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끝내 못 받은 사과…故 김복동 할머니 추모 물결

입력 2019.01.31 (08:31) 수정 2019.01.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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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이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오며 평생을 싸워왔던 김복동 할머니가 사흘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빈소에는 추모행렬이 이어졌고, 전국 각지에도 분향소가 차려졌습니다.

외신에서도 김 할머니의 부고를 전하고 있는데요.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며 여생을 보냈던 고 김복동 할머니의 발자취 지금부터 따라가보시죠.

[리포트]

어제 오후,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지 이틀째에도 애도의 발걸음은 이어졌습니다.

학생들부터 넥타이를 멘 회사원, 백발이 성성한 노년층까지 함께했습니다.

[조현호/서울시 강동구 : "한국이란 나라가 되게 여러 역사가 있는데 그중에 슬픈 역사 가운데 계신분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김민경/서울시 용산구 : "어린 나이에 (고통을) 견뎌냈다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인권운동을 하시면서 사과받기를 원하셨는데도 끝끝내 사과를 받지 못한 점도 마음이 아팠어요."]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며 함께 싸워왔던 이용수 할머니도 이틀째 빈소를 찾아와 김 할머니의 가는 길을 지켰습니다.

[이용수/'위안부' 피해자 : "지난주에 와서 김복동 할머니 만났어요. '언니 내가 왔다, 이용수 동생 왔다'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어요.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손을 잡았었어요. 그랬는데 가서 며칠 안 돼서 당하니까 그래도 그때 만났으니까..."]

1992년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알린 김복동 할머니.

당시 김 할머니는 40년 넘게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응어리를 어렵게 풀어놨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1992년 : "그리 끌려다니는 거를 갖다가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나 이 사람아."]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세계 곳곳 국제회의를 다니며 여생을 바쳤고, 유엔에서의 위안부 피해 증언은 세계 역사에 남아 이후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건 14살 때였습니다.

일본 군수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말에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3년 : "군복차림으로 남자 둘하고 (일본) 순사 한 명, 우리 동네 반장이 찾아왔었어요."]

하지만 14살 소녀가 끌려간 곳은 전쟁터의 위안소였습니다.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다니다가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1993년 빈 세계인권대회를 시작으로 자신의 위안부 피해사실을 알린 김복동 할머니는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전범재판에 출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에 진정한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3년 : "'위안부라는 것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다 증거가 없다' 그렇게 말해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화가 나서 왔다고요. 증거가 지금 살아있는데 왜 증거가 없느냐? 지금 증거가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증거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어제는 1372번째 수요시위가 열렸는데요.

김복동 할머니 별세 이후 열린 첫 수요시위에는 평소보다 두 배가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라! 사죄하라!"]

28년째 이어지고 있는 세계 최장기 집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열렸지만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권현근/경기도 시흥시 : "할머니들께서 연세도 많이 드시고, 기억을 유지하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있잖아요. 그래서 잊혀지는 역사가 아니라 좀 더 현재 살아있는 역사로 학생들과 함께 하고 저 또한 이런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고 싶어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돼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려 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궂은 날씨에도 마다않고 함께 해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5년 : "우리들도 다리를 쭉 뻗고 하루라도 살다가 눈을 감았으면 원이 없겠는데요."]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6년 : "우리들이 위로금 받겠다고 싸우는 줄 압니까? 이건 사죄도 아니고 배상도 아니고..."]

첫 시위 때 예순 일곱이었던 할머니는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겼고, 대장암 투병 중에도 시위에 함께했지만 그토록 원했던 일본 측의 사과는 받지 못했습니다.

[한경희/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 : "할머니께서는 진심으로 사죄하면 용서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죄가 그렇게 어렵냐. 돈으로 무마하려는 것에서 굉장히 분노하셨어요."]

[김동희/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장 : "할머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일본정부는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라는 말씀들을 하세요. 하지만 난 죽지 않을 거야. 내가 죽더라도 내 문제를 함께 하는 젊은이들이 내 문제를 기억하고 함께 할 거야 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

이번 달에만 두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제 생존자는 23명입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5년 : "지금 백발이 된 할머니만 과거에 할머니들이 이 (어린)나이에 끌려갔구나. 마무리가 되면 훨훨 날고 싶지..."]

남은 피해 생존자들의 평균 연령은 아흔 한 살입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은 내일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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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따라잡기] 끝내 못 받은 사과…故 김복동 할머니 추모 물결
    • 입력 2019-01-31 08:38:55
    • 수정2019-01-31 08: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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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이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오며 평생을 싸워왔던 김복동 할머니가 사흘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빈소에는 추모행렬이 이어졌고, 전국 각지에도 분향소가 차려졌습니다.

외신에서도 김 할머니의 부고를 전하고 있는데요.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며 여생을 보냈던 고 김복동 할머니의 발자취 지금부터 따라가보시죠.

[리포트]

어제 오후,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지 이틀째에도 애도의 발걸음은 이어졌습니다.

학생들부터 넥타이를 멘 회사원, 백발이 성성한 노년층까지 함께했습니다.

[조현호/서울시 강동구 : "한국이란 나라가 되게 여러 역사가 있는데 그중에 슬픈 역사 가운데 계신분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김민경/서울시 용산구 : "어린 나이에 (고통을) 견뎌냈다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인권운동을 하시면서 사과받기를 원하셨는데도 끝끝내 사과를 받지 못한 점도 마음이 아팠어요."]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며 함께 싸워왔던 이용수 할머니도 이틀째 빈소를 찾아와 김 할머니의 가는 길을 지켰습니다.

[이용수/'위안부' 피해자 : "지난주에 와서 김복동 할머니 만났어요. '언니 내가 왔다, 이용수 동생 왔다'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어요.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손을 잡았었어요. 그랬는데 가서 며칠 안 돼서 당하니까 그래도 그때 만났으니까..."]

1992년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알린 김복동 할머니.

당시 김 할머니는 40년 넘게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응어리를 어렵게 풀어놨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1992년 : "그리 끌려다니는 거를 갖다가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나 이 사람아."]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세계 곳곳 국제회의를 다니며 여생을 바쳤고, 유엔에서의 위안부 피해 증언은 세계 역사에 남아 이후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건 14살 때였습니다.

일본 군수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말에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3년 : "군복차림으로 남자 둘하고 (일본) 순사 한 명, 우리 동네 반장이 찾아왔었어요."]

하지만 14살 소녀가 끌려간 곳은 전쟁터의 위안소였습니다.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다니다가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1993년 빈 세계인권대회를 시작으로 자신의 위안부 피해사실을 알린 김복동 할머니는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전범재판에 출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에 진정한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3년 : "'위안부라는 것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다 증거가 없다' 그렇게 말해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화가 나서 왔다고요. 증거가 지금 살아있는데 왜 증거가 없느냐? 지금 증거가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증거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어제는 1372번째 수요시위가 열렸는데요.

김복동 할머니 별세 이후 열린 첫 수요시위에는 평소보다 두 배가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라! 사죄하라!"]

28년째 이어지고 있는 세계 최장기 집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열렸지만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권현근/경기도 시흥시 : "할머니들께서 연세도 많이 드시고, 기억을 유지하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있잖아요. 그래서 잊혀지는 역사가 아니라 좀 더 현재 살아있는 역사로 학생들과 함께 하고 저 또한 이런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고 싶어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돼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려 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궂은 날씨에도 마다않고 함께 해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5년 : "우리들도 다리를 쭉 뻗고 하루라도 살다가 눈을 감았으면 원이 없겠는데요."]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6년 : "우리들이 위로금 받겠다고 싸우는 줄 압니까? 이건 사죄도 아니고 배상도 아니고..."]

첫 시위 때 예순 일곱이었던 할머니는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겼고, 대장암 투병 중에도 시위에 함께했지만 그토록 원했던 일본 측의 사과는 받지 못했습니다.

[한경희/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 : "할머니께서는 진심으로 사죄하면 용서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죄가 그렇게 어렵냐. 돈으로 무마하려는 것에서 굉장히 분노하셨어요."]

[김동희/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장 : "할머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일본정부는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라는 말씀들을 하세요. 하지만 난 죽지 않을 거야. 내가 죽더라도 내 문제를 함께 하는 젊은이들이 내 문제를 기억하고 함께 할 거야 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

이번 달에만 두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제 생존자는 23명입니다.

[김복동 할머니/'위안부' 피해자/2015년 : "지금 백발이 된 할머니만 과거에 할머니들이 이 (어린)나이에 끌려갔구나. 마무리가 되면 훨훨 날고 싶지..."]

남은 피해 생존자들의 평균 연령은 아흔 한 살입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은 내일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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