, 800달러 이하의 개인 수입품에 대한 무관세 혜택을 없앤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만약 면세 혜택이 폐지되면 유럽은 1년에 약 1조 5천억 원 상당의 세수가 확보될 전망입니다.

유럽연합 측은 미국과 사전 조율은 없었으며 특정국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세계 무역 시장은 이미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 기조가 힘을 얻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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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관세’를 바라보는 유럽의 동상이몽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5-02-07 06: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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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 미국인들이 프랑스를 대하는 선망과 선입견이 담겨있다.
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세계가 난리입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미 무역에서 큰 흑자를 내는 일부 국가들을 콕 집어 '관세 폭탄'을 물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수십 년 동안 상식으로 여겨지던 세계 자유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당장 트럼프 대통령 요구대로 마약과 불법 이민자 근절에 나서겠다고 약속하면서, 관세 부과를 한 달 유예 받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기로 한 협상이 뭔지, 세계에 보이고 있습니다.

■ '다음 관세 타깃' 유럽…"관세 폭탄 현실화하면 세계 GDP 7% 손실"

유럽도 복잡한 상황이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미국이 유럽연합(EU)과의 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다며, 미국의 석유와 가스를 대규모 구매하지 않는다면 '끝장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유럽을 두고, "아주 아주 나쁜 국가들이 미국을 학대한다"면서 다음 관세 대상은 유럽이라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실제 미국은 유럽연합의 최대 수출국입니다. 유럽연합 전체 수출의 거의 20%를 차지합니다. 2023년 기준 미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1,600억 달러(약 233조 원) 흑자를, 서비스 교역에서 1억 1천만 달러(약 1천6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당연히 유럽은 미국발 '관세 폭탄'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유럽연합의 수장은 단호한 대처를 약속했고, 경제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엄포'가 현실화하면 장기적으로 세계 GDP의 6.4%를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를 합친 것과 같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27개 나라로 이루어진 유럽연합의 내부 분위기는 미묘합니다. 경제·안보 상황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 '문화·영토' 걸린 프랑스·덴마크, 미국에 강경 기조

먼저, 프랑스는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만큼 큰 미련이 없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에서도 언급되듯, 미국인들에게 프랑스는 환상의 도시입니다. 패션뿐 아니라 음식과 화장품까지, 아름다움과 문화와 관련해선 선망의 대상입니다.

미국은 프랑스의 화장품과 와인 등에 추가 관세 카드를 만지작대고 있지만, 프랑스는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만약 우리가 무역 측면에서 공격당한다면, 유럽은 진정한 강대국으로서 스스로 일어서 대응해야 한다"며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유럽에 경종을 울린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유럽연합은 더 단합하게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에 마음이 상한 덴마크도 강경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편입 의사를 여러 차례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미국이 EU에 관세를 부과하면 집단적이고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유럽연합 상반기 순회 의장국인 폴란드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도 "우리는 완전히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관세 전쟁이나 무역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미국 의존도 높은 독일·영국,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 줄다리기

다만, 독일과 영국은 조금 다릅니다.

독일은 경제와 안보 모두에서 미국 의존도가 높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주류인 독일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자동차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켜 독일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또한 독일은 서유럽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앞서 2020년 6월 트럼프는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25%, 약 1만 2,000명을 철수시켜 6,400명은 본국으로 송환하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와 벨기에에 재배치하도록 명령한 바 있습니다. 독일이 방위비 분담금을 충분히 내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번에도 독일은 미국과 대립각을 세울 경우 얻을 이익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 같은 부담 사이에서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가까운 영국은 더 복잡합니다. 미국은 영국의 최대 교역국인 데다, 2023년 기준 영국이 직접 투자받은 금액은 영국의 대미 직접 투자액의 2배입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우리는 영미 무역 관계를 강한 유대로 쌓아나가고 싶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고 매우 건설적인 관계를 구축했다"고 밝혔습니다.

동시에,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한 뒤 경제성장률이 미진합니다. 최근 키어 스타머 총리는 유럽연합 탈퇴 이후 최근 처음으로 벨기에에서 열린 유럽연합 국방 분야 정상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또, 유럽연합에 재가입하지는 않더라도 연합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국이 유럽에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면 보복 관세를 꺼내겠다고도 시사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상황입니다.

■ 미국 비판하던 유럽, 중국 '테무·쉬인' 견제 관세 부과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든 보호 무역 정책에 매력을 느낀 건 유럽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미국이 자유무역 시장을 흔든다며 관세 정책을 비판하던 유럽도, 중국에 대해서는 관세 카드를 꺼내 든 겁니다.

앞서 유럽연합은 현지 시각 5일,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전자상거래를 위한 포괄적 구상'을 채택했습니다. 유럽연합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시장을 저해하는 저가 상품 범람에 대응하는 관세 정책을 만들겠다는 건데, 사실상 중국 온라인 플랫폼을 겨냥한 겁니다.

초저가 상품으로 급성장 중인 중국의 테무와 쉬인 등을 조준해, 150유로 미만의 소액 수입품에 대한 면세 혜택을 없애고 취급 수수료까지 부과할 방침을 검토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구멍'을 틀어막겠다며, 800달러 이하의 개인 수입품에 대한 무관세 혜택을 없앤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만약 면세 혜택이 폐지되면 유럽은 1년에 약 1조 5천억 원 상당의 세수가 확보될 전망입니다.

유럽연합 측은 미국과 사전 조율은 없었으며 특정국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세계 무역 시장은 이미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 기조가 힘을 얻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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