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연속 수상, 150년 일본과학의 저력

입력 2016.10.16 (22:41) 수정 2016.10.1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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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이곳은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쿄공업대학입니다.

일본은 2천년대 들어 자연과학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17명이나 배출했습니다.

그중 한명을 제외하곤 모두 일본에서 학위를 받은 국내파 연구자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기초과학분야에서 꾸준히 세계최고수준의 연구력을 유지하며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일본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리포트>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입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생물학자입니다.

생물체의 세포가 스스로 불필요한 단백질을 분해해 재활용하는 이른바 '오토파지' 작용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제가 오토파지 연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생물학자로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1980년대 처음 자신의 연구실을 갖게 된 오스미 교수는 당시 연구자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던 오토파지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도전하는 것이 바로 과학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3만 8천종이 넘는 효모의 단백질 분해 현상에 끈질기게 매달린 오스미 교수는 오토파지에 직접 관여하는 14 가지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암과 치매 등 난치병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연 그의 성과는 자신만의 연구에 30년 세월을 바친 그야말로 열정의 결실이었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젊은 연구자들이 스스로 호기심이 생기거나 재미있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파고 들어 연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스미 교수가 자신이 호기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긴 시간 한우물을 파는 게 가능했던 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긴 안목 덕분입니다.

일본정부는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하고 이듬해부터 5년 단위로 장기 발전계획을 추진해왔습니다.

특히 실용성과 관계 없이 다양한 분야의 창의적 연구를 지원하는 문부과학성의 과학연구비 제도가 기초과학 육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96년 1018억엔, 우리돈 1조 천 백억원이던 과학연구비 예산은 그 동안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엔 2조5천3백억원으로 늘었습니다.

오스미 교수도 1980년대 연구 초기부터 과학연구비를 지원받아 장기간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녹취> 오바라(홋카이도대학 교수) : "연구자들이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하나 자신의 성과를 쌓아가기 위해선 지원제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장기지원이 노벨상 결실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는 물리학 분야입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 교수가 중간자 연구로 첫 노벨상을 받은 후 일본은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만 무려 6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도쿄대 가지타 다카키 교수는 2002년 수상자인 스승 고시바 교수의 뒤를 이어 중성미자 연구로 상을 받았습니다.

<녹취> 가지타(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인류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순수 과학 분야의 성과가 빛을 보게 돼 매우 기쁩니다."

일본이 소립자 분야에서 내고 있는 경이로운 성과는 일본 기후 현의 한 광산 지하 천m에 설치된 초대형 관측시설 ‘슈퍼 가미오칸데’가 토대가 됐습니다.

1996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완공된 이 실험시설에서 스승 고시바 교수가 처음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제자인 가지타 교수는 중성미자에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해 노벨상을 받은 겁니다.

<녹취> 가지타(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슈퍼 가미오칸테에서 100명이 넘는 연구팀이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통해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1901년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일본인 수상자는 모두 25명, 그 가운데 물리학과 화학, 생리의학 등 자연과학 세 분야가 22명입니다.

특히 2천년 이후 17명의 자연과학 수상자를 배출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습니다.

<녹취> 마츠노(일본 문부과학상) : "최근 연이은 노벨상 수상은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과 두터운 연구층을 입증하는 큰 성과입니다."

1854년 개국과 함께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특히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1860년대부터 서양에 유학생을 보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 것이 일본 근대 과학의 뿌리가 됐습니다.

일본이 잇따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건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이런 오랜 전통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통 속에 일본은 특정분야나 지역에 집중되지 않는 두터운 연구층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각 지방의 국공립 대학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비의 절반 이상을 기초과학 분야에 폭넓게 지원해 연구저변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2천년이후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박사학위를 받은 출신대학을 보면 나고야대를 비롯한 지방대학들이 여럿 포함돼 있습니다.

201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스즈키 아키라 교수는 국립 홋카이도 대학 출신입니다.

<녹취> 스즈키(201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학생들에게 늘 남들과 다른 연구에 도전하라고 얘기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다보면 운도 따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복잡한 유기화합물을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합성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스즈키 반응’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액정 화면 원료에서 신약 개발까지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습니다.

연구의 바탕이 된 것은 역시 일본 정부가 지방대학에 지급하는 과학연구비였습니다.

<녹취> 스즈키(201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자원이 없는 일본이 가진 것은 사람 뿐입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 일본이 살 길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만 성과를 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언뜻 기초과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지방 기업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들도 노벨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산업용 계측장비를 생산하는 교토 기업 <시마즈 제작소>의 평범한 연구원인 다나카 고이치 씨가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돼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녹취> 다나카(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일본의 과학기술이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사학위가 없는 그였지만 회사 연구실의 레이저를 이용해 고분자 단백질의 종류와 양을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성공 뒤엔 상품개발과 직접 관계 없는 연구 프로젝트를 장기간 지원한 회사 측의 배려와 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색 LED를 실용화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 슈지 씨도 직원 3백명이 일하는 도쿠시마 지방기업 <니치아 화학>의 연구원이었습니다.

<녹취> 나카무라(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저는 태어나서 고향 주변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도쿠시마 대학을 졸업한 후 지방 중소기업에 취직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 후 그는 지방 기업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한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며,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고 투자해준 회사에 감사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 지원은 노벨상 수상 뿐 아니라 국가 전략산업 육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토대학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유도만능줄기세포, IPS 연구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원래 정형외과 의사였던 그는 수술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다 1990년대 중반 기초의학 분야로 진로를 바꿔 완전히 새로운 연구를 시작합니다.

<녹취> 야마나카(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인생에서나 실험실에서나 여러번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아 상태에서 분화해 일단 성숙한 세포를 다시 처음 줄기세포 상태로 되돌려 다양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가설은 생물학의 기존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연구의 잠재적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과학연구비를 장기간 지원했습니다.

그 덕분에 야마나카 교수는 피부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향후 다양한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유도만능줄기 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해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녹취> 야마나카 신야(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세계의 난치병 환자들에게 일본이 만든 치료약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앞으로 연구를 계속하겠습니다."

일본에선 현재 환자 자신의 체세포로 IPS를 만들어 인체의 손상된 조직을 재생시키는 다양한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성장 가능성에 주목한 일본 정부는 IPS를 활용한 재생의학 분야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해 집중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벨상 수상자를 잇따라 배출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최근엔 기초과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 영향력을 가늠하는 논문 인용 수가 일본은 2004년 전체의 9.1%로 세계 4위에서 2014년엔 6.3%, 세계 10위로 하락했습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오스미 교수는 이같은 현실이 당장 활용 가능한 산업응용 연구를 중시하는 흐름과 관계가 깊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일본의 기초과학이 공동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스미 교수는 자신의 노벨상 상금 약 10억원에 협찬금을 더해 기초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을 돕는 지원재단을 세우겠다고 밝혔습니다.

150년 넘는 긴 역사를 거치며 기초 과학의 토대를 다져온 일본은 당면한 어려움을 넘어 20년후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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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상 연속 수상, 150년 일본과학의 저력
    • 입력 2016-10-16 22:50:15
    • 수정2016-10-16 23: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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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이곳은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쿄공업대학입니다.

일본은 2천년대 들어 자연과학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17명이나 배출했습니다.

그중 한명을 제외하곤 모두 일본에서 학위를 받은 국내파 연구자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기초과학분야에서 꾸준히 세계최고수준의 연구력을 유지하며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일본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리포트>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입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생물학자입니다.

생물체의 세포가 스스로 불필요한 단백질을 분해해 재활용하는 이른바 '오토파지' 작용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제가 오토파지 연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생물학자로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1980년대 처음 자신의 연구실을 갖게 된 오스미 교수는 당시 연구자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던 오토파지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도전하는 것이 바로 과학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3만 8천종이 넘는 효모의 단백질 분해 현상에 끈질기게 매달린 오스미 교수는 오토파지에 직접 관여하는 14 가지 유전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암과 치매 등 난치병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연 그의 성과는 자신만의 연구에 30년 세월을 바친 그야말로 열정의 결실이었습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젊은 연구자들이 스스로 호기심이 생기거나 재미있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파고 들어 연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스미 교수가 자신이 호기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긴 시간 한우물을 파는 게 가능했던 건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긴 안목 덕분입니다.

일본정부는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하고 이듬해부터 5년 단위로 장기 발전계획을 추진해왔습니다.

특히 실용성과 관계 없이 다양한 분야의 창의적 연구를 지원하는 문부과학성의 과학연구비 제도가 기초과학 육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96년 1018억엔, 우리돈 1조 천 백억원이던 과학연구비 예산은 그 동안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엔 2조5천3백억원으로 늘었습니다.

오스미 교수도 1980년대 연구 초기부터 과학연구비를 지원받아 장기간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녹취> 오바라(홋카이도대학 교수) : "연구자들이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하나 자신의 성과를 쌓아가기 위해선 지원제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장기지원이 노벨상 결실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는 물리학 분야입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 교수가 중간자 연구로 첫 노벨상을 받은 후 일본은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만 무려 6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도쿄대 가지타 다카키 교수는 2002년 수상자인 스승 고시바 교수의 뒤를 이어 중성미자 연구로 상을 받았습니다.

<녹취> 가지타(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인류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순수 과학 분야의 성과가 빛을 보게 돼 매우 기쁩니다."

일본이 소립자 분야에서 내고 있는 경이로운 성과는 일본 기후 현의 한 광산 지하 천m에 설치된 초대형 관측시설 ‘슈퍼 가미오칸데’가 토대가 됐습니다.

1996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완공된 이 실험시설에서 스승 고시바 교수가 처음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제자인 가지타 교수는 중성미자에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해 노벨상을 받은 겁니다.

<녹취> 가지타(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슈퍼 가미오칸테에서 100명이 넘는 연구팀이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통해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1901년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일본인 수상자는 모두 25명, 그 가운데 물리학과 화학, 생리의학 등 자연과학 세 분야가 22명입니다.

특히 2천년 이후 17명의 자연과학 수상자를 배출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습니다.

<녹취> 마츠노(일본 문부과학상) : "최근 연이은 노벨상 수상은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과 두터운 연구층을 입증하는 큰 성과입니다."

1854년 개국과 함께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특히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1860년대부터 서양에 유학생을 보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 것이 일본 근대 과학의 뿌리가 됐습니다.

일본이 잇따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건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이런 오랜 전통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통 속에 일본은 특정분야나 지역에 집중되지 않는 두터운 연구층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각 지방의 국공립 대학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비의 절반 이상을 기초과학 분야에 폭넓게 지원해 연구저변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2천년이후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박사학위를 받은 출신대학을 보면 나고야대를 비롯한 지방대학들이 여럿 포함돼 있습니다.

201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스즈키 아키라 교수는 국립 홋카이도 대학 출신입니다.

<녹취> 스즈키(201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학생들에게 늘 남들과 다른 연구에 도전하라고 얘기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다보면 운도 따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복잡한 유기화합물을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합성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스즈키 반응’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액정 화면 원료에서 신약 개발까지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습니다.

연구의 바탕이 된 것은 역시 일본 정부가 지방대학에 지급하는 과학연구비였습니다.

<녹취> 스즈키(201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자원이 없는 일본이 가진 것은 사람 뿐입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 일본이 살 길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만 성과를 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언뜻 기초과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지방 기업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들도 노벨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산업용 계측장비를 생산하는 교토 기업 <시마즈 제작소>의 평범한 연구원인 다나카 고이치 씨가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돼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녹취> 다나카(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 "일본의 과학기술이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사학위가 없는 그였지만 회사 연구실의 레이저를 이용해 고분자 단백질의 종류와 양을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성공 뒤엔 상품개발과 직접 관계 없는 연구 프로젝트를 장기간 지원한 회사 측의 배려와 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청색 LED를 실용화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 슈지 씨도 직원 3백명이 일하는 도쿠시마 지방기업 <니치아 화학>의 연구원이었습니다.

<녹취> 나카무라(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저는 태어나서 고향 주변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도쿠시마 대학을 졸업한 후 지방 중소기업에 취직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 후 그는 지방 기업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한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며,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고 투자해준 회사에 감사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 지원은 노벨상 수상 뿐 아니라 국가 전략산업 육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토대학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유도만능줄기세포, IPS 연구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원래 정형외과 의사였던 그는 수술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다 1990년대 중반 기초의학 분야로 진로를 바꿔 완전히 새로운 연구를 시작합니다.

<녹취> 야마나카(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인생에서나 실험실에서나 여러번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아 상태에서 분화해 일단 성숙한 세포를 다시 처음 줄기세포 상태로 되돌려 다양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가설은 생물학의 기존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연구의 잠재적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과학연구비를 장기간 지원했습니다.

그 덕분에 야마나카 교수는 피부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향후 다양한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유도만능줄기 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해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녹취> 야마나카 신야(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세계의 난치병 환자들에게 일본이 만든 치료약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앞으로 연구를 계속하겠습니다."

일본에선 현재 환자 자신의 체세포로 IPS를 만들어 인체의 손상된 조직을 재생시키는 다양한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성장 가능성에 주목한 일본 정부는 IPS를 활용한 재생의학 분야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해 집중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벨상 수상자를 잇따라 배출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최근엔 기초과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 영향력을 가늠하는 논문 인용 수가 일본은 2004년 전체의 9.1%로 세계 4위에서 2014년엔 6.3%, 세계 10위로 하락했습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오스미 교수는 이같은 현실이 당장 활용 가능한 산업응용 연구를 중시하는 흐름과 관계가 깊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오스미(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 "일본의 기초과학이 공동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스미 교수는 자신의 노벨상 상금 약 10억원에 협찬금을 더해 기초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을 돕는 지원재단을 세우겠다고 밝혔습니다.

150년 넘는 긴 역사를 거치며 기초 과학의 토대를 다져온 일본은 당면한 어려움을 넘어 20년후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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