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나도…이름 없는 ‘3.1 운동 순국자’

입력 2019.03.02 (21:21) 수정 2019.03.0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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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3.1운동 기념식에서 '만세운동으로 7천5백여 명이 숨졌다'고 말했죠.

일본 정부가 사망자 수가 다르다며 부적절한 언급이라고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항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데 KBS가 취재해보니까, '이름없는 3.1운동 순국자'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젭니다.

김덕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아흐레 만에 경기도 양평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한 달 뒤, 곡수장터엔 무려 3천 명이 모였습니다.

장날이었습니다.

헌병들이 총을 쐈고 2명이 숨졌습니다.

[길영배/양평군 곡수리 이장 : "각지에 살던 분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또 구속돼서 (광복 이후)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기도..."]

일제가 파악한 양평의 3.1운동 순국자는 11명.

하지만 서훈된 사람은 고작 3명뿐입니다.

곡수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호승 선생.

헌병들에게 붙잡혀 총살됐지만 주민들의 증언만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복재/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보훈처에서 증언만 가지고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관심을 미리 좀 가졌다면 많은 분이 서훈될 수 있었고 아마 더 많은 내용이 밝혀졌을 텐데..."]

만세운동 열기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까지 확산됩니다.

4월 9일 강원도 양양군 기사문 마을 시위.

모두 9명이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광영/양양군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 "(조선 민중) 천여 명이 진행을 하는데,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발포가 시작돼서..."]

5명은 훈장을 받았지만, 4명은 서훈이 보류됐습니다.

역시 증거 부족이었습니다.

18살 때 숨진 문종희 선생도 그런 사례입니다.

후손들이 뒤늦게 족보에서 3.1운동 순국 사실을 발견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문종기/문종희 선생 사촌동생/1937년생 : "다행히 가승(족보)을 어른들이 만들어 놨어. (어른들이) 잊어먹지 말고 보관해라. (문종희 선생) 산소를 어디에 썼다는 것도 다 여기 읽어보면 (있어)."]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이 '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한 3.1운동 순국자 수는 7,500여 명,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 소요사건 일람표'에선 553명으로 집계했습니다.

그런데 3.1 운동 순국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311명에 불과합니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보다 242명이나 적습니다.

투옥이나 재판 기록이 없는 3.1 운동 순국자들은 사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핑계 속에 일제가 스스로 인정했던 사망자 553명의 신원조차 모두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덕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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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이 지나도…이름 없는 ‘3.1 운동 순국자’
    • 입력 2019-03-02 21:24:53
    • 수정2019-03-02 22:05:45
    뉴스 9
[앵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3.1운동 기념식에서 '만세운동으로 7천5백여 명이 숨졌다'고 말했죠.

일본 정부가 사망자 수가 다르다며 부적절한 언급이라고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항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데 KBS가 취재해보니까, '이름없는 3.1운동 순국자'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젭니다.

김덕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아흐레 만에 경기도 양평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한 달 뒤, 곡수장터엔 무려 3천 명이 모였습니다.

장날이었습니다.

헌병들이 총을 쐈고 2명이 숨졌습니다.

[길영배/양평군 곡수리 이장 : "각지에 살던 분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또 구속돼서 (광복 이후)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기도..."]

일제가 파악한 양평의 3.1운동 순국자는 11명.

하지만 서훈된 사람은 고작 3명뿐입니다.

곡수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호승 선생.

헌병들에게 붙잡혀 총살됐지만 주민들의 증언만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복재/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보훈처에서 증언만 가지고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관심을 미리 좀 가졌다면 많은 분이 서훈될 수 있었고 아마 더 많은 내용이 밝혀졌을 텐데..."]

만세운동 열기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까지 확산됩니다.

4월 9일 강원도 양양군 기사문 마을 시위.

모두 9명이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광영/양양군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 "(조선 민중) 천여 명이 진행을 하는데,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발포가 시작돼서..."]

5명은 훈장을 받았지만, 4명은 서훈이 보류됐습니다.

역시 증거 부족이었습니다.

18살 때 숨진 문종희 선생도 그런 사례입니다.

후손들이 뒤늦게 족보에서 3.1운동 순국 사실을 발견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문종기/문종희 선생 사촌동생/1937년생 : "다행히 가승(족보)을 어른들이 만들어 놨어. (어른들이) 잊어먹지 말고 보관해라. (문종희 선생) 산소를 어디에 썼다는 것도 다 여기 읽어보면 (있어)."]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이 '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한 3.1운동 순국자 수는 7,500여 명,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 소요사건 일람표'에선 553명으로 집계했습니다.

그런데 3.1 운동 순국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311명에 불과합니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보다 242명이나 적습니다.

투옥이나 재판 기록이 없는 3.1 운동 순국자들은 사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핑계 속에 일제가 스스로 인정했던 사망자 553명의 신원조차 모두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덕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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