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목 넘어 평화로…판문점의 어제와 오늘

입력 2019.01.05 (08:04) 수정 2019.01.0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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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자세히 소개해드렸는데요.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언급하면서 무엇보다 판문점 선언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지난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환이나 주요 사안에 대한 논의와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 중심에는 늘 판문점이 있었는데요.

남북 분단에서 한반도 평화 안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판문점 남북의창에서는 신년기획으로 판문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전망해 봤습니다.

정은지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군사분계선 앞에 서있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오는 김정은 위원장.

손을 굳게 맞잡은 두 정상이 반가운 인사를 나눕니다.

[문재인 대통령 : "반갑습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대통령께서 이런 자리에 나와서 맞이해주신 데 대해서 정말 감동적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 "여기까지 온 것은, 위원장님 아주 용단이었습니다."]

이어 반세기 남북을 갈라놨던 콘크리트 군사분계선 표식을 넘는 김 위원장.

정전 이후 북한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았습니다.

분단과 대치의 상징이었지만, 2018년, 남과 북을 잇는 길목 역할을 하며 화합과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판문점.

2019년 판문점은 또 어떠한 모습과 의미로 우리와 마주할까요?

남과 북이 둘로 나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던 6.25 전쟁.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1953년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 대표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의 시골마을 널문리.

이곳의 작은 가게 앞에 회담장이 마련됐고, 중국군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판문점이라 불리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판문점 설치 이후에도 남북의 군인들은 판문점 구역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충돌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엔 남북교류의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요, 대표적인 교류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입니다.

[1971년 9월 20일 :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됐으며 이로써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대표들이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

이후 판문점에는 상설연락사무소가 생겼고 남북 직통전화도 개설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7.4 남북 공동 성명까지이어집니다.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 :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자주·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담은 남북 당국의 첫 공식 합의가 이루어진겁니다.

하지만 1976년 8월, 판문점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

공동경비구역 내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살해한 사건.

이른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반도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치달았고, 북미 간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1976년 소위 도끼 만행 사건 이전까지는 JSA 공동경비구역은 UN사령부의 병력과 북한 공산권 병력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요. 열려진 공간이었습니다. 미국이 강경대응을 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유감표명으로 일단락되는 그러니까 사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가장 긴장된 상황은 미루나무 사건 도끼 만행 사건으로 전개가 됐던 미국과 북한 간의 군사적인 대치라고 볼 수 있고요."]

판문점 내에는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콘크리트 턱이 만들어졌고, 남북의 경비 초소가 분리된 것도 이 땝니다.

팽팽하게 대치하게 된 남과 북.

판문점에 돌던 온기도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의 시간 속에서도 판문점엔 늘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흘렀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김녕만씨입니다.

83년부터 93년까지, 판문점 출입기자로 근무했던 그는 당시 판문점의 모습 하나하나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판문점을 통한 남북관계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 할 수 있었는데요,

김녕만 작가가 꺼낸 오래 전 사진 한 장.

한 대의 트럭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습니다.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1984년 서울 쪽과 충청 지역에 큰 홍수가 있었거든요 그때 북측에서 수해 물자를 제공해주겠다는 그런 제의가 있었습니다."]

1984년 8월, 나흘 동안 계속된 집중 호우에 서울·경기에만 9만3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최악의 홍수.

이때 북한이 우리 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 지원을 하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 온겁니다.

김 작가는 바로 이날이 8-90년대 남북관계를 급진전시킨 결정적 순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때 수해물자가 필요한 것 보다도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의미가 컸던 것 같아요."]

실제 남북은 이를 계기로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개최에 합의했고, 이산가족들은 역사적인 첫 상봉을 가졌습니다.

분야별 회담에도 가속도가 붙었는데요,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루어졌고,

[1989년/1차 남북체육회담 : "오늘 회담에서는 쌍방 제가한 유일팀 구성방안에 관한 토의가 시작됐습니다."]

남북 최초의 고위급 회담도 진행됐습니다.

그때마다 판문점은 남과 북을 오가는 관문이자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엔 우리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죠.

북한 통일전선부 김영철 부장입니다.

1990년 고위급 회담을 위해 판문점을 왔을 때 김녕만 작가의 카메라에 포착된 모습입니다.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이때 우리 화동이 북한 인민군 군복을 입은 장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장면이 너무 평화로워 보여서 사진을 찍었거든요."]

분단과 대립의 장소로 알려진 그곳에서 함께 웃고 환영하며 서로를 배웅하는 사람들.

어쩌면 판문점의 그러한 모습에서 작가는 희망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대치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자그마한 평화의 실마리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많이 노력을 했거든요."]

["무심코 날아가는 철새를 보거나 아니면 민들레 홀씨 날아가는 홀씨를 보거나 볼 때마다 그래도 우리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 희망을 거기에다 담아서 사진을 찍었었거든요."]

[뉴스광장/2000년 4월 :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차관급 실무회담이 오늘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립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두 달 앞두고 남북 대표가 준비접촉을 가진 곳 역시 판문점이었습니다.

때 맞춰 내린 봄비만큼 판문점엔 활기가 돌았는데요.

[양영식/당시 남측 수석대표 : "대화의 시대로 열어나가자는 데 공감했다는 것은 오늘 출발할 때부터 이게 좋은 성과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령성/당시 북측 단장 : "우리와의 중대한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서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지 않겠냐..."]

판문점 내 남측과 북측 지역을 오가며 다섯 차례 진행된 준비 접촉은 분단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이후 북한의 목함 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 도발 같이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됐을 당시에도 남과 북은 판문점에서 만나 위기 해소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19 남북군사 합의에 따라 판문점의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됐습니다.

[김도균/남측 수석대표 :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 구축을 이행하는 아주 의미있는 그런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판문점의 모든 화기를 철수했고, 남북의 경비 병력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아 무력 충돌 가능성도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판문점의 이 같은 변화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가 조성될 수 있다라는 남북한의 신뢰의 징표가 되는 거죠. 특히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한의 적대행위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야 된 다는 얘기를 공언을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JSA 판문점의 비무장화는 비무장지대 전체의 비무장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촉발점이고요. 나아가서 남북한 간의 군사적인 대치를 항구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그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2019년 새해, 판문점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녕만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요.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판문점에 눈이 많이 내려가지고 완전 빙판길이었어요. 길을 같이 걷다가 미끄러지려고 하니까 남북 장교가 서로 순간적으로 손을 잡는 거예요."]

찰나의 순간이지만 남과 북의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던 작가.

26년이 지나, 이제는 남북 두 정상이 손을 잡은 판문점 사진 앞에 서게 됐습니다.

판문점에서의 수많은 순간이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김녕만 작가는 판문점의 역할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말합니다.

["155마일이 휴전선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철책이 없는 곳은 판문점뿐이잖아요. 그러니까 남북 대화의 숨구멍 역할을 한다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앞으로도 이 판문점이 남북 정상이 만난 것 그 이상으로서 우리 남북 관계에 있어서 숨통을 터주는 그리고 평화로 다가가는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때론 긴장과 대립. 때론 화해와 소통의 66년을 보내온 판문점.

2019년 판문점은 우리에게 또 어떠한 의미로 새겨질지 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이 판문점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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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목 넘어 평화로…판문점의 어제와 오늘
    • 입력 2019-01-05 08:21:14
    • 수정2019-01-07 10:50:24
    남북의 창
[앵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자세히 소개해드렸는데요.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언급하면서 무엇보다 판문점 선언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지난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환이나 주요 사안에 대한 논의와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 중심에는 늘 판문점이 있었는데요.

남북 분단에서 한반도 평화 안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판문점 남북의창에서는 신년기획으로 판문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전망해 봤습니다.

정은지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군사분계선 앞에 서있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오는 김정은 위원장.

손을 굳게 맞잡은 두 정상이 반가운 인사를 나눕니다.

[문재인 대통령 : "반갑습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대통령께서 이런 자리에 나와서 맞이해주신 데 대해서 정말 감동적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 "여기까지 온 것은, 위원장님 아주 용단이었습니다."]

이어 반세기 남북을 갈라놨던 콘크리트 군사분계선 표식을 넘는 김 위원장.

정전 이후 북한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았습니다.

분단과 대치의 상징이었지만, 2018년, 남과 북을 잇는 길목 역할을 하며 화합과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판문점.

2019년 판문점은 또 어떠한 모습과 의미로 우리와 마주할까요?

남과 북이 둘로 나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던 6.25 전쟁.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1953년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 대표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의 시골마을 널문리.

이곳의 작은 가게 앞에 회담장이 마련됐고, 중국군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판문점이라 불리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판문점 설치 이후에도 남북의 군인들은 판문점 구역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충돌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엔 남북교류의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요, 대표적인 교류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입니다.

[1971년 9월 20일 :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됐으며 이로써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대표들이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

이후 판문점에는 상설연락사무소가 생겼고 남북 직통전화도 개설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7.4 남북 공동 성명까지이어집니다.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 :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자주·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담은 남북 당국의 첫 공식 합의가 이루어진겁니다.

하지만 1976년 8월, 판문점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

공동경비구역 내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살해한 사건.

이른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반도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치달았고, 북미 간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1976년 소위 도끼 만행 사건 이전까지는 JSA 공동경비구역은 UN사령부의 병력과 북한 공산권 병력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요. 열려진 공간이었습니다. 미국이 강경대응을 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유감표명으로 일단락되는 그러니까 사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가장 긴장된 상황은 미루나무 사건 도끼 만행 사건으로 전개가 됐던 미국과 북한 간의 군사적인 대치라고 볼 수 있고요."]

판문점 내에는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콘크리트 턱이 만들어졌고, 남북의 경비 초소가 분리된 것도 이 땝니다.

팽팽하게 대치하게 된 남과 북.

판문점에 돌던 온기도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의 시간 속에서도 판문점엔 늘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흘렀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김녕만씨입니다.

83년부터 93년까지, 판문점 출입기자로 근무했던 그는 당시 판문점의 모습 하나하나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판문점을 통한 남북관계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 할 수 있었는데요,

김녕만 작가가 꺼낸 오래 전 사진 한 장.

한 대의 트럭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습니다.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1984년 서울 쪽과 충청 지역에 큰 홍수가 있었거든요 그때 북측에서 수해 물자를 제공해주겠다는 그런 제의가 있었습니다."]

1984년 8월, 나흘 동안 계속된 집중 호우에 서울·경기에만 9만3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최악의 홍수.

이때 북한이 우리 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 지원을 하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 온겁니다.

김 작가는 바로 이날이 8-90년대 남북관계를 급진전시킨 결정적 순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때 수해물자가 필요한 것 보다도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의미가 컸던 것 같아요."]

실제 남북은 이를 계기로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개최에 합의했고, 이산가족들은 역사적인 첫 상봉을 가졌습니다.

분야별 회담에도 가속도가 붙었는데요,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루어졌고,

[1989년/1차 남북체육회담 : "오늘 회담에서는 쌍방 제가한 유일팀 구성방안에 관한 토의가 시작됐습니다."]

남북 최초의 고위급 회담도 진행됐습니다.

그때마다 판문점은 남과 북을 오가는 관문이자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엔 우리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죠.

북한 통일전선부 김영철 부장입니다.

1990년 고위급 회담을 위해 판문점을 왔을 때 김녕만 작가의 카메라에 포착된 모습입니다.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이때 우리 화동이 북한 인민군 군복을 입은 장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장면이 너무 평화로워 보여서 사진을 찍었거든요."]

분단과 대립의 장소로 알려진 그곳에서 함께 웃고 환영하며 서로를 배웅하는 사람들.

어쩌면 판문점의 그러한 모습에서 작가는 희망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대치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자그마한 평화의 실마리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많이 노력을 했거든요."]

["무심코 날아가는 철새를 보거나 아니면 민들레 홀씨 날아가는 홀씨를 보거나 볼 때마다 그래도 우리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 희망을 거기에다 담아서 사진을 찍었었거든요."]

[뉴스광장/2000년 4월 :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차관급 실무회담이 오늘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립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두 달 앞두고 남북 대표가 준비접촉을 가진 곳 역시 판문점이었습니다.

때 맞춰 내린 봄비만큼 판문점엔 활기가 돌았는데요.

[양영식/당시 남측 수석대표 : "대화의 시대로 열어나가자는 데 공감했다는 것은 오늘 출발할 때부터 이게 좋은 성과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령성/당시 북측 단장 : "우리와의 중대한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서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지 않겠냐..."]

판문점 내 남측과 북측 지역을 오가며 다섯 차례 진행된 준비 접촉은 분단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이후 북한의 목함 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 도발 같이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됐을 당시에도 남과 북은 판문점에서 만나 위기 해소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19 남북군사 합의에 따라 판문점의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됐습니다.

[김도균/남측 수석대표 :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 구축을 이행하는 아주 의미있는 그런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판문점의 모든 화기를 철수했고, 남북의 경비 병력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아 무력 충돌 가능성도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판문점의 이 같은 변화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가 조성될 수 있다라는 남북한의 신뢰의 징표가 되는 거죠. 특히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한의 적대행위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야 된 다는 얘기를 공언을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JSA 판문점의 비무장화는 비무장지대 전체의 비무장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촉발점이고요. 나아가서 남북한 간의 군사적인 대치를 항구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그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2019년 새해, 판문점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김녕만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요.

[김녕만/사진작가/1983년~1993년 판문점 출입 : "판문점에 눈이 많이 내려가지고 완전 빙판길이었어요. 길을 같이 걷다가 미끄러지려고 하니까 남북 장교가 서로 순간적으로 손을 잡는 거예요."]

찰나의 순간이지만 남과 북의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던 작가.

26년이 지나, 이제는 남북 두 정상이 손을 잡은 판문점 사진 앞에 서게 됐습니다.

판문점에서의 수많은 순간이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김녕만 작가는 판문점의 역할은 지금부터 시작이라 말합니다.

["155마일이 휴전선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철책이 없는 곳은 판문점뿐이잖아요. 그러니까 남북 대화의 숨구멍 역할을 한다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앞으로도 이 판문점이 남북 정상이 만난 것 그 이상으로서 우리 남북 관계에 있어서 숨통을 터주는 그리고 평화로 다가가는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때론 긴장과 대립. 때론 화해와 소통의 66년을 보내온 판문점.

2019년 판문점은 우리에게 또 어떠한 의미로 새겨질지 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이 판문점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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