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운영된 日위안소 추가 발견…“일본군이 직접 관리, 문서로 확인”
입력 2025.03.01 (22:14)
수정 2025.03.0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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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간 한국인 위안부 수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일제 패망 이후 국공내전이 이어지면서 위안부 운영과 관련된 기록이나 물증이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당시 일제(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위안부를 직접 운영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발굴됐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위안부 신체검사 문건'입니다.
베이징 김효신 특파원이 당시 중국에 있었다는 위안소를 찾아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30년대 말, 일본군이 밀고 내려와 중국인 30만 명을 숨지게 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중국 여성들을 무차별 성폭행하면서 성병이 번지자 군부대 주변 여러 군데에 위안소 70여 곳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난징은 중국에서 위안소가 가장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위안소는 중국 각지 일본군 주둔지로 퍼져 나갑니다.
이곳은 1932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위안소 건물입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개설된 위안소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2천 곳이 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중국인 위안부는 8명.
생존자 중 한 명인 96살 펑주잉 할머니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합니다.
일본군의 생화학 무기에 피습되어 시력을 잃고 15살 무렵,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펑주잉/1945~50년 후난성 위안소 생활 : "내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일본군이 고 가려고) 내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어요) 제 언니도 배를 한 번 (흉기에) 찔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강간당하고 죽었습니다. 많이 죽었어요."]
펑 할머니가 잡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시골 마을에까지 한국 위안부들이 끌려왔습니다.
일제 침략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
1930년대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군사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1939년 관동군이 작성한 제6병원 후방 지원 문서입니다.
'위안부 신체검사 기록지'가 눈에 띕니다.
김, 박, 남 씨 등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두 9명입니다.
조선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 '선(鮮)'이 표시돼 있습니다.
기록지의 세부 항목에는 병명과 진료 목록이 있습니다.
위안부가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본군이 조선 출신 위안부를 직접 관리했다는 공식 문서로 평가됩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당시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안소 소재지는 '헝다오허즈'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취재진은 '헝다오허즈' 위안소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헝다오허즈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은 동북지역에만 3곳입니다.
취재진은 일본 육군성이 남긴 군사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진료한 곳은 6병원!
랴오닝성에 위치했습니다.
일본 관동군 부대와 부속 야전병원, 위안소가 '헝다오허즈'에 모여 있었습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랴오닝성 톄링시 헝다오허즈에 해당할 것입니다. 새로운 발견입니다."]
항공편과 차량을 번갈아 타며 이동하길 여러 날, 랴오닝성 헝다오허즈, 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 헝다오허즈쩐이 위치한 톄링시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일본군이 일찌감치 동북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일제때 위안소를 찾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 탐문에 탐문을 거듭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한 주민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강제 노역시켰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헝다오허즈 주민 : "이 사람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람 들어오고… 일본(군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자들을 참말로 (참혹한 꼴 당해)… 일본군들이 말을 타고 와서 말 밧줄을 여성의 발목에 묶기까지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2천년대부터 농촌 진흥 정책에 따라 오래된 건물을 대부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당시 위안부들이 갇혀 지내던 건물 역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남긴 당시 성병 치료 기록을 보면, 중국 내 위안소에서 노역을 강요당한 위안부의 절반, 10만 명 정도가 조선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위안부 제도를 직접 운용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펑주잉/중국인 생존 위안부 :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지만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한-중 양국이 더 늦기 전에 위안부 공동 연구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중국 헝다오허즈에서 김효신입니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간 한국인 위안부 수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일제 패망 이후 국공내전이 이어지면서 위안부 운영과 관련된 기록이나 물증이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당시 일제(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위안부를 직접 운영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발굴됐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위안부 신체검사 문건'입니다.
베이징 김효신 특파원이 당시 중국에 있었다는 위안소를 찾아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30년대 말, 일본군이 밀고 내려와 중국인 30만 명을 숨지게 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중국 여성들을 무차별 성폭행하면서 성병이 번지자 군부대 주변 여러 군데에 위안소 70여 곳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난징은 중국에서 위안소가 가장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위안소는 중국 각지 일본군 주둔지로 퍼져 나갑니다.
이곳은 1932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위안소 건물입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개설된 위안소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2천 곳이 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중국인 위안부는 8명.
생존자 중 한 명인 96살 펑주잉 할머니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합니다.
일본군의 생화학 무기에 피습되어 시력을 잃고 15살 무렵,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펑주잉/1945~50년 후난성 위안소 생활 : "내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일본군이 고 가려고) 내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어요) 제 언니도 배를 한 번 (흉기에) 찔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강간당하고 죽었습니다. 많이 죽었어요."]
펑 할머니가 잡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시골 마을에까지 한국 위안부들이 끌려왔습니다.
일제 침략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
1930년대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군사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1939년 관동군이 작성한 제6병원 후방 지원 문서입니다.
'위안부 신체검사 기록지'가 눈에 띕니다.
김, 박, 남 씨 등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두 9명입니다.
조선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 '선(鮮)'이 표시돼 있습니다.
기록지의 세부 항목에는 병명과 진료 목록이 있습니다.
위안부가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본군이 조선 출신 위안부를 직접 관리했다는 공식 문서로 평가됩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당시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안소 소재지는 '헝다오허즈'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취재진은 '헝다오허즈' 위안소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헝다오허즈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은 동북지역에만 3곳입니다.
취재진은 일본 육군성이 남긴 군사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진료한 곳은 6병원!
랴오닝성에 위치했습니다.
일본 관동군 부대와 부속 야전병원, 위안소가 '헝다오허즈'에 모여 있었습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랴오닝성 톄링시 헝다오허즈에 해당할 것입니다. 새로운 발견입니다."]
항공편과 차량을 번갈아 타며 이동하길 여러 날, 랴오닝성 헝다오허즈, 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 헝다오허즈쩐이 위치한 톄링시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일본군이 일찌감치 동북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일제때 위안소를 찾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 탐문에 탐문을 거듭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한 주민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강제 노역시켰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헝다오허즈 주민 : "이 사람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람 들어오고… 일본(군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자들을 참말로 (참혹한 꼴 당해)… 일본군들이 말을 타고 와서 말 밧줄을 여성의 발목에 묶기까지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2천년대부터 농촌 진흥 정책에 따라 오래된 건물을 대부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당시 위안부들이 갇혀 지내던 건물 역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남긴 당시 성병 치료 기록을 보면, 중국 내 위안소에서 노역을 강요당한 위안부의 절반, 10만 명 정도가 조선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위안부 제도를 직접 운용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펑주잉/중국인 생존 위안부 :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지만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한-중 양국이 더 늦기 전에 위안부 공동 연구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중국 헝다오허즈에서 김효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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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3-01 22:14:11
- 수정2025-03-01 22: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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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간 한국인 위안부 수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일제 패망 이후 국공내전이 이어지면서 위안부 운영과 관련된 기록이나 물증이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당시 일제(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위안부를 직접 운영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발굴됐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위안부 신체검사 문건'입니다.
베이징 김효신 특파원이 당시 중국에 있었다는 위안소를 찾아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30년대 말, 일본군이 밀고 내려와 중국인 30만 명을 숨지게 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중국 여성들을 무차별 성폭행하면서 성병이 번지자 군부대 주변 여러 군데에 위안소 70여 곳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난징은 중국에서 위안소가 가장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위안소는 중국 각지 일본군 주둔지로 퍼져 나갑니다.
이곳은 1932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위안소 건물입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개설된 위안소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2천 곳이 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중국인 위안부는 8명.
생존자 중 한 명인 96살 펑주잉 할머니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합니다.
일본군의 생화학 무기에 피습되어 시력을 잃고 15살 무렵,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펑주잉/1945~50년 후난성 위안소 생활 : "내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일본군이 고 가려고) 내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어요) 제 언니도 배를 한 번 (흉기에) 찔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강간당하고 죽었습니다. 많이 죽었어요."]
펑 할머니가 잡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시골 마을에까지 한국 위안부들이 끌려왔습니다.
일제 침략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
1930년대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군사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1939년 관동군이 작성한 제6병원 후방 지원 문서입니다.
'위안부 신체검사 기록지'가 눈에 띕니다.
김, 박, 남 씨 등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두 9명입니다.
조선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 '선(鮮)'이 표시돼 있습니다.
기록지의 세부 항목에는 병명과 진료 목록이 있습니다.
위안부가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본군이 조선 출신 위안부를 직접 관리했다는 공식 문서로 평가됩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당시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안소 소재지는 '헝다오허즈'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취재진은 '헝다오허즈' 위안소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헝다오허즈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은 동북지역에만 3곳입니다.
취재진은 일본 육군성이 남긴 군사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진료한 곳은 6병원!
랴오닝성에 위치했습니다.
일본 관동군 부대와 부속 야전병원, 위안소가 '헝다오허즈'에 모여 있었습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랴오닝성 톄링시 헝다오허즈에 해당할 것입니다. 새로운 발견입니다."]
항공편과 차량을 번갈아 타며 이동하길 여러 날, 랴오닝성 헝다오허즈, 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 헝다오허즈쩐이 위치한 톄링시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일본군이 일찌감치 동북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일제때 위안소를 찾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 탐문에 탐문을 거듭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한 주민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강제 노역시켰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헝다오허즈 주민 : "이 사람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람 들어오고… 일본(군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자들을 참말로 (참혹한 꼴 당해)… 일본군들이 말을 타고 와서 말 밧줄을 여성의 발목에 묶기까지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2천년대부터 농촌 진흥 정책에 따라 오래된 건물을 대부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당시 위안부들이 갇혀 지내던 건물 역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남긴 당시 성병 치료 기록을 보면, 중국 내 위안소에서 노역을 강요당한 위안부의 절반, 10만 명 정도가 조선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위안부 제도를 직접 운용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펑주잉/중국인 생존 위안부 :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지만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한-중 양국이 더 늦기 전에 위안부 공동 연구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중국 헝다오허즈에서 김효신입니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간 한국인 위안부 수는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일제 패망 이후 국공내전이 이어지면서 위안부 운영과 관련된 기록이나 물증이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당시 일제(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위안부를 직접 운영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발굴됐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위안부 신체검사 문건'입니다.
베이징 김효신 특파원이 당시 중국에 있었다는 위안소를 찾아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30년대 말, 일본군이 밀고 내려와 중국인 30만 명을 숨지게 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중국 여성들을 무차별 성폭행하면서 성병이 번지자 군부대 주변 여러 군데에 위안소 70여 곳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난징은 중국에서 위안소가 가장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위안소는 중국 각지 일본군 주둔지로 퍼져 나갑니다.
이곳은 1932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위안소 건물입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개설된 위안소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2천 곳이 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중국인 위안부는 8명.
생존자 중 한 명인 96살 펑주잉 할머니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합니다.
일본군의 생화학 무기에 피습되어 시력을 잃고 15살 무렵,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펑주잉/1945~50년 후난성 위안소 생활 : "내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일본군이 고 가려고) 내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어요) 제 언니도 배를 한 번 (흉기에) 찔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강간당하고 죽었습니다. 많이 죽었어요."]
펑 할머니가 잡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시골 마을에까지 한국 위안부들이 끌려왔습니다.
일제 침략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
1930년대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군사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1939년 관동군이 작성한 제6병원 후방 지원 문서입니다.
'위안부 신체검사 기록지'가 눈에 띕니다.
김, 박, 남 씨 등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두 9명입니다.
조선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 '선(鮮)'이 표시돼 있습니다.
기록지의 세부 항목에는 병명과 진료 목록이 있습니다.
위안부가 성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본군이 조선 출신 위안부를 직접 관리했다는 공식 문서로 평가됩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당시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안소 소재지는 '헝다오허즈'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취재진은 '헝다오허즈' 위안소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헝다오허즈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은 동북지역에만 3곳입니다.
취재진은 일본 육군성이 남긴 군사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일본 관동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진료한 곳은 6병원!
랴오닝성에 위치했습니다.
일본 관동군 부대와 부속 야전병원, 위안소가 '헝다오허즈'에 모여 있었습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랴오닝성 톄링시 헝다오허즈에 해당할 것입니다. 새로운 발견입니다."]
항공편과 차량을 번갈아 타며 이동하길 여러 날, 랴오닝성 헝다오허즈, 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 헝다오허즈쩐이 위치한 톄링시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일본군이 일찌감치 동북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일제때 위안소를 찾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 탐문에 탐문을 거듭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한 주민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강제 노역시켰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헝다오허즈 주민 : "이 사람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람 들어오고… 일본(군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자들을 참말로 (참혹한 꼴 당해)… 일본군들이 말을 타고 와서 말 밧줄을 여성의 발목에 묶기까지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2천년대부터 농촌 진흥 정책에 따라 오래된 건물을 대부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당시 위안부들이 갇혀 지내던 건물 역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남긴 당시 성병 치료 기록을 보면, 중국 내 위안소에서 노역을 강요당한 위안부의 절반, 10만 명 정도가 조선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위안부 제도를 직접 운용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펑주잉/중국인 생존 위안부 :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지만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한-중 양국이 더 늦기 전에 위안부 공동 연구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중국 헝다오허즈에서 김효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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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 기자 shiny33@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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