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지금 그들은?

입력 2015.11.21 (07:49) 수정 2015.11.21 (09:1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 도발한지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서해 최전선 연평도는 평온 속에서도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데요,

그나마 오늘의 평화는 북한의 도발에 맞서 온몸을 던진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앞두고 당시 우리 장병들의 활약상과 연평도의 최근 모습을 취재했습니다.

맹유나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1주일 앞둔 지난 16일, 국립 대전 현충원...

북한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한 고 서정우 하사, 고 문광욱 일병의 유해가 새로 조성된 전사자 묘역에 안장됩니다.

제2연평해전 6용사 바로 옆에 누운 두 영웅의 묘비에는 ‘연평도 포격전 참전’이라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연평부대 포병 중대장) : "두 사람의 희생이 좀 더 값지게, 높이 평가된 것 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사한 두 해병들도 하늘에서 아마 기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되고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던 유가족들은 묘비를 쓰다듬으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냅니다.

<인터뷰> 이순희(故 문광욱 일병 어머니) : "5년 만에 (유골함을) 안아봤잖아요. 이대로 그냥 안고 집으로 가고 싶었어요. 저희 아들로서 이게 마지막이 됐으면 좋겠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반공의식을 많이 깨달으면 좋겠어요."

꽃다운 나이에 몸을 던져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두 젊은이.

함께 북한의 도발에 맞서 싸웠던 전우들은 이들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북한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

당시 서 하사는 제대를 한 달 여 앞둔 상황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는데요.

지금 이 곳, 서 하사의 모교에서는 고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얀 천이 걷히자 늠름한 20대 청년의 흉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 서정우 하사의 모교에 세워진 흉상입니다.

<녹취> 김오복(故 서정우 하사 어머니) : "아들 생각이 많이 나서 너무나 슬픔이 복받쳐 올랐었는데, 그 당시의 꿈은 못 이루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정말 하늘나라에서 마저 꿈을 이루고 살길 바라는 마음 그대로입니다."

생전 가장 사랑했던 모교에 다시 돌아 온 고 서정우 하사.

후배들은 자랑스러운 선배의 모습에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인터뷰> 정윤창(문성중학교 2학년) : "저도 선배님처럼 국가를 위해 몸 바쳐 할 자신 있습니다."

<인터뷰> 이승주(문성중학교 3학년) : "서정우 선배님이 계셔서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편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정우 하사님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국가를 지키겠습니다."

학창 시절 유독 책임감이 강했던 제자가 지금도 눈에 선한 은사는 제자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인터뷰> 이춘범(故 서정우 하사 중학교 은사) : "리더십 짱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교실에 바쁜 일이 없으면 지가 항상 담임역할을 해주고…그래서 항상 이 녀석만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꼭 울컥해지는 그런 게 지금도 있어요, 지금도."

인천에서 배를 타고 2시간이 걸려 도착한 연평도.

북한의 기습 포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연평면의 중부리 마을입니다.

당시 포탄에 맞아 파손됐던 보건소와 가옥들은 모두 피해 복구를 마친 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여기저기엔 처참했던 포격의 상흔이 여전합니다.

지붕이 내려앉고, 창문이 깨진 채 까맣게 타버린 가옥이 5년 전의 그 날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중한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한 끔찍한 상황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 악몽으로 남아있습니다.

<녹취> 김진화(연평도 주민) : "11월 23일 생생하지. 그때 상황이 다 죽을상이지 뭐. 상황 얘기는 할 것도 없어. 다 죽는 줄 알았지. 맨날 마음 못 놓고 살아요, 맨날. 여기가 연평도가 육지 방패막이야. 지금도 '쾅' 소리만 나면 놀라요, 지금도."

<녹취> "3포 전투 배치!"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북한의 포격 도발 이후 연평도에 증강 배치된 K나인 자주포를 다루는 연평부대 포병대원들입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 내내 매서운 눈빛으로 대원들을 지도하는 천중규 중사.

<녹취> "정렬! 확인!!"

천 중사는 5년 전, 북한의 포격 도발에 맞서 K나인 자주포로 처음 대응 사격을 했던 주인공입니다.

당시 북한의 기습 포격으로 이미 자주포 두 문이 화염에 휩싸이고 방호벽이 크게 파열됐던 상황..

하지만 천 중사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북한의 무도 진지를 향해 50발의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북한군의 첫 포격 이후 13분 만이었습니다.

<인터뷰> 천중규(중사/당시 첫 대응사격) : "인근 포반에서 탄이 떨어지는 것을 관측하고 신속히 사격 준비를 하였습니다. 중대장의 지시에 의거 차기 임무를 시행하였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격 임무를 시행하였습니다."

이후 연평도를 떠나 다른 부대에 배치됐던 천 중사는 지난 9월 4년 만에 다시 연평도 근무를 자청했습니다.

<인터뷰> 천중규(중사/당시 첫 대응사격) : "포항에서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마침 연평도 포병부대에서 공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다시 적이 도발하면 더욱더 처절히 응징하리라 다짐하며 복귀했습니다."

천중규 중사를 비롯해 중대원을 이끌고 대응 포격을 지휘했던 김정수 소령.

김 소령은 5년 전 전투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포병 중대장) : "갑자기 이제 ‘꽝’하는 폭음이 들리고 쿵쿵쿵쿵 계속 연속되는 폭발음이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는 그런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포탄이 파열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사격준비를 시켰더니 딱 세 문이 사격준비가 된답니다. 그리고 부대장님께서 단호하게 명령을 했습니다. '쏴'라고. 그 때부터 이제 최초 13분 만에 대응사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50발의 최초 대응 사격 이후 북한의 2차 포격이 부대 본부와 민가에 집중되자 부대원들은 다시 서른 발의 포격으로 반격했습니다.

비록 북한군의 기습 도발로 허는 찔렸지만, 즉각적인 대응으로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아낸 겁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포병중대장) : "우리기 사격을 함으로써 적이 추가적인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아냈다는 것이고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단 한 명도 두려움에 떨거나 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 냄으로써 승리로 이끌었다고 확신합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계기로 일각에서는 사건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해병대사령부는 사건의 공식 명칭을 '포격 도발'에서 '포격전'으로 바꾸는 방안을 국방부에 건의했는데요.

북한의 도발에 맞선 우리군의 신속한 대응에 초점을 맞춰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후 줄곧 우리 군의 선제공격과 승전을 주장해온 북한.

<녹취> 조선중앙TV(지난해 11월 24일) : "연설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연평도 포사격 전투가 반공화국 대결 책동에 미쳐 날뛰던 남조선 괴뢰들에 영웅적 조선 인민군의 본때를 보여주고 선군 조선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승리의 한 페이지를 빛나게 아로새긴 데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군 당국은 당시 80발에 이른 우리 군의 대응사격으로 북한군의 인명 피해가 4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의 도발에 따른 포격전에서 우리 군이 승전했다는 게 해병대 사령부를 중심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연평도 포격전으로 명칭을 바꿀 경우 북한 도발에 대한 경각심이 흐려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신중한 입장입니다.

<녹취> 김민석(국방부 대변인) : "부분적으로 해병대에서 행사할 때는 포격전으로 하는데 아직은 정부 공식용어로는 포격전으로 정리가 안 됐습니다. 정부차원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

연평항에 정박 중인 꽃게잡이 어선마다 다시 출항 준비가 한창입니다.

<녹취> 방영철(연평도 어민) : "꽃게가 초반에는 좀 나오는데 한 달 정도 나오고 꽃게가 싹 안 나왔어요. 선원들이 지금 걱정하고 있어요, 꽃게 안 나와서."

출항 명령과 함께 만선의 꿈을 안고 어선들이 일제히 바다로 향합니다.

같은 시각, 해안초소에선 해병대원들의 근무 교대가 이뤄집니다.

빈틈없는 경계로 지금 이 순간도 묵묵히 연평도의 평화를 지키고 있는 장병들입니다.

<녹취> 박준영(상병/연평부대): "필사즉생의 각오로 5년 전 연평도 포격전 선배 해병들처럼 온 힘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북방한계선에서 불과 1.5킬로미터,

서해 최전방 연평도, 5년 전 북한의 포격 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과 이들이 되찾아온 평화의 가치를 다시금 기억해야할 때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슈&한반도]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지금 그들은?
    • 입력 2015-11-21 08:41:46
    • 수정2015-11-21 09:15:47
    남북의 창
<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 도발한지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서해 최전선 연평도는 평온 속에서도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데요,

그나마 오늘의 평화는 북한의 도발에 맞서 온몸을 던진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앞두고 당시 우리 장병들의 활약상과 연평도의 최근 모습을 취재했습니다.

맹유나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1주일 앞둔 지난 16일, 국립 대전 현충원...

북한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한 고 서정우 하사, 고 문광욱 일병의 유해가 새로 조성된 전사자 묘역에 안장됩니다.

제2연평해전 6용사 바로 옆에 누운 두 영웅의 묘비에는 ‘연평도 포격전 참전’이라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연평부대 포병 중대장) : "두 사람의 희생이 좀 더 값지게, 높이 평가된 것 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사한 두 해병들도 하늘에서 아마 기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되고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던 유가족들은 묘비를 쓰다듬으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냅니다.

<인터뷰> 이순희(故 문광욱 일병 어머니) : "5년 만에 (유골함을) 안아봤잖아요. 이대로 그냥 안고 집으로 가고 싶었어요. 저희 아들로서 이게 마지막이 됐으면 좋겠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반공의식을 많이 깨달으면 좋겠어요."

꽃다운 나이에 몸을 던져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두 젊은이.

함께 북한의 도발에 맞서 싸웠던 전우들은 이들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북한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

당시 서 하사는 제대를 한 달 여 앞둔 상황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는데요.

지금 이 곳, 서 하사의 모교에서는 고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얀 천이 걷히자 늠름한 20대 청년의 흉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 서정우 하사의 모교에 세워진 흉상입니다.

<녹취> 김오복(故 서정우 하사 어머니) : "아들 생각이 많이 나서 너무나 슬픔이 복받쳐 올랐었는데, 그 당시의 꿈은 못 이루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정말 하늘나라에서 마저 꿈을 이루고 살길 바라는 마음 그대로입니다."

생전 가장 사랑했던 모교에 다시 돌아 온 고 서정우 하사.

후배들은 자랑스러운 선배의 모습에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인터뷰> 정윤창(문성중학교 2학년) : "저도 선배님처럼 국가를 위해 몸 바쳐 할 자신 있습니다."

<인터뷰> 이승주(문성중학교 3학년) : "서정우 선배님이 계셔서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편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정우 하사님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국가를 지키겠습니다."

학창 시절 유독 책임감이 강했던 제자가 지금도 눈에 선한 은사는 제자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인터뷰> 이춘범(故 서정우 하사 중학교 은사) : "리더십 짱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교실에 바쁜 일이 없으면 지가 항상 담임역할을 해주고…그래서 항상 이 녀석만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꼭 울컥해지는 그런 게 지금도 있어요, 지금도."

인천에서 배를 타고 2시간이 걸려 도착한 연평도.

북한의 기습 포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연평면의 중부리 마을입니다.

당시 포탄에 맞아 파손됐던 보건소와 가옥들은 모두 피해 복구를 마친 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하지만 마을 여기저기엔 처참했던 포격의 상흔이 여전합니다.

지붕이 내려앉고, 창문이 깨진 채 까맣게 타버린 가옥이 5년 전의 그 날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중한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한 끔찍한 상황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 악몽으로 남아있습니다.

<녹취> 김진화(연평도 주민) : "11월 23일 생생하지. 그때 상황이 다 죽을상이지 뭐. 상황 얘기는 할 것도 없어. 다 죽는 줄 알았지. 맨날 마음 못 놓고 살아요, 맨날. 여기가 연평도가 육지 방패막이야. 지금도 '쾅' 소리만 나면 놀라요, 지금도."

<녹취> "3포 전투 배치!"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북한의 포격 도발 이후 연평도에 증강 배치된 K나인 자주포를 다루는 연평부대 포병대원들입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 내내 매서운 눈빛으로 대원들을 지도하는 천중규 중사.

<녹취> "정렬! 확인!!"

천 중사는 5년 전, 북한의 포격 도발에 맞서 K나인 자주포로 처음 대응 사격을 했던 주인공입니다.

당시 북한의 기습 포격으로 이미 자주포 두 문이 화염에 휩싸이고 방호벽이 크게 파열됐던 상황..

하지만 천 중사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북한의 무도 진지를 향해 50발의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북한군의 첫 포격 이후 13분 만이었습니다.

<인터뷰> 천중규(중사/당시 첫 대응사격) : "인근 포반에서 탄이 떨어지는 것을 관측하고 신속히 사격 준비를 하였습니다. 중대장의 지시에 의거 차기 임무를 시행하였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격 임무를 시행하였습니다."

이후 연평도를 떠나 다른 부대에 배치됐던 천 중사는 지난 9월 4년 만에 다시 연평도 근무를 자청했습니다.

<인터뷰> 천중규(중사/당시 첫 대응사격) : "포항에서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마침 연평도 포병부대에서 공석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다시 적이 도발하면 더욱더 처절히 응징하리라 다짐하며 복귀했습니다."

천중규 중사를 비롯해 중대원을 이끌고 대응 포격을 지휘했던 김정수 소령.

김 소령은 5년 전 전투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포병 중대장) : "갑자기 이제 ‘꽝’하는 폭음이 들리고 쿵쿵쿵쿵 계속 연속되는 폭발음이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는 그런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포탄이 파열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사격준비를 시켰더니 딱 세 문이 사격준비가 된답니다. 그리고 부대장님께서 단호하게 명령을 했습니다. '쏴'라고. 그 때부터 이제 최초 13분 만에 대응사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50발의 최초 대응 사격 이후 북한의 2차 포격이 부대 본부와 민가에 집중되자 부대원들은 다시 서른 발의 포격으로 반격했습니다.

비록 북한군의 기습 도발로 허는 찔렸지만, 즉각적인 대응으로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아낸 겁니다.

<인터뷰> 김정수(소령/당시 포병중대장) : "우리기 사격을 함으로써 적이 추가적인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아냈다는 것이고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단 한 명도 두려움에 떨거나 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 냄으로써 승리로 이끌었다고 확신합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5주기를 계기로 일각에서는 사건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해병대사령부는 사건의 공식 명칭을 '포격 도발'에서 '포격전'으로 바꾸는 방안을 국방부에 건의했는데요.

북한의 도발에 맞선 우리군의 신속한 대응에 초점을 맞춰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후 줄곧 우리 군의 선제공격과 승전을 주장해온 북한.

<녹취> 조선중앙TV(지난해 11월 24일) : "연설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연평도 포사격 전투가 반공화국 대결 책동에 미쳐 날뛰던 남조선 괴뢰들에 영웅적 조선 인민군의 본때를 보여주고 선군 조선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승리의 한 페이지를 빛나게 아로새긴 데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군 당국은 당시 80발에 이른 우리 군의 대응사격으로 북한군의 인명 피해가 4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의 도발에 따른 포격전에서 우리 군이 승전했다는 게 해병대 사령부를 중심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국방부는 이에 대해 연평도 포격전으로 명칭을 바꿀 경우 북한 도발에 대한 경각심이 흐려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신중한 입장입니다.

<녹취> 김민석(국방부 대변인) : "부분적으로 해병대에서 행사할 때는 포격전으로 하는데 아직은 정부 공식용어로는 포격전으로 정리가 안 됐습니다. 정부차원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

연평항에 정박 중인 꽃게잡이 어선마다 다시 출항 준비가 한창입니다.

<녹취> 방영철(연평도 어민) : "꽃게가 초반에는 좀 나오는데 한 달 정도 나오고 꽃게가 싹 안 나왔어요. 선원들이 지금 걱정하고 있어요, 꽃게 안 나와서."

출항 명령과 함께 만선의 꿈을 안고 어선들이 일제히 바다로 향합니다.

같은 시각, 해안초소에선 해병대원들의 근무 교대가 이뤄집니다.

빈틈없는 경계로 지금 이 순간도 묵묵히 연평도의 평화를 지키고 있는 장병들입니다.

<녹취> 박준영(상병/연평부대): "필사즉생의 각오로 5년 전 연평도 포격전 선배 해병들처럼 온 힘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북방한계선에서 불과 1.5킬로미터,

서해 최전방 연평도, 5년 전 북한의 포격 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과 이들이 되찾아온 평화의 가치를 다시금 기억해야할 때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