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군기에 멍들다

입력 2017.04.02 (22:45) 수정 2017.04.0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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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봄철이면 대학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들뜹니다.

신입생 환영회부터 소속감을 다진다는 멤버십 트레이닝, 이른바 MT까지 단체 활동이 이어지는데요.

그와 함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과도한 음주와 행사 참여를 요구하는 강요 문화, 그리고 선후배 서열을 강조하는 군기 문화입니다.

<리포트>

대학생들이 MT 장소로 즐겨 찾는 경기도의 한 펜션 밀집촌.

술을 마시는 벌칙 게임이 한창입니다.

<녹취> "신입생, 마셔!"

선배의 명령에 따라 순서대로 빠르게 술잔을 비웁니다.

신입생에게는 큰 소리로 자기소개도 시킵니다.

<녹취>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술 기운이 오르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술이 더해 갈 수록 분위기는 고조되고….

<녹취> "흑기사! 흑기사!"

방 안에서도 술판은 삼삼오오 이어집니다.

한 대학의 엠티 도중에서만 소주 60병이 빈 병으로 나왔습니다.

<녹취> ○○대학교 학생(음성변조) : "(○○대에서 다 드신거예요? )네. 보통 1병 반에서 2병 정도 생각하고 사온 건데요. 아직 좀 남은 걸로…."

밤이 깊어지자 술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뜁니다.

<녹취> "야, 이 XXX야! 이거 뭐지 이러면서 '빵' 할거야."

<녹취> △△대학교 학생(음성변조) : "저희는 소맥도 먹고, 양주도 사와가지고 양주도 먹고 테킬라랑…. 애들 취해가지고 노래 불러요."

도로 아래로 관광버스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대학 신입생 40여 명이 다치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취소됐습니다.

그런데 교육 당국의 조사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행사용으로 무려 소주 7800병, 맥주 960병이 준비됐던 겁니다.

1인당 소주 4~5병 꼴입니다.

이렇게 대학 생활 출발부터 강요되는 과도한 음주, 대학생들의 생각은 어떨까?

<인터뷰> 김남경(대학생) : "선배님들이 권해주는 술이다 보니까 그 술을 자기가 분위기를 맞추려면 또 마셔야 되고…. 즐거운 부분보다 힘든 부분이 많으니까 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선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억지로 마셔야 하고 불쾌한 일을 겪을 때도 있다보니 달갑지 않다는 겁니다.

<인터뷰> 권솔비(대학생) : "술 많이 취하시면 좀 야한 농담 이런 걸 하시는 것 같아요. 여자가 술을 따라야지 이런 마인드가 술 많이 취하면 아직까지는 있는 것 같아요."

단체 활동의 재미를 더한다는 게임에서도 문제가 잇따릅니다.

지난달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 간호학과 여대생은 과자 빨리 먹기 게임을 하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화장실로 뛰어 나갔습니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시간 만에 숨졌습니다.

<녹취> 경찰 관계자(음성변조) : "일차적으로 저희 검시의 소견으로는 초코과자로 인한 질식 소견으로 봐야 하는데…."

그런데도 학생들이 학과 행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대학의 학생회 측이 보낸 문자 메시집니다. 신입생 환영회 참가비는 5만 원.

불참자는 7만 원을 내라는 통봅니다.

<녹취> 재학생(음성변조) :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 불참비를 걷는다 이런 명목이라고 하는데 일단 참가를 하든 불참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잖아요."

학생회에 항의하고 교육부에 민원을 제기해 얻은 답변은 불참비를 돌려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녹취> 재학생(음성변조) : "학생회 일은 교칙에 따라서 학생 자치이기 때문에 그쪽에 답변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 밖에 안 왔어요."

<녹취> "하나, 둘, 셋, 넷!"

강원도의 한 리조트, 대학생 수십 명이 꼭두새벽부터 얼차려에 가까운 팔벌려뛰기를 하고 있습니다.

<녹취> "한 명이 힘들어서 그만두면, 너네 동기들이 힘들어. 알겠어? (네!)"

선배의 지시에 후배들은 바로 복종합니다.

수도권 한 대학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깬 투숙객들의 항의도 이어집니다.

<녹취> "아니 여기가 학교 운동장이냐고!"

학교 측은 해당 학과 특성에 따른 일이라면서도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녹취> 대학 관계자(음성변조) : "해양과 애들은 해양 실습을 나가요. 배를 타요. 그래서 배 타기 전에 반드시 운동을 하고 들어가서…. 학생이 진짜 아무 생각없이 그거는 진짜 잘못하긴 했어요."

지난달(3월) 말, 복학생의 적응을 돕는다는 한 대학의 복학생 협의회 술자리 사진이 SNS에 올라왔습니다.

부동 자세로 군대식 신고식을 하고 술을 먹이기도 했다는 목격담이 나왔습니다.

신입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선배로부터 각종 행동 수칙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수도권 한 대학 항공관광과의 신입생 행동 수칙입니다

신입생이 먼저 관등성명을 밝히고 극존칭을 쓸 것, 선배 이름을 거명하지 말 것 등 군대를 연상케 합니다.

신입생의 입학 포부를 담은 메시지에는 답장이 늦다고 면박을 주고, 이모티콘을 빼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오프라인의 군기잡기는 모바일 시대 SNS로도 옮겨가고 있습니다.

선배의 글에 댓글과 '좋아요'를 재빨리 달아 충성을 표현해야합니다.

이렇게 대학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강요와 상명 하복식 군대 문화의 연원은 뿌리 깊습니다.

<인터뷰>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군부 독재가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군기를 잡거나 계급장처럼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민주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의 위 아래 문화라는 걸 몸으로 익히게끔 요구받거나 그런 규범으로 그들 스스로가 내면화 돼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거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선배들한테 여러 가지 학습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시대가 변했지만 집단 통제를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속성은 대물림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김형남(군인권센터 상담팀장) : "학생들 사이에선 학번을 통해서 위계 질서가 형성되는 건데 전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사람 간의 관계 형성이 아니고, 이미 주어져 있는 계급을 통해서 '내가 까라면 까' 이런 식의 굉장히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녹취> KBS 뉴스 9(1994년 3월) : "엉겁결에 받아든 술. 한 신입생이 냉면 사발에 받아든 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코피를 쏟아냅니다. 속이 뒤틀려 먹은 것을 토해냅니다. 그러면서도 받아든 술은 다 비워야 합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통과 의례처럼 내려오던 신입생 사발식을 후배들이 스스로 바꿨습니다.

<녹취> 최용찬(졸업생) : "시대가 많이 변했죠. 사발식도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니고 의미만 가져가시면 되고요."

선배들과 대면한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녹취> "17학번 박연수 여러분 앞에 당차게 인사드립니다!"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적인 방식의 자기 소개가 끝나고,

<녹취> "선배님들 세 분이 나와서 막걸리 따라주고 한 잔씩 받아서 여기 쓰레기통에 뱉어 주시면 됩니다."

드디어 사발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발 대신 종이컵에 막걸리를 받고, 바로 마시지도 않습니다.

차례로 막걸리를 입에 머금더니 삼키지 않고, 모두 뱉어냅니다.

<인터뷰> 정지수(신입생) : "양을 많이 안 주시고 의미를 살려서 입안 헹군 다음에 뱉는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80명 넘는 신입생이 모였지만 준비한 막걸리는 20여 병, 입에 머금기도 불편한 학생을 위해선 쌀음료까지 준비됐습니다.

신입생들의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선배와 한층 가까워진 것을 느낍니다.

<인터뷰> 송명하(신입생) : "사실은 입학할 때 좀 무서웠는데 편한 분위기라서 부담도 없고 의미있는 행사인 것 같아요."

또 다른 대학도 술을 강권하던 문화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선배들이 술을 강요하시면 팔찌 보여주시면 돼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 착용하는 인권팔찌입니다.

한 대학의 인권센터가 이 팔찌 5천개를 만들어 각 학과에 배포했습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

<인터뷰> 배병준(동국대 재학생) :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보여만 주면 술을 주지 않는 식으로…. 실제로 신입생들도 10~20%가량 착용을 했고 그래서 술로 인한 인권 침해나 인권 문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음주를 자제하고 사고 우려가 적은 게임 위주로 행사를 준비해 사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합니다.

<녹취> 신입생 환영회 참가자 : "저희 완전 건전하게 놀아요. 팀 나눠서 '몸으로 말해요' 이런 거 하고."

SNS가 발달하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대나무숲'도 인터넷으로 옮겨졌습니다.

익명으로 대학 문화의 병폐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면서 대학생들의 문제 의식도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취업 경쟁이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인권 교육의 중요성도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민주주의의 가치, 그리고 인권, 또 상대방의 서로 간에 공존할 수 있는 소통이라든가 존중할 수 있는 그런 식의 교육, 교양 학습을 받아두는 것도 이런 변화에 큰 도움이 되겠죠."

신학기만 되면 고개를 들며 대물림되는 대학가의 신입생 군기 잡기….

아직도 과거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대학가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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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내기, 군기에 멍들다
    • 입력 2017-04-02 22:54:58
    • 수정2017-04-02 23:15:24
    취재파일K
<프롤로그>

봄철이면 대학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들뜹니다.

신입생 환영회부터 소속감을 다진다는 멤버십 트레이닝, 이른바 MT까지 단체 활동이 이어지는데요.

그와 함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과도한 음주와 행사 참여를 요구하는 강요 문화, 그리고 선후배 서열을 강조하는 군기 문화입니다.

<리포트>

대학생들이 MT 장소로 즐겨 찾는 경기도의 한 펜션 밀집촌.

술을 마시는 벌칙 게임이 한창입니다.

<녹취> "신입생, 마셔!"

선배의 명령에 따라 순서대로 빠르게 술잔을 비웁니다.

신입생에게는 큰 소리로 자기소개도 시킵니다.

<녹취>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술 기운이 오르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술이 더해 갈 수록 분위기는 고조되고….

<녹취> "흑기사! 흑기사!"

방 안에서도 술판은 삼삼오오 이어집니다.

한 대학의 엠티 도중에서만 소주 60병이 빈 병으로 나왔습니다.

<녹취> ○○대학교 학생(음성변조) : "(○○대에서 다 드신거예요? )네. 보통 1병 반에서 2병 정도 생각하고 사온 건데요. 아직 좀 남은 걸로…."

밤이 깊어지자 술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뜁니다.

<녹취> "야, 이 XXX야! 이거 뭐지 이러면서 '빵' 할거야."

<녹취> △△대학교 학생(음성변조) : "저희는 소맥도 먹고, 양주도 사와가지고 양주도 먹고 테킬라랑…. 애들 취해가지고 노래 불러요."

도로 아래로 관광버스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대학 신입생 40여 명이 다치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취소됐습니다.

그런데 교육 당국의 조사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행사용으로 무려 소주 7800병, 맥주 960병이 준비됐던 겁니다.

1인당 소주 4~5병 꼴입니다.

이렇게 대학 생활 출발부터 강요되는 과도한 음주, 대학생들의 생각은 어떨까?

<인터뷰> 김남경(대학생) : "선배님들이 권해주는 술이다 보니까 그 술을 자기가 분위기를 맞추려면 또 마셔야 되고…. 즐거운 부분보다 힘든 부분이 많으니까 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선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억지로 마셔야 하고 불쾌한 일을 겪을 때도 있다보니 달갑지 않다는 겁니다.

<인터뷰> 권솔비(대학생) : "술 많이 취하시면 좀 야한 농담 이런 걸 하시는 것 같아요. 여자가 술을 따라야지 이런 마인드가 술 많이 취하면 아직까지는 있는 것 같아요."

단체 활동의 재미를 더한다는 게임에서도 문제가 잇따릅니다.

지난달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 간호학과 여대생은 과자 빨리 먹기 게임을 하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화장실로 뛰어 나갔습니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시간 만에 숨졌습니다.

<녹취> 경찰 관계자(음성변조) : "일차적으로 저희 검시의 소견으로는 초코과자로 인한 질식 소견으로 봐야 하는데…."

그런데도 학생들이 학과 행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대학의 학생회 측이 보낸 문자 메시집니다. 신입생 환영회 참가비는 5만 원.

불참자는 7만 원을 내라는 통봅니다.

<녹취> 재학생(음성변조) :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 불참비를 걷는다 이런 명목이라고 하는데 일단 참가를 하든 불참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잖아요."

학생회에 항의하고 교육부에 민원을 제기해 얻은 답변은 불참비를 돌려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녹취> 재학생(음성변조) : "학생회 일은 교칙에 따라서 학생 자치이기 때문에 그쪽에 답변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 밖에 안 왔어요."

<녹취> "하나, 둘, 셋, 넷!"

강원도의 한 리조트, 대학생 수십 명이 꼭두새벽부터 얼차려에 가까운 팔벌려뛰기를 하고 있습니다.

<녹취> "한 명이 힘들어서 그만두면, 너네 동기들이 힘들어. 알겠어? (네!)"

선배의 지시에 후배들은 바로 복종합니다.

수도권 한 대학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깬 투숙객들의 항의도 이어집니다.

<녹취> "아니 여기가 학교 운동장이냐고!"

학교 측은 해당 학과 특성에 따른 일이라면서도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녹취> 대학 관계자(음성변조) : "해양과 애들은 해양 실습을 나가요. 배를 타요. 그래서 배 타기 전에 반드시 운동을 하고 들어가서…. 학생이 진짜 아무 생각없이 그거는 진짜 잘못하긴 했어요."

지난달(3월) 말, 복학생의 적응을 돕는다는 한 대학의 복학생 협의회 술자리 사진이 SNS에 올라왔습니다.

부동 자세로 군대식 신고식을 하고 술을 먹이기도 했다는 목격담이 나왔습니다.

신입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선배로부터 각종 행동 수칙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수도권 한 대학 항공관광과의 신입생 행동 수칙입니다

신입생이 먼저 관등성명을 밝히고 극존칭을 쓸 것, 선배 이름을 거명하지 말 것 등 군대를 연상케 합니다.

신입생의 입학 포부를 담은 메시지에는 답장이 늦다고 면박을 주고, 이모티콘을 빼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오프라인의 군기잡기는 모바일 시대 SNS로도 옮겨가고 있습니다.

선배의 글에 댓글과 '좋아요'를 재빨리 달아 충성을 표현해야합니다.

이렇게 대학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강요와 상명 하복식 군대 문화의 연원은 뿌리 깊습니다.

<인터뷰>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군부 독재가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군기를 잡거나 계급장처럼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민주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의 위 아래 문화라는 걸 몸으로 익히게끔 요구받거나 그런 규범으로 그들 스스로가 내면화 돼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거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선배들한테 여러 가지 학습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시대가 변했지만 집단 통제를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속성은 대물림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김형남(군인권센터 상담팀장) : "학생들 사이에선 학번을 통해서 위계 질서가 형성되는 건데 전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사람 간의 관계 형성이 아니고, 이미 주어져 있는 계급을 통해서 '내가 까라면 까' 이런 식의 굉장히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녹취> KBS 뉴스 9(1994년 3월) : "엉겁결에 받아든 술. 한 신입생이 냉면 사발에 받아든 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코피를 쏟아냅니다. 속이 뒤틀려 먹은 것을 토해냅니다. 그러면서도 받아든 술은 다 비워야 합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통과 의례처럼 내려오던 신입생 사발식을 후배들이 스스로 바꿨습니다.

<녹취> 최용찬(졸업생) : "시대가 많이 변했죠. 사발식도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니고 의미만 가져가시면 되고요."

선배들과 대면한 신입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녹취> "17학번 박연수 여러분 앞에 당차게 인사드립니다!"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적인 방식의 자기 소개가 끝나고,

<녹취> "선배님들 세 분이 나와서 막걸리 따라주고 한 잔씩 받아서 여기 쓰레기통에 뱉어 주시면 됩니다."

드디어 사발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발 대신 종이컵에 막걸리를 받고, 바로 마시지도 않습니다.

차례로 막걸리를 입에 머금더니 삼키지 않고, 모두 뱉어냅니다.

<인터뷰> 정지수(신입생) : "양을 많이 안 주시고 의미를 살려서 입안 헹군 다음에 뱉는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80명 넘는 신입생이 모였지만 준비한 막걸리는 20여 병, 입에 머금기도 불편한 학생을 위해선 쌀음료까지 준비됐습니다.

신입생들의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선배와 한층 가까워진 것을 느낍니다.

<인터뷰> 송명하(신입생) : "사실은 입학할 때 좀 무서웠는데 편한 분위기라서 부담도 없고 의미있는 행사인 것 같아요."

또 다른 대학도 술을 강권하던 문화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선배들이 술을 강요하시면 팔찌 보여주시면 돼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 착용하는 인권팔찌입니다.

한 대학의 인권센터가 이 팔찌 5천개를 만들어 각 학과에 배포했습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

<인터뷰> 배병준(동국대 재학생) :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보여만 주면 술을 주지 않는 식으로…. 실제로 신입생들도 10~20%가량 착용을 했고 그래서 술로 인한 인권 침해나 인권 문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음주를 자제하고 사고 우려가 적은 게임 위주로 행사를 준비해 사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합니다.

<녹취> 신입생 환영회 참가자 : "저희 완전 건전하게 놀아요. 팀 나눠서 '몸으로 말해요' 이런 거 하고."

SNS가 발달하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대나무숲'도 인터넷으로 옮겨졌습니다.

익명으로 대학 문화의 병폐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면서 대학생들의 문제 의식도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취업 경쟁이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인권 교육의 중요성도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민주주의의 가치, 그리고 인권, 또 상대방의 서로 간에 공존할 수 있는 소통이라든가 존중할 수 있는 그런 식의 교육, 교양 학습을 받아두는 것도 이런 변화에 큰 도움이 되겠죠."

신학기만 되면 고개를 들며 대물림되는 대학가의 신입생 군기 잡기….

아직도 과거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대학가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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