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성공과 좌절의 일대기

입력 2001.03.22 (21:00) 수정 2018.08.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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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강원도 산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국의 대표 기업가로 우뚝 섰던 고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고비를 돌파해 온 그의 인생 역정은 한국의 현대 경제사를 이끈 거대한 에너지이기도 했습니다.
보도에 이현주 기자입니다.
⊙기자: 여의도의 30배가 넘는 광활한 땅, 그러나 17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각 방송이 생중계에 나섰던 이 대역사는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을 막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하면 된다는 정주영식 아이디어였습니다.
⊙故 정주영 前 현대 명예회장: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그 기쁨은 다시 없습니다.
⊙기자: 지난 71년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으로부터 현대조선소 건립자금을 얻어낸 것 또한 이 같은 정주영식 발상법의 결과였습니다.
⊙중앙대 초청강연('85. 11): 현대조선소 터인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지도만 들고가 돈 꿔달라고 했습니다.
⊙기자: 당연히 거절하려던 영국 금융가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내보이면서 설득에 나선 그의 집념이 결국 자금을 얻어낸 것입니다.
강원도 통천 두메 빈농의 장남.
이 같은 운명을 박차고 집을 나선 19살 때부터 하면 된다는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신념이었습니다.
한국동란 직전인 지난 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이어서 현대건설을 창업하면서 정 전 명예회장의 행보는 한국 현대 경제사와 궤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단시간 완공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진출 8년 만에 국산 제1호 포니차를 개발했고 모두가 불가능하리라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해 내 중동붐을 일으켰습니다.
역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88올림픽 유치까지 해냄으로써 정주영식 하면 된다는 우리 경제 발전의 구호와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92년 대선에 출마해 좌절하면서 실패한 정치가 정주영으로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난 98년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의 닫힌 문을 열면서 정주영의 하면 된다는 다시 피어나기도 했지만 경영권 승계 지연으로 3부자 퇴진이라는 집안 갈등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안겼습니다.
소 판 돈 70원을 밑천으로 한국 대표 기업가로 우뚝섰던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인생 역정은 우리 경제를 이끈 큰 발자국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KBS뉴스 이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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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 성공과 좌절의 일대기
    • 입력 2001-03-22 21:00:00
    • 수정2018-08-29 15:00:00
    뉴스 9
⊙앵커: 강원도 산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국의 대표 기업가로 우뚝 섰던 고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고비를 돌파해 온 그의 인생 역정은 한국의 현대 경제사를 이끈 거대한 에너지이기도 했습니다. 보도에 이현주 기자입니다. ⊙기자: 여의도의 30배가 넘는 광활한 땅, 그러나 17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각 방송이 생중계에 나섰던 이 대역사는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을 막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하면 된다는 정주영식 아이디어였습니다. ⊙故 정주영 前 현대 명예회장: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그 기쁨은 다시 없습니다. ⊙기자: 지난 71년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으로부터 현대조선소 건립자금을 얻어낸 것 또한 이 같은 정주영식 발상법의 결과였습니다. ⊙중앙대 초청강연('85. 11): 현대조선소 터인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지도만 들고가 돈 꿔달라고 했습니다. ⊙기자: 당연히 거절하려던 영국 금융가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내보이면서 설득에 나선 그의 집념이 결국 자금을 얻어낸 것입니다. 강원도 통천 두메 빈농의 장남. 이 같은 운명을 박차고 집을 나선 19살 때부터 하면 된다는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신념이었습니다. 한국동란 직전인 지난 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이어서 현대건설을 창업하면서 정 전 명예회장의 행보는 한국 현대 경제사와 궤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단시간 완공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진출 8년 만에 국산 제1호 포니차를 개발했고 모두가 불가능하리라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해 내 중동붐을 일으켰습니다. 역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88올림픽 유치까지 해냄으로써 정주영식 하면 된다는 우리 경제 발전의 구호와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92년 대선에 출마해 좌절하면서 실패한 정치가 정주영으로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난 98년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의 닫힌 문을 열면서 정주영의 하면 된다는 다시 피어나기도 했지만 경영권 승계 지연으로 3부자 퇴진이라는 집안 갈등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안겼습니다. 소 판 돈 70원을 밑천으로 한국 대표 기업가로 우뚝섰던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인생 역정은 우리 경제를 이끈 큰 발자국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KBS뉴스 이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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