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거는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

입력 2020.05.18 (21:41) 수정 2020.05.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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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엄혹했던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계속되면서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챙취할 수 있었던 배경엔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이후 촛불혁명에 이어 현재까지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정신이자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이재석 기자가 되짚어 봅니다.

[리포트]

그날의 결과만 보면 '패배'였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고, 학살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80년 5월의 광주를 외면했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부채의식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됐습니다.

[이인영/국회의원 : "올바른 진실을 알게 돼 참 미안했습니다. 그 미안한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 간 사람들 앞에서의 부끄러움이 저를 민주화운동으로 나서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3저 호황에 따른 경제 성장과 갖가지 문화정책으로 민낯을 가리려 했던 신군부.

그러나 5.18이 남긴 자유를 향한 도도한 저항 정신은 마침내 전국적 시위 물결로 폭발했습니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불의와 부정의, 이웃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힘. 그것이 결국 6월항쟁이나 민주화의 동력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행동들이 광주에서 가장 잘 보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정치인들에게 광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자신도 피해자로서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던 그도 희생자들 이름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홍걸/故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주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뜻을 이어받아야겠다. 그분들이 꿈꿨던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버지는 항상 갖고 계셨고..."]

5공 청문회로 '스타'가 된 초선의원은 '호남 고립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자기 정치인생을 걸게 됩니다.

[노무현/전 대통령 : "국법을 거부할 생각입니까. 증인은 대한민국 국법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당합당으로 학살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5.18 특별법'을 만드는 일은 민주 투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김덕룡/김영삼 민주센터 이사장 : "김영삼 대통령은 5.18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항상 진상을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광주와 5.18은 국가의 공인된 역사가 됐습니다.

과거에만 묶인 역사가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작품으로, 천만 관객이 찾은 대중영화로도 수시로 호명되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송강호/영화 <택시운전사> 배우 : "작은 마음의 빚이라도 덜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때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 여부와, 공식 노래 제창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란은 희생자 가족들을 더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거리의 촛불'은 5.18이 남긴 '주권재민' 정신의 계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오롯이 헌법에 새기는 일이 우리에게 과제로 남았습니다.

KBS 뉴스 이재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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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항거는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
    • 입력 2020-05-18 21:45:41
    • 수정2020-05-18 21: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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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엄혹했던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계속되면서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챙취할 수 있었던 배경엔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이후 촛불혁명에 이어 현재까지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정신이자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이재석 기자가 되짚어 봅니다.

[리포트]

그날의 결과만 보면 '패배'였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고, 학살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80년 5월의 광주를 외면했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부채의식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됐습니다.

[이인영/국회의원 : "올바른 진실을 알게 돼 참 미안했습니다. 그 미안한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 간 사람들 앞에서의 부끄러움이 저를 민주화운동으로 나서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3저 호황에 따른 경제 성장과 갖가지 문화정책으로 민낯을 가리려 했던 신군부.

그러나 5.18이 남긴 자유를 향한 도도한 저항 정신은 마침내 전국적 시위 물결로 폭발했습니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불의와 부정의, 이웃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힘. 그것이 결국 6월항쟁이나 민주화의 동력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행동들이 광주에서 가장 잘 보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정치인들에게 광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자신도 피해자로서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던 그도 희생자들 이름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홍걸/故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주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뜻을 이어받아야겠다. 그분들이 꿈꿨던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버지는 항상 갖고 계셨고..."]

5공 청문회로 '스타'가 된 초선의원은 '호남 고립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자기 정치인생을 걸게 됩니다.

[노무현/전 대통령 : "국법을 거부할 생각입니까. 증인은 대한민국 국법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당합당으로 학살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5.18 특별법'을 만드는 일은 민주 투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김덕룡/김영삼 민주센터 이사장 : "김영삼 대통령은 5.18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항상 진상을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광주와 5.18은 국가의 공인된 역사가 됐습니다.

과거에만 묶인 역사가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작품으로, 천만 관객이 찾은 대중영화로도 수시로 호명되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송강호/영화 <택시운전사> 배우 : "작은 마음의 빚이라도 덜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때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 여부와, 공식 노래 제창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란은 희생자 가족들을 더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거리의 촛불'은 5.18이 남긴 '주권재민' 정신의 계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오롯이 헌법에 새기는 일이 우리에게 과제로 남았습니다.

KBS 뉴스 이재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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