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항일운동…성산 씨름대회를 아시나요?

입력 2025.08.15 (07:45) 수정 2025.08.1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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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횡포에 맞서 성산 주민들이 집단으로 일어선 '성산 씨름대회' 사건을 아시나요?

이 사건은 '단순 폭력 사건'으로 기록돼 참가자들은 아직도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잊혀진 역사 속 항일운동을 고민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식민 통치가 한창이던 1927년 신문 기사입니다.

성산포에서 운동회가 열리는 날, 일본인 어부 200여 명이 성산 주민들과 씨름하다가 시비가 붙으며 수백 명이 휩쓸린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 명씩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성산 주민 50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일본인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씨름대회 심판이었던 고 박규언 씨의 아들은 이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한 어머니의 증언을 손 글씨로 기록해 뒀습니다.

[박태보/고 박규언 씨 유족 : "(당시 일본인들이 주민들) 물건도 가져가고,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일) 운동을 해서 청년들을 규합시키자 그것이 목적이었다고."]

씨름대회 사건에 연루된 일본인 처벌을 요구하다 끌려간 고 고인화 씨는 80여 일 뒤 풀려났지만,10년 뒤, 일본 순사들에게 연행된 뒤 시신도 없는 실종사로 기록됐습니다.

[고기봉/고 고인화 씨 유족 : "(씨름대회 10주기를) 준비하다가 일본 순사들이 데려가서 3일 만에 시신도 없이 속옷만 우도 해상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국가기록원의 (판결) 자료는 있는데, 왜 단순 치사 폭행 사건이냐. 그래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유족과 학자들은 씨름대회 사건은 일본인 어업권 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이었고, 1932년 제주 항일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가 부족해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박찬식/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 : "(이제까지 보훈부에서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아왔는데 앞으로 이 사건이 성산 청년들의 항일 의지가 결집한 항일 투쟁으로 볼 수 있게끔 연구하고 해석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제에 맞서 마을과 생계를 지켜낸 주민들.

주민들의 항일 운동을 '폭력'이 아닌 '독립운동'의 역사로 온전히 되돌려주는 연구가 시급합니다.

KBS 뉴스 고민주입니다.

촬영기자:고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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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항일운동…성산 씨름대회를 아시나요?
    • 입력 2025-08-15 07:45:41
    • 수정2025-08-15 09:55:01
    뉴스광장(제주)
[앵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횡포에 맞서 성산 주민들이 집단으로 일어선 '성산 씨름대회' 사건을 아시나요?

이 사건은 '단순 폭력 사건'으로 기록돼 참가자들은 아직도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잊혀진 역사 속 항일운동을 고민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식민 통치가 한창이던 1927년 신문 기사입니다.

성산포에서 운동회가 열리는 날, 일본인 어부 200여 명이 성산 주민들과 씨름하다가 시비가 붙으며 수백 명이 휩쓸린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 명씩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성산 주민 50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일본인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씨름대회 심판이었던 고 박규언 씨의 아들은 이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한 어머니의 증언을 손 글씨로 기록해 뒀습니다.

[박태보/고 박규언 씨 유족 : "(당시 일본인들이 주민들) 물건도 가져가고, 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항일) 운동을 해서 청년들을 규합시키자 그것이 목적이었다고."]

씨름대회 사건에 연루된 일본인 처벌을 요구하다 끌려간 고 고인화 씨는 80여 일 뒤 풀려났지만,10년 뒤, 일본 순사들에게 연행된 뒤 시신도 없는 실종사로 기록됐습니다.

[고기봉/고 고인화 씨 유족 : "(씨름대회 10주기를) 준비하다가 일본 순사들이 데려가서 3일 만에 시신도 없이 속옷만 우도 해상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국가기록원의 (판결) 자료는 있는데, 왜 단순 치사 폭행 사건이냐. 그래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유족과 학자들은 씨름대회 사건은 일본인 어업권 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이었고, 1932년 제주 항일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가 부족해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박찬식/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 : "(이제까지 보훈부에서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아왔는데 앞으로 이 사건이 성산 청년들의 항일 의지가 결집한 항일 투쟁으로 볼 수 있게끔 연구하고 해석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제에 맞서 마을과 생계를 지켜낸 주민들.

주민들의 항일 운동을 '폭력'이 아닌 '독립운동'의 역사로 온전히 되돌려주는 연구가 시급합니다.

KBS 뉴스 고민주입니다.

촬영기자:고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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