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北 속도전의 역사…‘70일 전투’의 한계는?

<앵커 멘트>

국제 사회의 고강도 압박에 맞서 북한은 내부적으로 이른바 70일 전투를 내세워 체제 결속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북한은 주요 국면마다 70일, 100일 전투 등 대대적으로 속도전을 벌여왔는데요.

유례없는 제재 국면에서 또다시 속도전 카드를 꺼내든 북한의 속내와 함께 속도전의 한계를 <클로즈업 북한>에서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어둠이 짙게 깔린 공사장.

횃불을 든 한 무리의 돌격대원들이 돌을 주워 나르고 있다.

변변한 장비조차 없이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강행되는 야간 공사,

<녹취> 김종훈(자강도려단 부참모장) : “언제(댐) 쌓기에 동원된 굴착기들과 진동 다짐차들이 갑자기 고장이 나서 우리는 등짐으로 날라서라도 매일 전투 목표를 무조건 수행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한 사람같이 떨쳐나섰습니다.”

5월 당 대회 이전까지 발전소 공사를 마치겠다며 백두산에서 벌이고 있는 이른바 ‘철야진군’, 심야 70일 전투 현장이다.

시뻘건 쇳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용광로.

황해도 제철소의 근로자들은 연일 생산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녹취> 강철(황해제철연합소 책임기사) : “제강 시간을 단축하고 자재 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70일 전투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쇳물냄비 용량을 1.2배로 늘려서 하루 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고 있습니다.”

붉은 깃발에 방송 차량까지 앞세우고 근로자들의 노력투쟁을 독려하는 경제선동 대원들까지...

북한 전역, 북한 사회 전체가 ‘70일 전투’라는 속도전에 빠져들고 있다.

<녹취> 조선중앙TV : “역사적인 당 제7차 대회를 앞두고 충정의 70일 전투를 벌일 것을 열렬히 호소하였으며”

북한 당국이 5월 7차 당 대회를 명분으로 70일 전투 방침을 공식 발표한 건 지난달 말,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논의가 한창이던 시점이다.

<녹취> “모두 충정의 70일 전투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자! 승리자가 되자! 승리자가 되자! 승리자가 되자!”

북한 매체는 곧바로 광산과 탄광, 발전소 등 주요 생산 현장의 70일 전투 모습을 전하며 분위기 띄우기에 나섰다.

<녹취> 허학섭(재령광산 기사장) : “우리가 세운 70일 전투 계획은 방대하지만 우리는 기계공들의 정신력을 총 폭발시켜 매일 쇳돌 생산을 135% 이상 넘쳐 수행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독려하기 위한 70일 전투 관련 시와 구호도 연일 전파를 타고 있다.

북한 당국이 70일 전투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사상전이다.

<녹취> 북한 주민 : "유엔의 제재를 한두 번 받아온 우리 인민이 아니며 우리는 유엔의 제재를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습니다."

<녹취> 북한 주민 : "자강력의 억센 힘으로 단호히 짓뭉개버리고 이 땅 위에 기어이 부강번영하는 주체의 사회주의 강성국가를 일떠세우고야 말겠습니다."

이번 70일 전투가 경제적 성과를 위한 단순한 속도전을 넘어, 제재 국면에 맞선 내부 결속용의 의미가 더 크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70일 전투라고 하는 어떤 대규모 군중동원을 통해서 체제를 결속시키는 거죠. 여러 가지 대북제재 국면, 내적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완, 이런 것들을 다시 결속을 시킴으로서 명실상부한 김정은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7차 당 대회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이 같은 북한 당국의 의도는 과거 대대적으로 펼쳤던 속도전의 당시 배경을 보면 더 뚜렷해진다.

최근, 북한 TV가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는 새 기록영화의 한 장면.

밧줄 하나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근로자들이 탄광의 수직 절벽을 기어오르며 채굴 작업을 하고 있다.

42년 전인 1974년, 북한 당국이 처음으로 일정 기간을 정해 속도전을 벌인 ‘70일 전투’의 현장 모습이다.

<녹취> 北 ‘속도전’ 기록영화 :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한 몸을 서슴없이 내대며 진격의 돌파구를 열어나갔으니 70일 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을 불굴의 투사들로 키웠습니다.”

74년의 70일 전투는 이른바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이 차질을 빚자 북한 당국이 내놓은 특단의 조치였다.

그리고 이를 진두지휘한 건 그해 초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김정일이었다.

주요 생산 현장마다 경제 선동 대원들이 대거 투입됐고, 주민들을 결집하기 위한 새로운 선전 구호도 등장했다.

<녹취> 北 기록영화 ‘위대한 전환의 1970년대’ 中 : “우리 장군님 3대혁명 붉은기 쟁취 운동과 함께 제시하신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라는 구호를 따라 3대 혁명 소조원들도 떨쳐나섰습니다.”

후계자 신분의 김정일은 북한 전역에서 펼쳐진 이 70일 전투를 통해 점차 권력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74년의 70일 전투는 1980년 6차 당 대회 직전의 100일 전투로 이어졌다.

북한을 대표하는 체육시설인 창광원과 빙상관. 그리고, 북한의 최대 산부인과인 평양산원은 모두 1980년 100일 전투의 산물이다.

<녹취> 北 ‘속도전’ 기록영화 : “100일 전투 기간에 인민을 위한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일떠세우도록(건설하도록) 하신 우리 장군님,.”

이후에도 위기 국면마다 활용됐던 북한의 속도전 카드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재등장한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북한의 대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됐던 2009년, 북한 전역엔 다시 ‘150일 전투’ 바람이 불어닥쳤다.

북한 자강도의 희천발전소 건설현장, 5년이 걸린다는 댐 기초공사에 걸린 시간은 불과 5개월, 임시 수로 건설은 석 달 만에 끝났다.

<녹취> 리형진(희천발전소 시공 부기사장) : “지금 우리는 희천2호발전소 언제(댐) 구간 기본 언제(댐) 암반 기초 굴착과 타입(다져넣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세로 조금만 더 전진해서 빨리 물길만 돌린다면 오직 승리의 좌표를 향해 확신성 있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대표적인 속도전 구호중 하나인 ‘희천속도’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녹취> 조선중앙TV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희천발전소 건설에서 창조된 속도를 ‘희천속도’라고 명명해주시며 이 진군속도로 100일 전투의 승리를 이룩하도록 영도하셨습니다.”

숨지기 2년 전, 수척한 얼굴로 왼손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김정일이었지만, 속도전 현장 곳곳을 누비며 주민들을 독려했다.

<인터뷰> 이석기(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2009년의 속도전은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다. 체제를 단속하고 사람들의 불만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그때까지 이뤄져왔던 시장 경제 확대를 뒤집고 이런 형태로, 소위 정치적 목적이 앞섰던 그런 형태의 속도전이라고 볼 수 있고요.”

속도전이 진행되는 시기, 북한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남북의 창 취재진은 지난 2009년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 당시 직접 속도전 현장에 있었던 간호군인 출신 탈북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 최수향(2014년 탈북/150일 전투 등 참여) : “탄광에서 탄광 광부들이 일하는 시간이 지정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전투를 진행하면서 완전 풀타임제라고 말해야죠. 24시간 만가동 탄을 캐는 거예요. 그렇게 24시간 막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탄 캐는 조건을 보면 정말 노력만 동원돼서 전투를 하지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적 자재라든가 이런 게 전혀 보장되지 않는 거예요.”

근로자들은 건설장 주변에 대형 임시 막사를 설치해 숙식을 자체 해결하며 연일 철야 작업을 진행한다.

무리한 공사에 인명사고 역시 빈번하다고 한다.

<인터뷰> 최수향(2009년 150일 전투 등 참여) : “갱도가 붕락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지침목을 세우고 하는데 동발목도 나무가 부족하다보니까 현장에 동발목도 안 세워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언제 붕락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하라고 하면 그냥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뭐가 되던 앞으로 가라면 가야 되니까 그렇게 들어가서 그런 상황에서 일을 하는 거죠. 그렇다보니까 사고도 많이 여러 차례 났었고...”

문제는 속도전 이후이다.

단기성과를 위해 특정 분야에 집중된 자원 투입은 결과적으로 자원 분배의 왜곡을 불러 큰 부작용을 낳았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인터뷰> 이석기(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74년도에 70일 전투 때도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자기들은 성공했다고 평가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겨서 바로 2차 7개년 계획을 시작하지 못하고 2년이라는 기간동안 완충기를 둡니다. 그것은 워낙 70일 전투 기간에 자원이 고갈되다보니까 바로 새로운 경제 계획을 추진하기 어려워서 2년 동안은 일종에 후유증을 극복하는 시기로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1970년대 후반 북한은 결국 대규모 차관을 갚지 못해 이후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기도 했다.

이런 식의 후유증은 결국 90년대 사회주의 붕괴와 맞물려 북한 경제가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접어드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이석기(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이런 형태의 속도전이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북한 경제가 정상적인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것들이 결합해서 북한 경제가 90년대에 침몰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중국, 러시아 등 과거 우방들까지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번 속도전은, 후유증을 더 키울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이미 구조적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북한 경제가 침체를 겪었고 그 다음에 김정은 정권이 집권 4년, 5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권력기반도 상당히 취약합니다. 거기다가 지금 4차 핵실험으로 국제적인 대북제제도 강화되고 있고 대내외적인 여건상 70일 전투가 소기의 성과를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유례없는 대북 제재 속 5월 7차 당 대회 김정은 시대의 선포를 앞두고 다시 70일 전투의 낡은 속도전 카드를 꺼내 든 북한,

하지만 주민들을 쥐어짜는 과거 회귀식의 속도전으로는 더 이상 경제성과와 체제결속의 목적 그 어느 것도 달성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