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6·15’ 이후 16년…북핵에 막힌 남북 관계

입력 2016.06.18 (07:49) 수정 2016.06.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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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성원입니다, 엄지인입니다.

6월 18일 토요일 <남북의 창>입니다.

오늘 준비한 주요 소식부터 보시겠습니다.

지난 15일은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지 16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 성사를 떠나 추진 의사만 밝혀도 정국 최대의 현안이 될 정도로 국민들에겐 늘 커다란 관심거리였는데요.

그만큼 역대 대통령들에게 큰 유혹이기도 했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6.15 남북공동선언 16주년을 계기로 그동안의 정상회담 논의를 살펴보고 북핵에 막힌 남북관계를 고민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맹유나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6.15 남북공동선언 16주년이자 1차 연평해전 17주년이었던 지난 15일.

새누리당 지도부는 공군 부대를 찾아 연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며 확고한 안보관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김희옥(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 "(1차 연평해전) 1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이 있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어젯밤에도 단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같은 날, 더불어 민주당 지도부가 임진각을 찾는 등 야당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계승에 방점을 뒀습니다.

<녹취> 김종인(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 "(6.15) 16주년을 맞아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남북 관계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야의 시선과 행보가 엇갈린 6.15.

북한의 잇단 핵도발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 행사는 비교적 조용히 치러졌고, 우리 정부는 민간 차원의 6.15 공동선언 남북 공동행사를 올해도 불허했습니다.

<녹취> 北 정부,정당,단체 연석회의 호소문(지난 10일) : "북남관계와 조국 통일 위업 수행에서 획기적 전환을 일으켜나가려는 절절한 염원으로부터 조국해방 71돐을 맞으며 전 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지난 주 정부와 정당, 단체의 이름으로 전례 없는 소위 통일대회합을 열자고 제안했던 북한 역시, 6.15 공동선언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공개 행사 없이 매체를 동원한 선전전만 폈습니다.

<녹취>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대변인담화(지난 16일) : "북남 공동선언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해내외 각계각층 단체들과 굳게 연대 연합하여 반통일 세력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지 16년이 흐른 지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올들어 북한의 잇단 핵과 미사일 도발로 남북 협력관계는 사실상 중단됐고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진행 중입니다.

북한은 김정은이 3대 권력세습을 완성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먼저 지난 2천년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았습니다.

<녹취> 김대중 전 대통령(2000년 6월 15일) : "공동성명에 대해서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이틀 뒤인 6월 15일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습니다.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측 연합제와 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이산가족 상봉 등을 담았습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끊겼던 철도와 도로도 복구해 경의선과 동해선으로 연결했으며,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첫 삽을 떴습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정상회담 그 자체는 결국 실질적인 대결에서 평화, 또 대화를 통해서 뭔가 한반도 문제, 남북 간 문제를 풀고자, 그런 의지를 명확하게 보이는 그런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그런 회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선언 가운데,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조항은 이념 논란을 낳았고, 현 정부도 당시 남북이 통일방안에 합의했던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녹취> 홍용표 통일부 장관(2015년 12월 관훈클럽 토론회) :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받아들일 수는 당연히 없는 거고요. 우리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통일 문제를 계속 추진해 나가고..."

더욱이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으로 불거진 2차 북핵 위기에 이어,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6.15 공동선언으로 상징되는 햇볕정책은 소위 퍼주기 논란과 함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황장엽(前 노동당 비서/2010년 10월 KBS 특별기획) : "(햇볕정책이) 북한이 되살아나고 지금 같이 이렇게 더 못되게 나올 수 있는 데는 영향을 줬을 수는 있지만 좋게 나가는 데는 영향을 준 게 없다고 봐요. 말하자면 옷을 벗기지 못했다. 독재의 옷이라고 하는 것은 원조를 줄수록 더 두꺼워집니다."

2천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2007년 2차 정상회담이 성사됐지만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논의가 오가기도 했는데요.

한편에선 회담을 위한 뒷거래나 도발에 면죄부를 주는 회담은 안 된다는 신중론도 제기돼왔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움직임과 논의들을 정리했습니다.

2007년 10월, 육로로 휴전선을 넘은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10.4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임기를 불과 넉 달 남긴 대통령의 평양행.

떠나기 전부터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둘러싼 발언의 내용과 진위가 훗날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2008년도에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는데 2007년 10월에 정상회담을 하게 됐죠. 그러다보니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꿈은 이루려고 했지만 이룰 수 있는 시기도 없었고 남북이 실질적으로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의도가 있었는지도 지금 생각하면 다시 되새김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핵개방 3000’ 즉, 먼저 핵을 폐기하면 북한의 경제개발을 돕겠다던 이명박 정부 동안 남북관계는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녹취> 2008년 7월 11일 KBS 9시 뉴스 :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50대 여성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금강산 피격에 이어 2009년 2차 핵실험,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도발 등 잇단 북한의 도발에 정부가 5.24 대북제재로 맞대응하면서 남북 협력은 크게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색 국면에도 정상 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이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조문단이 김정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모두 5차례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북한이 거액을 대가로 요구해 결국 무산됐다는 게 당시 핵심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태효(前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2015년 1월) : "북한이 먼저 원했고, 그쪽에서 먼저 타진을 했던 것인데, 결국 요구조건을 들어보니 내용은 좀 다르지만 성질은 그 이전의 두 차례 정상회담과 같더라는 것이죠."

지난 2002년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했습니다.

5년 뒤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당시를 회상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습니다.

<녹취> 박근혜(당시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2002년 5월) : '(김정일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라 발전시키신 데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아버지 시대 때 극한적으로 대결했던 그런 것을 상기해 볼 때 저는 참 놀랐습니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박대통령은 실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발표하며 북한 김정은 정권과의 대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올 초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한 뒤, 개성공단이 폐쇄됐고 국제사회는 강력한 대북제재에 돌입했습니다.

지난 해 한때 탄력을 받았던 현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논의는 수면 아래로 잠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남북 정상회담의 관건은 역시 북핵이었습니다.

비록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은 됐지만 지난 94년 김영삼 김일성 두 정상의 회담 합의는 1차 북핵 위기를 넘기면서 계기를 맞았습니다.

2000년 첫 정상회담도 제네바 합의 이후 어느 정도 북핵 문제가 진정됐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가능했습니다.

2007년 정상회담도 역시 북핵 문제가 주요 변수였습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는 별도의 트랙으로 다룬다, 별개로 다루자 라고 하면서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죠."

지금도 핵 도발을 이어가며 핵, 경제 병진 노선을 강행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일단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녹취> 제20대 국회 개원식(지난 13일) : "성급히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대화에 나서서 모처럼 형성된 국제사회 대북제재 모멘텀을 놓친다면 북한 비핵화의 길은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비핵화를 담보하기 위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우선이란 설명입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비핵화에 대해서 북한이 명확하게 선언을 한달지, 또는 핵의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조치 또는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복귀나 이런 것들을 북한이 먼저 선조치를 한다면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비핵화 국제공조가 물론 중요하지만, 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남과 북 스스로의 적극적인 고민과 행동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합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반도의 평화 통일, 자주적인 통일을 우리는 지지한다, 이거는 주변국가들 모두의 공통된 말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결국 통일의 가능성,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주도권을 쥐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나간다는 의지를 보여야만 우리 문제는 우리가 풀 수 있습니다."

잇단 핵 도발을 감행한 북한을 국제사회가 강력한 공조로 압박하는 국면이지만, 돌발 상황에 대비한 최소한의 남북 대화 채널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남과 북 정상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그에 따른 6.15 공동선언은 그래서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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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6-06-18 23:15:16
    남북의 창
<앵커 멘트>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성원입니다, 엄지인입니다.

6월 18일 토요일 <남북의 창>입니다.

오늘 준비한 주요 소식부터 보시겠습니다.

지난 15일은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지 16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 성사를 떠나 추진 의사만 밝혀도 정국 최대의 현안이 될 정도로 국민들에겐 늘 커다란 관심거리였는데요.

그만큼 역대 대통령들에게 큰 유혹이기도 했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6.15 남북공동선언 16주년을 계기로 그동안의 정상회담 논의를 살펴보고 북핵에 막힌 남북관계를 고민해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맹유나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6.15 남북공동선언 16주년이자 1차 연평해전 17주년이었던 지난 15일.

새누리당 지도부는 공군 부대를 찾아 연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며 확고한 안보관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김희옥(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 "(1차 연평해전) 1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이 있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어젯밤에도 단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같은 날, 더불어 민주당 지도부가 임진각을 찾는 등 야당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계승에 방점을 뒀습니다.

<녹취> 김종인(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 "(6.15) 16주년을 맞아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남북 관계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야의 시선과 행보가 엇갈린 6.15.

북한의 잇단 핵도발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 행사는 비교적 조용히 치러졌고, 우리 정부는 민간 차원의 6.15 공동선언 남북 공동행사를 올해도 불허했습니다.

<녹취> 北 정부,정당,단체 연석회의 호소문(지난 10일) : "북남관계와 조국 통일 위업 수행에서 획기적 전환을 일으켜나가려는 절절한 염원으로부터 조국해방 71돐을 맞으며 전 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지난 주 정부와 정당, 단체의 이름으로 전례 없는 소위 통일대회합을 열자고 제안했던 북한 역시, 6.15 공동선언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공개 행사 없이 매체를 동원한 선전전만 폈습니다.

<녹취>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대변인담화(지난 16일) : "북남 공동선언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해내외 각계각층 단체들과 굳게 연대 연합하여 반통일 세력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지 16년이 흐른 지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올들어 북한의 잇단 핵과 미사일 도발로 남북 협력관계는 사실상 중단됐고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진행 중입니다.

북한은 김정은이 3대 권력세습을 완성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먼저 지난 2천년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지난 2000년 6월 13일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았습니다.

<녹취> 김대중 전 대통령(2000년 6월 15일) : "공동성명에 대해서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이틀 뒤인 6월 15일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습니다.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측 연합제와 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이산가족 상봉 등을 담았습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끊겼던 철도와 도로도 복구해 경의선과 동해선으로 연결했으며,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첫 삽을 떴습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정상회담 그 자체는 결국 실질적인 대결에서 평화, 또 대화를 통해서 뭔가 한반도 문제, 남북 간 문제를 풀고자, 그런 의지를 명확하게 보이는 그런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그런 회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선언 가운데,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조항은 이념 논란을 낳았고, 현 정부도 당시 남북이 통일방안에 합의했던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녹취> 홍용표 통일부 장관(2015년 12월 관훈클럽 토론회) :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받아들일 수는 당연히 없는 거고요. 우리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통일 문제를 계속 추진해 나가고..."

더욱이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으로 불거진 2차 북핵 위기에 이어,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6.15 공동선언으로 상징되는 햇볕정책은 소위 퍼주기 논란과 함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황장엽(前 노동당 비서/2010년 10월 KBS 특별기획) : "(햇볕정책이) 북한이 되살아나고 지금 같이 이렇게 더 못되게 나올 수 있는 데는 영향을 줬을 수는 있지만 좋게 나가는 데는 영향을 준 게 없다고 봐요. 말하자면 옷을 벗기지 못했다. 독재의 옷이라고 하는 것은 원조를 줄수록 더 두꺼워집니다."

2천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2007년 2차 정상회담이 성사됐지만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논의가 오가기도 했는데요.

한편에선 회담을 위한 뒷거래나 도발에 면죄부를 주는 회담은 안 된다는 신중론도 제기돼왔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움직임과 논의들을 정리했습니다.

2007년 10월, 육로로 휴전선을 넘은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10.4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임기를 불과 넉 달 남긴 대통령의 평양행.

떠나기 전부터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둘러싼 발언의 내용과 진위가 훗날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2008년도에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는데 2007년 10월에 정상회담을 하게 됐죠. 그러다보니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꿈은 이루려고 했지만 이룰 수 있는 시기도 없었고 남북이 실질적으로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의도가 있었는지도 지금 생각하면 다시 되새김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핵개방 3000’ 즉, 먼저 핵을 폐기하면 북한의 경제개발을 돕겠다던 이명박 정부 동안 남북관계는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녹취> 2008년 7월 11일 KBS 9시 뉴스 :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50대 여성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금강산 피격에 이어 2009년 2차 핵실험,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도발 등 잇단 북한의 도발에 정부가 5.24 대북제재로 맞대응하면서 남북 협력은 크게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색 국면에도 정상 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이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조문단이 김정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모두 5차례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북한이 거액을 대가로 요구해 결국 무산됐다는 게 당시 핵심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태효(前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2015년 1월) : "북한이 먼저 원했고, 그쪽에서 먼저 타진을 했던 것인데, 결국 요구조건을 들어보니 내용은 좀 다르지만 성질은 그 이전의 두 차례 정상회담과 같더라는 것이죠."

지난 2002년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했습니다.

5년 뒤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당시를 회상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습니다.

<녹취> 박근혜(당시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2002년 5월) : '(김정일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라 발전시키신 데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아버지 시대 때 극한적으로 대결했던 그런 것을 상기해 볼 때 저는 참 놀랐습니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박대통령은 실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발표하며 북한 김정은 정권과의 대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올 초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한 뒤, 개성공단이 폐쇄됐고 국제사회는 강력한 대북제재에 돌입했습니다.

지난 해 한때 탄력을 받았던 현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논의는 수면 아래로 잠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남북 정상회담의 관건은 역시 북핵이었습니다.

비록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은 됐지만 지난 94년 김영삼 김일성 두 정상의 회담 합의는 1차 북핵 위기를 넘기면서 계기를 맞았습니다.

2000년 첫 정상회담도 제네바 합의 이후 어느 정도 북핵 문제가 진정됐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가능했습니다.

2007년 정상회담도 역시 북핵 문제가 주요 변수였습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는 별도의 트랙으로 다룬다, 별개로 다루자 라고 하면서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죠."

지금도 핵 도발을 이어가며 핵, 경제 병진 노선을 강행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일단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녹취> 제20대 국회 개원식(지난 13일) : "성급히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대화에 나서서 모처럼 형성된 국제사회 대북제재 모멘텀을 놓친다면 북한 비핵화의 길은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비핵화를 담보하기 위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우선이란 설명입니다.

<인터뷰> 김용현(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비핵화에 대해서 북한이 명확하게 선언을 한달지, 또는 핵의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조치 또는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복귀나 이런 것들을 북한이 먼저 선조치를 한다면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비핵화 국제공조가 물론 중요하지만, 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남과 북 스스로의 적극적인 고민과 행동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합니다.

<인터뷰> 김영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반도의 평화 통일, 자주적인 통일을 우리는 지지한다, 이거는 주변국가들 모두의 공통된 말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결국 통일의 가능성,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주도권을 쥐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나간다는 의지를 보여야만 우리 문제는 우리가 풀 수 있습니다."

잇단 핵 도발을 감행한 북한을 국제사회가 강력한 공조로 압박하는 국면이지만, 돌발 상황에 대비한 최소한의 남북 대화 채널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남과 북 정상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그에 따른 6.15 공동선언은 그래서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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