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서 ‘간첩’ 몰린 재일교포…국가는 또 “소멸시효” 주장

입력 2025.04.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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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김병진 씨에게 불행이 닥친 건 1983년 7월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김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보안사(현 국군방첩사령부) 서빙고분실에 연행됐습니다.

김 씨는 간첩 혐의로 불법 구금돼 몇 개월 동안 가혹 행위를 당했지만, 결국 공소 보류 처분 됐습니다.

이후 수사관들은 김 씨가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그를 보안사에서 2년간 강제로 근무시켰습니다.

간첩 혐의로 연행된 재일교포들의 수사 과정을 통역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안사가 수많은 재일 교포를 고문하는 만행을 지켜본 김 씨는 이듬해 아내와 아들, 뱃속 딸과 함께 가까스로 한국에서 탈출했습니다.

이후 보안사는 한국에 있는 김 씨의 가족에게 김 씨의 소재를 알려달라고 협박했습니다.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성 네다섯 명이 집 주변에서 김 씨의 이름을 부르거나 카메라로 찍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시로 거처를 옮겨가며 김 씨는 보안사에서 보고 겪은 내용을 담은 책 『보안사』를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전국 서점에서 판매 중이던 『보안사』를 압수하고 출판사 직원 등을 연행해 수사했습니다.

보안사 내부 사정을 누설해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했단 이유로 김 씨에겐 지명수배와 여권 발급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보안사』 출간으로 지명수배·여권 발급 금지… 진화위 "중대한 인권 침해"


2009년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김 씨의 보안사 강제 연행과 불법 구금 등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지난해 5월 2기 진화위는 지명수배와 여권 발급 금지 등 조치에 대해 한 차례 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진화위는 보안사가 "이미 보안사를 퇴직한 신청인과 그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2년 이상 강제 근무로 인권 침해를 받은 신청인에게 지속적으로 회유 및 압박을 통해 불안감을 조성한 것은 그 직무 범위를 벗어난 위법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외무부에 대해서도 "1988년 책자 출판 이후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이상 여권 발급을 제한하고 특히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3월까지 여권 발급 금지 조치를 한 것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매우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봤습니다.

진화위는 국가가 김 씨와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런 결정으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김 씨는 국가로부터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고, 결국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습니다.

■정부법무공단 "소멸시효 지나"…헌재 배척 주장 반복

그제(25일) 오전 10시 50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김 씨의 국가배상 소송 첫 변론기일이 열렸습니다.

정부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등 소송은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 '정부법무공단'이 주로 맡는데, 이 사건 역시 정부법무공단이 맡았습니다.


정부법무공단은 준비서면을 통해 "1995년 1월 28일부터 2000년 3월 21일까지 김병진의 여권 발급에 제한 조치가 있었던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면서도 "손해배상청구권은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민법상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①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않거나(단기 소멸시효), ②불법행위의 종료일로부터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인해 소멸된다(장기 소멸시효)는 주장입니다.


김 씨의 경우 여권 발급금지 조치가 해제된 2000년 3월 21일부터는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는 데 문제가 없는데, 그로부터 무려 24년 이상이 지났으니 정부에는 배상 책임이 없단 취지입니다.

정부법무공단에 근거로 든 법리 중 하나인 '장기 소멸시효'는 헌법재판소가 이미 위헌이라 결정한 부분입니다.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의 불법 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보호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고, 발생한 손해의 공평·타당한 분담이라는 손해배상 제도의 지도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 결정문 중>

2018년 국민보도연맹 등 과거사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재는 장기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이후로도 조작, 은폐해 진실 규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만큼 불법행위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따지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입니다.

헌재 결정 이후 대법원도 여러 과거사 사건에서 장기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2019년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구로공단 조성 과정에서 농지를 강제로 뺏긴 농민과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 헌재 결정을 근거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2022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한 '거창 사건'에 대해 장기 소멸시효 적용 대상이 아니라며, 유족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에 돌려보냈습니다.

헌재의 위헌 판단 이후 과거사 사건의 국가배상 소송에서는 단기 소멸시효를 두고 법리 다툼이 치열한데, 정부가 이미 배제된 지 오래인 장기 소멸시효를 버젓이 다시 들고나온 겁니다.

김 씨 사건의 손해 인지 시점을 진화위 진실 규명 결정이 나온 2024년 5월 1일로 보면, 단기 소멸시효 적용 대상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김 씨 측 "국가로부터 받은 첫 답변이 '청구권 소멸'…2차 가해"

2022년 제54차 UN 인권이사회 대한민국 정부 의견서 발췌2022년 제54차 UN 인권이사회 대한민국 정부 의견서 발췌

정부는 2022년 제54차 UN 인권이사회에서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 관여하는 관련 정부 기관이 (장기 소멸시효 관련) 헌재 및 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다"는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대외적으로 공표한 정부의 지침이 실제 정부법무공단이 수행하는 소송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김 씨 측은 이런 국가의 항변이 "원고들에 대한 2차 가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씨의 소송대리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대한민국은 진화위 권고 이후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과는커녕 원고들의 명예 및 피해회복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원고들은 대한민국의 첫 공식적인 입장으로 '국가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접하게 된 것"이라며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위신까지 스스로 무너뜨리는 태도"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씨도 "1980년대나 90년대까지만 해도 보안사나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며 "2009년 1차 진화위 결정 이후 국가에서 어떤 얘기라도 있을 것이다 하고 기대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두 번째 진화위 결정이 나온 뒤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소송에 나서게 된 것"이라며 "소멸시효 주장은 국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고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김 씨의 국가배상 소송 두 번째 변론기일은 오는 6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립니다.

(그래픽 박지빈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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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4-27 07: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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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김병진 씨에게 불행이 닥친 건 1983년 7월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김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보안사(현 국군방첩사령부) 서빙고분실에 연행됐습니다.

김 씨는 간첩 혐의로 불법 구금돼 몇 개월 동안 가혹 행위를 당했지만, 결국 공소 보류 처분 됐습니다.

이후 수사관들은 김 씨가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그를 보안사에서 2년간 강제로 근무시켰습니다.

간첩 혐의로 연행된 재일교포들의 수사 과정을 통역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안사가 수많은 재일 교포를 고문하는 만행을 지켜본 김 씨는 이듬해 아내와 아들, 뱃속 딸과 함께 가까스로 한국에서 탈출했습니다.

이후 보안사는 한국에 있는 김 씨의 가족에게 김 씨의 소재를 알려달라고 협박했습니다.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성 네다섯 명이 집 주변에서 김 씨의 이름을 부르거나 카메라로 찍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시로 거처를 옮겨가며 김 씨는 보안사에서 보고 겪은 내용을 담은 책 『보안사』를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전국 서점에서 판매 중이던 『보안사』를 압수하고 출판사 직원 등을 연행해 수사했습니다.

보안사 내부 사정을 누설해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했단 이유로 김 씨에겐 지명수배와 여권 발급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보안사』 출간으로 지명수배·여권 발급 금지… 진화위 "중대한 인권 침해"


2009년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김 씨의 보안사 강제 연행과 불법 구금 등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지난해 5월 2기 진화위는 지명수배와 여권 발급 금지 등 조치에 대해 한 차례 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진화위는 보안사가 "이미 보안사를 퇴직한 신청인과 그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2년 이상 강제 근무로 인권 침해를 받은 신청인에게 지속적으로 회유 및 압박을 통해 불안감을 조성한 것은 그 직무 범위를 벗어난 위법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외무부에 대해서도 "1988년 책자 출판 이후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이상 여권 발급을 제한하고 특히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3월까지 여권 발급 금지 조치를 한 것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매우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봤습니다.

진화위는 국가가 김 씨와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런 결정으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김 씨는 국가로부터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고, 결국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습니다.

■정부법무공단 "소멸시효 지나"…헌재 배척 주장 반복

그제(25일) 오전 10시 50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김 씨의 국가배상 소송 첫 변론기일이 열렸습니다.

정부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등 소송은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 '정부법무공단'이 주로 맡는데, 이 사건 역시 정부법무공단이 맡았습니다.


정부법무공단은 준비서면을 통해 "1995년 1월 28일부터 2000년 3월 21일까지 김병진의 여권 발급에 제한 조치가 있었던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면서도 "손해배상청구권은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민법상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①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않거나(단기 소멸시효), ②불법행위의 종료일로부터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인해 소멸된다(장기 소멸시효)는 주장입니다.


김 씨의 경우 여권 발급금지 조치가 해제된 2000년 3월 21일부터는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는 데 문제가 없는데, 그로부터 무려 24년 이상이 지났으니 정부에는 배상 책임이 없단 취지입니다.

정부법무공단에 근거로 든 법리 중 하나인 '장기 소멸시효'는 헌법재판소가 이미 위헌이라 결정한 부분입니다.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의 불법 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보호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고, 발생한 손해의 공평·타당한 분담이라는 손해배상 제도의 지도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 결정문 중>

2018년 국민보도연맹 등 과거사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재는 장기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이후로도 조작, 은폐해 진실 규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만큼 불법행위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따지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입니다.

헌재 결정 이후 대법원도 여러 과거사 사건에서 장기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2019년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구로공단 조성 과정에서 농지를 강제로 뺏긴 농민과 유족들이 낸 소송에서 헌재 결정을 근거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2022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한 '거창 사건'에 대해 장기 소멸시효 적용 대상이 아니라며, 유족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에 돌려보냈습니다.

헌재의 위헌 판단 이후 과거사 사건의 국가배상 소송에서는 단기 소멸시효를 두고 법리 다툼이 치열한데, 정부가 이미 배제된 지 오래인 장기 소멸시효를 버젓이 다시 들고나온 겁니다.

김 씨 사건의 손해 인지 시점을 진화위 진실 규명 결정이 나온 2024년 5월 1일로 보면, 단기 소멸시효 적용 대상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김 씨 측 "국가로부터 받은 첫 답변이 '청구권 소멸'…2차 가해"

2022년 제54차 UN 인권이사회 대한민국 정부 의견서 발췌
정부는 2022년 제54차 UN 인권이사회에서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 관여하는 관련 정부 기관이 (장기 소멸시효 관련) 헌재 및 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다"는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대외적으로 공표한 정부의 지침이 실제 정부법무공단이 수행하는 소송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김 씨 측은 이런 국가의 항변이 "원고들에 대한 2차 가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씨의 소송대리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대한민국은 진화위 권고 이후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과는커녕 원고들의 명예 및 피해회복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원고들은 대한민국의 첫 공식적인 입장으로 '국가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접하게 된 것"이라며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위신까지 스스로 무너뜨리는 태도"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씨도 "1980년대나 90년대까지만 해도 보안사나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며 "2009년 1차 진화위 결정 이후 국가에서 어떤 얘기라도 있을 것이다 하고 기대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두 번째 진화위 결정이 나온 뒤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소송에 나서게 된 것"이라며 "소멸시효 주장은 국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고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김 씨의 국가배상 소송 두 번째 변론기일은 오는 6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립니다.

(그래픽 박지빈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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