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점’으로 남은 독립운동가…포상은 언제쯤? [광복80주년]⑩

입력 2025.08.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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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작성된 형사사건 판결문은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활동을 했고, 일제가 어떤 죄명으로 어느 정도의 형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국가기록원이 번역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독립유공자 심사 기초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인데도 포상 예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까요?
광복 80년을 맞은 지금까지 포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KBS와 국가수리과학연구소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5,660건에 등장한 독립운동가 19,167명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독립운동 판결문 속 중심 인물은?

먼저, 독립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점으로 설정하고, 재판을 함께 받은 경우 선으로 연결했습니다.

여러 재판에 연루되거나 다른 인물과 연결이 많을수록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대한 연결망이 하나 그려집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 18,258명의 정보를 입력하고, 포상을 받은 경우는 붉은색, 포상을 받지 못한 경우는 푸른색 점으로 표시했습니다.

■선명히 드러난 푸른 점…"독립운동 핵심 인물"

판결문 속 연결망으로 본 독립운동 중심인물(KBS·국가수리과학연구소 분석)판결문 속 연결망으로 본 독립운동 중심인물(KBS·국가수리과학연구소 분석)

인물마다 연루된 사건 수와 연결된 인물 수를 계산해 점을 찍자, 포상을 받은 수많은 붉은 점 가운데 푸른색 점 몇 개가 눈에 띕니다.

여러 사건에 관여해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여태껏 포상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확인된 겁니다.

분석을 진행한 권오규 국가수리과학연구소 공공기반연구부장은 "네트워크상의 정보 흐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면서 "독립운동에서 조직을 매개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분석 결과 확인된 미포상 독립운동가는 정후균, 최상호, 최규문, 황상남 선생 등이 대표적입니다.

판결문을 확인해 보니 이들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취재진은 이분들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왜 포상을 받지 못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빨갱이 낙인 두려워 유공자 신청 주저"


2008년부터 5,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정부에 포상을 신청한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그 이유로 꼽았습니다.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난 뒤다 보니까 호남에서는 '잘못하면 또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면서 "후손들이 포상 신청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경북지역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여부를 막론하고 대거 포상 신청이 이뤄졌는데 광주·전남지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국가보훈부 자료를 보면 경북지역 독립유공자는 2,522명으로 전남(1,530명)은 물론 경기(1,531명)지역보다 65%가량 더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기준으로 경기와 전남, 경북의 인구가 260만 명에서 300만 명 내외로 비슷했고,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역별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독립운동가 수가 크게 차이 나는 셈입니다.

■"독립유공자 포상은 국가의 역할…개인에 맡겨선 안 돼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연구해 온 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독립유공자 심사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으려면 유족이나 후손이 자료를 모아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자료에 접근하고 어려운 한자와 일본어 등을 해석해 독립유공자 심사를 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앞선 사례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후손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꺼리기도 합니다.

반면, 정부는 이미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이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직접 들여와 번역할 정도입니다.

앞서 KBS 분석 결과 확인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 역시 모두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 사료관'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미 보유한 자료가 많이 있는데도 후손 등이 신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상에 소극적이었던 겁니다.

임 교수는 "독립운동사 연구 성과가 독립유공자 포상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가 보유한 자료를 활용해 유족이나 후손의 신청 없이 국가보훈부가 곧바로 심의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국가보훈부가 나서서 독립기념관이나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자료를 전수조사해야 한다"면서 "독립유공자를 후손들에게 발굴해 신청하라고 하는 것은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학계가 추산하는 독립운동가는 3백만 명.

하지만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2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관련기사] 독립운동 주도했는데 포상 제외?…“정부가 직접 나서야”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29488

[관련기사] 탄압 속에도 ‘독립운동’ 굳건해진 이유는?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30498

[관련기사] 탄압 속에도 ‘독립운동’ 살아 남은 이유는? [광복80주년]⑦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31367

촬영기자 박준규 / 그래픽 최윤우, 박소현,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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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19 07:00:05
    심층K

일제강점기 작성된 형사사건 판결문은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활동을 했고, 일제가 어떤 죄명으로 어느 정도의 형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국가기록원이 번역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독립유공자 심사 기초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인데도 포상 예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까요?
광복 80년을 맞은 지금까지 포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KBS와 국가수리과학연구소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5,660건에 등장한 독립운동가 19,167명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독립운동 판결문 속 중심 인물은?

먼저, 독립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점으로 설정하고, 재판을 함께 받은 경우 선으로 연결했습니다.

여러 재판에 연루되거나 다른 인물과 연결이 많을수록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대한 연결망이 하나 그려집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 18,258명의 정보를 입력하고, 포상을 받은 경우는 붉은색, 포상을 받지 못한 경우는 푸른색 점으로 표시했습니다.

■선명히 드러난 푸른 점…"독립운동 핵심 인물"

판결문 속 연결망으로 본 독립운동 중심인물(KBS·국가수리과학연구소 분석)
인물마다 연루된 사건 수와 연결된 인물 수를 계산해 점을 찍자, 포상을 받은 수많은 붉은 점 가운데 푸른색 점 몇 개가 눈에 띕니다.

여러 사건에 관여해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여태껏 포상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확인된 겁니다.

분석을 진행한 권오규 국가수리과학연구소 공공기반연구부장은 "네트워크상의 정보 흐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면서 "독립운동에서 조직을 매개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분석 결과 확인된 미포상 독립운동가는 정후균, 최상호, 최규문, 황상남 선생 등이 대표적입니다.

판결문을 확인해 보니 이들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취재진은 이분들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왜 포상을 받지 못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빨갱이 낙인 두려워 유공자 신청 주저"


2008년부터 5,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정부에 포상을 신청한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그 이유로 꼽았습니다.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난 뒤다 보니까 호남에서는 '잘못하면 또 빨갱이로 몰릴 수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면서 "후손들이 포상 신청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경북지역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여부를 막론하고 대거 포상 신청이 이뤄졌는데 광주·전남지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국가보훈부 자료를 보면 경북지역 독립유공자는 2,522명으로 전남(1,530명)은 물론 경기(1,531명)지역보다 65%가량 더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기준으로 경기와 전남, 경북의 인구가 260만 명에서 300만 명 내외로 비슷했고,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역별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독립운동가 수가 크게 차이 나는 셈입니다.

■"독립유공자 포상은 국가의 역할…개인에 맡겨선 안 돼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연구해 온 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독립유공자 심사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으려면 유족이나 후손이 자료를 모아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자료에 접근하고 어려운 한자와 일본어 등을 해석해 독립유공자 심사를 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앞선 사례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후손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꺼리기도 합니다.

반면, 정부는 이미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이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직접 들여와 번역할 정도입니다.

앞서 KBS 분석 결과 확인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 역시 모두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 사료관'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미 보유한 자료가 많이 있는데도 후손 등이 신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상에 소극적이었던 겁니다.

임 교수는 "독립운동사 연구 성과가 독립유공자 포상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가 보유한 자료를 활용해 유족이나 후손의 신청 없이 국가보훈부가 곧바로 심의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국가보훈부가 나서서 독립기념관이나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자료를 전수조사해야 한다"면서 "독립유공자를 후손들에게 발굴해 신청하라고 하는 것은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학계가 추산하는 독립운동가는 3백만 명.

하지만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2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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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31367

촬영기자 박준규 / 그래픽 최윤우, 박소현, 조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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