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번째 생일, 삼성전자는 부활할 수 있을까

입력 2025.03.22 (09:01) 수정 2025.03.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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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회장을 말려서 포기하게 해야 한다"

1985년 삼성은 위기였다. 반도체 때문이었다. 1년 전 사상 처음 자체 개발한 64k D램을 내놨는데, 일본 선두 업체들이 덤핑에 나섰다. 1달러 30센트 들여 만들었는데, 판매 가격은 30센트까지 떨어졌다. 개당 1달러 적자를 봤다.

그런데 85년에는 반도체 불황 사이클까지 왔다. 마침, 1라인에 이어 2라인까지 준공(85년)했는데 천문학적인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기 시작했다.

86년에도, 87년에도 적자는 쌓이기만 했다. 임원들은 2라인을 너무 빨리 지었다고 후회했다. 반도체 때문에 삼성 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회장은 더 나간다. 3라인까지 착공하라고 종용한다.

"왜 늦냐, 빨리 해라,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

누가 나서서 회장을 말려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폐암 말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회장은 쐐기를 박았다.

"내일 착공해라. 내가 직접 착공식에 참석하겠다."

그렇게 1987년 8월 8일, 삼성전자는 비가 오던 이날 1메가 D램 3라인을 착공한다. 그리고 석 달 뒤, 회장은 향년 77세로 눈을 감는다.

1987년 8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사진=삼성전자)1987년 8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사진=삼성전자)

놀랍게도 1988년 정말 기회가 왔다. 3년에 걸친 반도체 치킨 게임이 끝나고, 미국의 D램 회사들이 망해버린 사이에 삼성은 1메가 D램을 들고 세계 시장에서 화려한 실적을 거둔다. 지난 3년 적자를 다 메우고도 1천억 원 이상의 흑자가 났다.

'반도체가 삼성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던 선대 회장의 확신은 현실이 됐다.

현실이 될 때까지는 비관이 지배했다. 1985년 7월, 뉴욕 타임스는 특집 기사로 삼성을 걱정했다.

한국이 추격 전략으로 성공하긴 했는데,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은 너무 다르다. 변화가 빠르고 사이클도 험난하다. 회사들이 빚을 너무 많이 냈다. 삼성은 2억 5천만 달러, 현대 2억 달러, 럭키골드스타는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메릴린치 애널리스트를 인용해 '자체 생산비는 많이 드는데, 일본 선도기업들은 생산 단가가 훨씬 낮다'며 '한국 기업들이 힘든 시간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삼성이 가장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했다. 2년 만에 큰 도약을 하긴 했다. 그러나 럭키골드스타(지금의 LG)가 논리 칩을 생산해 미국 업체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최신 D램 수출을 거의 포기한 것과 달리, 삼성은 최신 D램 생산에 올인하고 있어서 위험하다.
1985.7.15 New York Times <KOREA'S CHIP MAKERS RACE TO CATCH UP>


이병철 회장 본인조차 확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면 삼성이 곧 무너질 거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외손자 헨리 조는 해외 언론인 제프리 케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업 수익을 몽땅 반도체에 집어넣었는데 경영 개선은 더뎠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던 해 적자가 정점에 달했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밀어붙인 것, 어쩌면 그것이 기업가 정신일지도 모른다. 1978년 인수한 한국반도체는 계속 적자만 쌓였다. 금방 그룹의 골칫덩어리가 됐다. 그룹 직원들은 반도체 사업부로 발령이 나면 사표를 썼다. 그랬는데도 회장은 1983년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철수가 아니라 D램 도전을 선언했다.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중앙일보에 보낸 글(이 글을 '도쿄 선언'이라고 부른다)에 드러난 확신, 그 확신을 믿고 회장은 죽을 때까지 기업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국가와 국민, 나아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 "죄송합니다만, 회장님. 생산량도 중요합니다"


(0)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당시 51살 이건희의 ‘삼성 접수 선언’이다.

선대 회장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나도록, 그는 아직 족적이 없었다. 그는 한 번 영화를 보면 하루종일 보는 편집증적인 영화광, 자동차광... 그리고 여전히 내성적이고 과묵한 것으로만 알려진 후계자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아우라가 필요했다.

게다가 경영 상황은 도전적이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고도 고백했다.

1993년 2월, 이건희 회장은 임원들을 미국 LA의 베스트바이(우리의 하이마트)로 불러냈다. 매장에서 삼성 TV는 구석진 자리에 있었고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소니보다 100달러나 쌌다. 저가 싸구려 취급을 받는 제품이었다. (이 회장 사망 당시 영문 부고 기사에 실린 일화다) 이 회장은 불러낸 임원들에게 “직원, 주주, 국민, 국가를 속이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6월 4일 후쿠다 고문의 디자인 보고서가 나온다.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보고서를 읽었다고 전해진다. 핵심은 ‘일본 제품 모방만 해서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서는 사내 방송 SBC의 동영상이 기다린다. 세탁기 조립 라인, 세탁기 문을 닫을 때마다 틀에 긁힌다. 제품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공정 설비를 조정하는 대신 칼로 튀어나온 플라스틱을 깎아내는 임시방편으로 넘어간다.

“제가 품질관리를 거듭 강조했는데도 여러분은 거의 변한 게 없군요.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 회장은 분노해 서울의 중역 200명을 ‘당장 프랑크푸르트로 날아오라’고 지시했다.

(1) 1993년 6월 7일, 독일 켐핀스키 호텔에서 이 회장은 8시간 동안 분노를 쏟아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짧게는 바로 이날 8시간 치의 어록이다.

“생사의 기로에 있다. 기술 전쟁은 너무도 냉혹하고도 잔인할 텐데 삼성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핵심은 품질이었다. 양이 3분의 1로 줄어도 된다. 질을 담보해라. 불량품 만들지 마라.

“세 가지를 지켜라, 불량은 우리의 적이고, 모든 악의 근원이다. 불량품 세 번 만들면 자진 퇴사해라.”

그리고 저 유명한 발언이 나온다.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

뉴욕타임스는 2020년 이 회장의 부고 기사에서 이 선언이 급진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불량이 일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해라. 그러자 한 중역은 그 자리에서 “죄송합니다만, 회장님. 생산량도 중요합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 회장은 숟가락(티스푼이라는 전언도 있다)을 집어던지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2)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6월 7일의 말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선 임원을 다그치던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2주 동안 이어졌다. 한 번 하면 열시간 넘게 이어지기도 했다.

“두 주가 지난 후부터 우리는 호텔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직접 빨아서 호텔 베란다에 널기 시작했습니다.” 현명관이 말했다. 8500쪽 분량의 녹취록으로 작성되었다. ‘신경영 선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삼성 라이징/ 제프리 케인)

지금도 삼성전자 사내외에 돌아다닌다는 음성과 녹취는 바로 이때 기록이다.

(3) 그 2주가 끝인 것도 아니었다.

2월 LA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본격화된 해외 순방 회의는 7월 말에 끝났다. 베를린, 스위스, 런던, 도쿄를 오가며 2천 명을 해외로 불러 회의했다.

곧이어 7-4제가 나온다.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자. 러시아워 시간 낭비를 줄이고 자기 계발하자.


1995년엔 저 유명한 휴대전화 화형식을 한다. 무선사업부 불량률이 10%가 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휴대전화 15만 대, 누군가는 5000만 달러어치 전자제품이라고 했다. 휴대전화와 팩스 등 재고를 쌓아놓고 해머로 내리친다. 2000명 직원 앞에서 불 질렀다. 직원들은 ‘품질 우선’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게 했다. "100% 양품만 만들겠습니다" 현수막도 둘렀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들처럼 품질이 형편없는 제품을 계속 만든다면, 내가 다시 찾아와 지금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을 ‘이건희의 회사’로, 또 ‘품질 경영이 모토인 회사’로 만들었다.

당시는 이미 삼성의 반도체가 반석 위에 올랐을 때다. 1992년에 이미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만들었다. 1993년에는 점유율 세계 1위가 된다.

이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야 '일류회사'가 된다고 확신했고, 나아가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채찍질했다.

이 편집증적 위기 경영과 품질 경영이 삼성을 IT 역사에 남을 회사로 변화시켰다.

■ "15년쯤 뒤에나 가능할 양자 컴퓨터"


한 발 나아가려는 노력은 회사의 명운을 좌우한다. 기업도 생로병사를 겪게 마련이고,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다. 끝없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된다. 실수했다면 빠르게 만회해야 한다.

이번 주 젠슨 황이 그랬다. 젠슨 황은 올 초 양자 컴퓨터가 당장은 상용화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15년 뒤쯤이라면 초기 단계일 것이고, 30년쯤 뒤면 아마도 후기 단계"일 거라고 했다.

그 말을 사실상 번복했다. 엔비디아가 양자 컴퓨팅 발전을 위한 기술 제공을 목표로 미국 보스턴에 '엔비디아 가속 양자 연구센터(NVAQC)'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발자회의가 된 엔비디아의 자체 컨퍼런스 'GTC 2025'에서였다. 하버드, MIT 등과 협업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양자컴퓨팅은 신약 개발부터 재료 개발까지 중요한 과제를 풀어낼 수 있다. 쿠다(CUDA 엔비디아의 자체 소프트웨어 플랫폼)-퀀텀 하이브리드 컴퓨팅을 발전시키고 유용한 대규모 가속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겠다."

사실 신약 개발은 젠슨 황이 오래전부터 강조한 이야기고, 가속 컴퓨팅(Acceleration computing)은 엔비디아가 GPU에서 늘 해오던 일이니 이 발언 자체에 정보값 있는 새 뉴스는 없다. 그럼에도 주목할 부분은 자세의 변화다. GPU를 과신하는 듯하던 1월의 발언에서, 양자 컴퓨팅이 미래가 될 가능성을 대비하고 준비하겠다는 이번 주 발언으로 변화했다.

IT 기업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은 GPU로 AI 세상의 선두에 있는 엔비디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 비전의 변화를 끊임없이 내외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가장 강력하고 의미 있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2025년 가장 바빴던 삼성의 지난 10일

지난 10일, 삼성전자에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대략 정리해 보면 이와 같다.

1. 엔비디아가 삼성의 천안공장에 점검(Audit)차 다녀갔다. 천안 공장은 HBM 패키징 공장이니까, 퀄테스트(품질검증)가 최종 단계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뉴스다. 5세대 HBM, HBM3E 퀄테스트 통과가 임박했다. 구체적인 제품은 일단 8단, 시점은 3월 말 혹은 2분기 안이다.

2. 삼성 임원 교육에서 이재용 회장의 이른바 '사즉생' 발언이 나왔다. 일부 언론은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이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직접 참석하거나 얼굴이 나온 영상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영상물에 담긴 메시지의 형태라고 했다.)

3. 야당 대표가 이재용 회장과 만났다. 야당 정치인과 삼성 총수의 이례적인 만남이다. 덕담을 나눴다. 야당 대표는 "삼성이 잘 돼야 한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살아야 삼성에 투자한 사람들도 잘산다, 모두를 위한 삼성이 돼 달라"고 했다. 이 회장의 발언에서 의미 있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4.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약 5달 만에 6만 원을 회복했다. 지난 한 주 내내 올랐다. 외국인이 돌아와 강한 매수세를 보였다. 다만 여전히 전고점 대비 30% 안팎 내려앉은 상황이다.

5. 앞서 언급한 엔비디아 GTC에서 젠슨 황이 다시 한번 삼성의 메모리에 사인을 했다. '삼성 GDDR7(그래픽 D램) 최고!'라고 썼다. 삼성 HBM3E 납품에 대한 질문에 '삼성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라고도 답했다. 다만 납품 여부 즉답은 피했다.

이 모든 일이 약 열흘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삼성이 다시 살아난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 그리고 오늘, 삼성 87주년


2025년 3월 22일, 삼성은 창립 87주년을 맞았다. 별도 기념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유별난 것은 아니다. 원래 그랬다.

삼성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로 문을 연 뒤 끝없이 성장의 역사를 써왔다. 무역과 소매업에서 도매, 제조, 건설업과 중화학 공업을 거쳐 첨단 반도체 산업에 도전해 성공했다. 끝없는 도전과 성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와 동일시 해도 좋을 기업사다.

다만 상황은 급박하다. 신성장 동력으로 도전했던 파운드리에선 일단 실패했고, D램에서도 위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 최근 열흘 동안 나온 긍정적인 소식들에서 희망을 보려는 시선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리더십의 역할이다. 위기에 봉착해 사그라지는 성장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은 오롯이 리더의 역할이다. 과거 삼성의 리더들은 그 일을 해냈다. 직접 맨 앞에서 비전을 내놓고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면서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갑툭튀 등장한 것 같은 젠슨 황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상에 있지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실수를 인정하고 겸허히 새로운 비전을 내놓으려 애쓴다.

87번째 생일을 맞은 현재의 삼성전자 리더십은 어떤가. 올해 들어 가장 분주했던 지난 열흘 삼성의 행보에 그런 신호가 보이는가? 삼성이 부활할 것 같다는 구체적이고도 미래 지향적인 신호.

<참고자료>
1. <반도체는 나의 마지막 사업이 될것이다> 등. 삼성전자 뉴스룸. 2010/3/30
2. <임직원이 목숨 걸고 말린 반도체 투자, 호암이 밀어붙인 진짜 이유는?> 동아비즈니스리뷰(유귀훈), 2014년 3월호
3. 삼성 라이징(2020) 제프리 케인
4. 삼성전자 시그널(2025) 서영민
5. 이건희 에세이 :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
6. 호암자전(2014)
7. 아주경제, 매일경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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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번째 생일, 삼성전자는 부활할 수 있을까
    • 입력 2025-03-22 09:01:21
    • 수정2025-03-22 09: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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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회장을 말려서 포기하게 해야 한다"

1985년 삼성은 위기였다. 반도체 때문이었다. 1년 전 사상 처음 자체 개발한 64k D램을 내놨는데, 일본 선두 업체들이 덤핑에 나섰다. 1달러 30센트 들여 만들었는데, 판매 가격은 30센트까지 떨어졌다. 개당 1달러 적자를 봤다.

그런데 85년에는 반도체 불황 사이클까지 왔다. 마침, 1라인에 이어 2라인까지 준공(85년)했는데 천문학적인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기 시작했다.

86년에도, 87년에도 적자는 쌓이기만 했다. 임원들은 2라인을 너무 빨리 지었다고 후회했다. 반도체 때문에 삼성 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회장은 더 나간다. 3라인까지 착공하라고 종용한다.

"왜 늦냐, 빨리 해라,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

누가 나서서 회장을 말려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폐암 말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회장은 쐐기를 박았다.

"내일 착공해라. 내가 직접 착공식에 참석하겠다."

그렇게 1987년 8월 8일, 삼성전자는 비가 오던 이날 1메가 D램 3라인을 착공한다. 그리고 석 달 뒤, 회장은 향년 77세로 눈을 감는다.

1987년 8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사진=삼성전자)
놀랍게도 1988년 정말 기회가 왔다. 3년에 걸친 반도체 치킨 게임이 끝나고, 미국의 D램 회사들이 망해버린 사이에 삼성은 1메가 D램을 들고 세계 시장에서 화려한 실적을 거둔다. 지난 3년 적자를 다 메우고도 1천억 원 이상의 흑자가 났다.

'반도체가 삼성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던 선대 회장의 확신은 현실이 됐다.

현실이 될 때까지는 비관이 지배했다. 1985년 7월, 뉴욕 타임스는 특집 기사로 삼성을 걱정했다.

한국이 추격 전략으로 성공하긴 했는데,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은 너무 다르다. 변화가 빠르고 사이클도 험난하다. 회사들이 빚을 너무 많이 냈다. 삼성은 2억 5천만 달러, 현대 2억 달러, 럭키골드스타는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메릴린치 애널리스트를 인용해 '자체 생산비는 많이 드는데, 일본 선도기업들은 생산 단가가 훨씬 낮다'며 '한국 기업들이 힘든 시간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삼성이 가장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했다. 2년 만에 큰 도약을 하긴 했다. 그러나 럭키골드스타(지금의 LG)가 논리 칩을 생산해 미국 업체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최신 D램 수출을 거의 포기한 것과 달리, 삼성은 최신 D램 생산에 올인하고 있어서 위험하다.
1985.7.15 New York Times <KOREA'S CHIP MAKERS RACE TO CATCH UP>


이병철 회장 본인조차 확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면 삼성이 곧 무너질 거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외손자 헨리 조는 해외 언론인 제프리 케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업 수익을 몽땅 반도체에 집어넣었는데 경영 개선은 더뎠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던 해 적자가 정점에 달했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밀어붙인 것, 어쩌면 그것이 기업가 정신일지도 모른다. 1978년 인수한 한국반도체는 계속 적자만 쌓였다. 금방 그룹의 골칫덩어리가 됐다. 그룹 직원들은 반도체 사업부로 발령이 나면 사표를 썼다. 그랬는데도 회장은 1983년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철수가 아니라 D램 도전을 선언했다.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중앙일보에 보낸 글(이 글을 '도쿄 선언'이라고 부른다)에 드러난 확신, 그 확신을 믿고 회장은 죽을 때까지 기업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국가와 국민, 나아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 "죄송합니다만, 회장님. 생산량도 중요합니다"


(0)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당시 51살 이건희의 ‘삼성 접수 선언’이다.

선대 회장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나도록, 그는 아직 족적이 없었다. 그는 한 번 영화를 보면 하루종일 보는 편집증적인 영화광, 자동차광... 그리고 여전히 내성적이고 과묵한 것으로만 알려진 후계자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아우라가 필요했다.

게다가 경영 상황은 도전적이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고도 고백했다.

1993년 2월, 이건희 회장은 임원들을 미국 LA의 베스트바이(우리의 하이마트)로 불러냈다. 매장에서 삼성 TV는 구석진 자리에 있었고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소니보다 100달러나 쌌다. 저가 싸구려 취급을 받는 제품이었다. (이 회장 사망 당시 영문 부고 기사에 실린 일화다) 이 회장은 불러낸 임원들에게 “직원, 주주, 국민, 국가를 속이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6월 4일 후쿠다 고문의 디자인 보고서가 나온다.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보고서를 읽었다고 전해진다. 핵심은 ‘일본 제품 모방만 해서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서는 사내 방송 SBC의 동영상이 기다린다. 세탁기 조립 라인, 세탁기 문을 닫을 때마다 틀에 긁힌다. 제품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공정 설비를 조정하는 대신 칼로 튀어나온 플라스틱을 깎아내는 임시방편으로 넘어간다.

“제가 품질관리를 거듭 강조했는데도 여러분은 거의 변한 게 없군요.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 회장은 분노해 서울의 중역 200명을 ‘당장 프랑크푸르트로 날아오라’고 지시했다.

(1) 1993년 6월 7일, 독일 켐핀스키 호텔에서 이 회장은 8시간 동안 분노를 쏟아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짧게는 바로 이날 8시간 치의 어록이다.

“생사의 기로에 있다. 기술 전쟁은 너무도 냉혹하고도 잔인할 텐데 삼성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핵심은 품질이었다. 양이 3분의 1로 줄어도 된다. 질을 담보해라. 불량품 만들지 마라.

“세 가지를 지켜라, 불량은 우리의 적이고, 모든 악의 근원이다. 불량품 세 번 만들면 자진 퇴사해라.”

그리고 저 유명한 발언이 나온다.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

뉴욕타임스는 2020년 이 회장의 부고 기사에서 이 선언이 급진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불량이 일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해라. 그러자 한 중역은 그 자리에서 “죄송합니다만, 회장님. 생산량도 중요합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 회장은 숟가락(티스푼이라는 전언도 있다)을 집어던지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2)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6월 7일의 말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선 임원을 다그치던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2주 동안 이어졌다. 한 번 하면 열시간 넘게 이어지기도 했다.

“두 주가 지난 후부터 우리는 호텔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직접 빨아서 호텔 베란다에 널기 시작했습니다.” 현명관이 말했다. 8500쪽 분량의 녹취록으로 작성되었다. ‘신경영 선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삼성 라이징/ 제프리 케인)

지금도 삼성전자 사내외에 돌아다닌다는 음성과 녹취는 바로 이때 기록이다.

(3) 그 2주가 끝인 것도 아니었다.

2월 LA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본격화된 해외 순방 회의는 7월 말에 끝났다. 베를린, 스위스, 런던, 도쿄를 오가며 2천 명을 해외로 불러 회의했다.

곧이어 7-4제가 나온다.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자. 러시아워 시간 낭비를 줄이고 자기 계발하자.


1995년엔 저 유명한 휴대전화 화형식을 한다. 무선사업부 불량률이 10%가 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휴대전화 15만 대, 누군가는 5000만 달러어치 전자제품이라고 했다. 휴대전화와 팩스 등 재고를 쌓아놓고 해머로 내리친다. 2000명 직원 앞에서 불 질렀다. 직원들은 ‘품질 우선’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게 했다. "100% 양품만 만들겠습니다" 현수막도 둘렀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들처럼 품질이 형편없는 제품을 계속 만든다면, 내가 다시 찾아와 지금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을 ‘이건희의 회사’로, 또 ‘품질 경영이 모토인 회사’로 만들었다.

당시는 이미 삼성의 반도체가 반석 위에 올랐을 때다. 1992년에 이미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만들었다. 1993년에는 점유율 세계 1위가 된다.

이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야 '일류회사'가 된다고 확신했고, 나아가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채찍질했다.

이 편집증적 위기 경영과 품질 경영이 삼성을 IT 역사에 남을 회사로 변화시켰다.

■ "15년쯤 뒤에나 가능할 양자 컴퓨터"


한 발 나아가려는 노력은 회사의 명운을 좌우한다. 기업도 생로병사를 겪게 마련이고,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다. 끝없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된다. 실수했다면 빠르게 만회해야 한다.

이번 주 젠슨 황이 그랬다. 젠슨 황은 올 초 양자 컴퓨터가 당장은 상용화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15년 뒤쯤이라면 초기 단계일 것이고, 30년쯤 뒤면 아마도 후기 단계"일 거라고 했다.

그 말을 사실상 번복했다. 엔비디아가 양자 컴퓨팅 발전을 위한 기술 제공을 목표로 미국 보스턴에 '엔비디아 가속 양자 연구센터(NVAQC)'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발자회의가 된 엔비디아의 자체 컨퍼런스 'GTC 2025'에서였다. 하버드, MIT 등과 협업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양자컴퓨팅은 신약 개발부터 재료 개발까지 중요한 과제를 풀어낼 수 있다. 쿠다(CUDA 엔비디아의 자체 소프트웨어 플랫폼)-퀀텀 하이브리드 컴퓨팅을 발전시키고 유용한 대규모 가속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겠다."

사실 신약 개발은 젠슨 황이 오래전부터 강조한 이야기고, 가속 컴퓨팅(Acceleration computing)은 엔비디아가 GPU에서 늘 해오던 일이니 이 발언 자체에 정보값 있는 새 뉴스는 없다. 그럼에도 주목할 부분은 자세의 변화다. GPU를 과신하는 듯하던 1월의 발언에서, 양자 컴퓨팅이 미래가 될 가능성을 대비하고 준비하겠다는 이번 주 발언으로 변화했다.

IT 기업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은 GPU로 AI 세상의 선두에 있는 엔비디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 비전의 변화를 끊임없이 내외부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가장 강력하고 의미 있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2025년 가장 바빴던 삼성의 지난 10일

지난 10일, 삼성전자에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대략 정리해 보면 이와 같다.

1. 엔비디아가 삼성의 천안공장에 점검(Audit)차 다녀갔다. 천안 공장은 HBM 패키징 공장이니까, 퀄테스트(품질검증)가 최종 단계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뉴스다. 5세대 HBM, HBM3E 퀄테스트 통과가 임박했다. 구체적인 제품은 일단 8단, 시점은 3월 말 혹은 2분기 안이다.

2. 삼성 임원 교육에서 이재용 회장의 이른바 '사즉생' 발언이 나왔다. 일부 언론은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이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직접 참석하거나 얼굴이 나온 영상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영상물에 담긴 메시지의 형태라고 했다.)

3. 야당 대표가 이재용 회장과 만났다. 야당 정치인과 삼성 총수의 이례적인 만남이다. 덕담을 나눴다. 야당 대표는 "삼성이 잘 돼야 한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살아야 삼성에 투자한 사람들도 잘산다, 모두를 위한 삼성이 돼 달라"고 했다. 이 회장의 발언에서 의미 있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4.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약 5달 만에 6만 원을 회복했다. 지난 한 주 내내 올랐다. 외국인이 돌아와 강한 매수세를 보였다. 다만 여전히 전고점 대비 30% 안팎 내려앉은 상황이다.

5. 앞서 언급한 엔비디아 GTC에서 젠슨 황이 다시 한번 삼성의 메모리에 사인을 했다. '삼성 GDDR7(그래픽 D램) 최고!'라고 썼다. 삼성 HBM3E 납품에 대한 질문에 '삼성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라고도 답했다. 다만 납품 여부 즉답은 피했다.

이 모든 일이 약 열흘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삼성이 다시 살아난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 그리고 오늘, 삼성 87주년


2025년 3월 22일, 삼성은 창립 87주년을 맞았다. 별도 기념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유별난 것은 아니다. 원래 그랬다.

삼성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로 문을 연 뒤 끝없이 성장의 역사를 써왔다. 무역과 소매업에서 도매, 제조, 건설업과 중화학 공업을 거쳐 첨단 반도체 산업에 도전해 성공했다. 끝없는 도전과 성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와 동일시 해도 좋을 기업사다.

다만 상황은 급박하다. 신성장 동력으로 도전했던 파운드리에선 일단 실패했고, D램에서도 위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 최근 열흘 동안 나온 긍정적인 소식들에서 희망을 보려는 시선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리더십의 역할이다. 위기에 봉착해 사그라지는 성장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은 오롯이 리더의 역할이다. 과거 삼성의 리더들은 그 일을 해냈다. 직접 맨 앞에서 비전을 내놓고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면서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갑툭튀 등장한 것 같은 젠슨 황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상에 있지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실수를 인정하고 겸허히 새로운 비전을 내놓으려 애쓴다.

87번째 생일을 맞은 현재의 삼성전자 리더십은 어떤가. 올해 들어 가장 분주했던 지난 열흘 삼성의 행보에 그런 신호가 보이는가? 삼성이 부활할 것 같다는 구체적이고도 미래 지향적인 신호.

<참고자료>
1. <반도체는 나의 마지막 사업이 될것이다> 등. 삼성전자 뉴스룸. 2010/3/30
2. <임직원이 목숨 걸고 말린 반도체 투자, 호암이 밀어붙인 진짜 이유는?> 동아비즈니스리뷰(유귀훈), 2014년 3월호
3. 삼성 라이징(2020) 제프리 케인
4. 삼성전자 시그널(2025) 서영민
5. 이건희 에세이 :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
6. 호암자전(2014)
7. 아주경제, 매일경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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