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퍼] 끌려간 소녀들 ① 위안부 실명 적힌 463명 명부 발견…아이 29명도

입력 2015.08.07 (15:46) 수정 2015.08.0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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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 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태국 서부 칸차나부리.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무모한 철도 건설로 전쟁 포로 등 10만 명이 숨진 곳입니다. 이곳과 미얀마 국경을 오가는 태국-미얀마 철도는 '죽음의 철도'로 불렸습니다.
일본군 옛 사령부가 있었던 콰이강의 다리 앞에는 이른바 '2차대전 유적 거리'가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영문 안내책자도 제작돼 있습니다.
이 책자에 ‘윤락가(Prostitute Area)’라고 적혀있는 곳, 바로 일본군 위안소입니다. 주민들은 위안소 이름이 ‘껑쑤피니’였고 한국과 일본, 중국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82살의 한 할머니는 ‘밤마다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억했습니다.
콰이강의 다리에는 연합군 전쟁포로들의 희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위안부들에게도 이곳은 고통의 현장이었습니다.

아칸차나부리 관광 안내문아칸차나부리 관광 안내문

▲ 아칸차나부리 관광 안내문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태국에 끌려갔던 걸까요?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일본군이 패전 당시 문서 기록들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안부 등 민감한 문제를 담은 문서는 우선 폐기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 자료에는 일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미국 전략정보국(OSS-현재 CIA의 전신) 자료에는 일본군이 항복한 뒤인 1945년 9월 7일, 태국에 7,400명의 한국인 포로들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군 내 한인 사병이 5,000명, 연합군 포로 감시원 등이 900명, 그리고 한인 위안부가 1,500명으로 집계돼 있습니다.
1,500명이 모두 태국에 있던 위안부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태국이 버마 전선의 후방 지역이었던 만큼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이송된 위안부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국의 위안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이것 뿐입니다.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는데도, 1,500명이란 숫자 외에는 공적인 기록이라고 할 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이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도 이렇게 문서 기록을 찾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 논의가 항상 원점을 맴도는 이유입니다.

태국 군부가 작성한 조선인 여성 포로 명부태국 군부가 작성한 조선인 여성 포로 명부

▲ 태국 군부가 작성한 조선인 여성 포로 명부


KBS 탐사보도팀이 발굴 보도하는 태국의 조선인 여성포로 명단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명부는 태국 최고사령부가 작성한 것으로 최근 비밀해제된 기밀문서입니다.
태국어와 영어로 별도로 작성된 2개의 명부인데, 194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태국 남부 아유타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조선 여성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명부에 실린 여성은 579명. 같은 수용소의 수감 기록이고 작성 시기만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복 기재된 경우도 있습니다. 중복으로 적힌 이름을 제외하면 2개의 명부에 적힌 여성 포로는 463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연령은 2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이상은 67명, 10대는 14명입니다.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故 노수복 할머니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故 노수복 할머니

▲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故 노수복 할머니


태국어로 된 명부에는 군데군데 ‘도망’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수감돼 있던 여성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뜻입니다. 1984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가 가족을 찾고 싶다며 태국 소재 한국대사관에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한 노수복 할머니를 기억하시나요?
빨래를 하다가 위안부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긴 것이 장장 42년. 하지만 할머니는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가 불같이 화내실 게 두려워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태국에 정착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많은 사연을 품고 이역만리 타국을 떠돈 위안부는 노수복 할머니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KBS 탐사보도팀이 발굴한 태국 군부의 위안부 포로 명부를 보면 27살 양미재, 28살 류종적, 24살 백명숙, 24살 이공주. 이 네 명도 남몰래 포로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위안부를위안부를

▲ 위안부를 간호조무사로 등록하라” 일본군 비밀지령 무선 전문


또 눈에 띄는 건 태국어 명부에 적힌 여성들의 직업입니다. 모두 '간호조무사'로 표기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실제 간호조무사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종전 무렵,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숨기기 위해 여성들의 직업을 모두 ‘간호조무사’로 통칭했다는 건 알 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하야시 히로후미 일본 간토가쿠인 대학 교수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에도 이런 정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해군 사령부가 종전 당시 각 지역 산하 부대에 보낸 전보문인데 영국군이 도청해 해독한 것입니다. 이 전보문에는 '위안시설 여성들을 간호조무사로 변경 등록하고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조치해 놓아라', '전보문은 즉시 소각하라'는 지령이 담겨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실제 이런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취재팀은 태국어로 된 포로명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다가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18명의 아기 명단이 포로명부에 붙어 있었습니다. 나이는 한 살부터 다섯 살까지...남자 아이가 10명, 여자 아이가 8명이었습니다. 4명은 수용소에서 출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 된 포로명부에도 군데군데 아이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엄마 이름 밑에 아이 이름을 적어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문 명부의 아이 포로는 모두 17명. 6명은 엄마와 같은 성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국과 영어 명부에 모두 29명의 위안부 아이 이름이 적혀 있는 겁니다.
위안부 중에 아버지 없는 아기를 낳은 여성도 있었을 것이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 패전 직전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도 말 못 할 사연들이 참 많았을 거라는 걸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실제로 세상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아갔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존재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겁니다.
출생과 함께 포로가 된 아빠 없는 아이들. 이들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지금은 한국에 있을까요, 아니면 태국에 있을까요? 어머니가 한 많은 삶을 산 위안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요?

취재팀은 명부에 적힌 이름 가운데 실제 위안부 피해자가 있는지, 생존자가 있는지, 한국으로 돌아온 위안부의 아이는 없는지 추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위안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뒤여서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하나의 이름만 일단 확인했을 뿐입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에 위안부 피해신고를 한 할머니입니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고무공장에서 돈 벌게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나섰다가 미얀마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20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가족들의 피해 신고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공문서 기록은 모두 폐기됐고,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는데 무슨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한이라도 풀어드리고 싶다며 뒤늦게 신고를 접수했던 가족들은 이미 마음을 접은 상태였습니다. 이번 명부 발굴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나머지 491명의 인적 사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취재팀은 방송 뒤 KBS 홈페이지에 명부를 공개할 계획입니다.

[연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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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퍼] 끌려간 소녀들 ① 위안부 실명 적힌 463명 명부 발견…아이 29명도
    • 입력 2015-08-07 15:46:14
    • 수정2015-08-09 22: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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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 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의 다리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태국 서부 칸차나부리.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무모한 철도 건설로 전쟁 포로 등 10만 명이 숨진 곳입니다. 이곳과 미얀마 국경을 오가는 태국-미얀마 철도는 '죽음의 철도'로 불렸습니다.
일본군 옛 사령부가 있었던 콰이강의 다리 앞에는 이른바 '2차대전 유적 거리'가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영문 안내책자도 제작돼 있습니다.
이 책자에 ‘윤락가(Prostitute Area)’라고 적혀있는 곳, 바로 일본군 위안소입니다. 주민들은 위안소 이름이 ‘껑쑤피니’였고 한국과 일본, 중국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82살의 한 할머니는 ‘밤마다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억했습니다.
콰이강의 다리에는 연합군 전쟁포로들의 희생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위안부들에게도 이곳은 고통의 현장이었습니다.

아칸차나부리 관광 안내문
▲ 아칸차나부리 관광 안내문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태국에 끌려갔던 걸까요?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일본군이 패전 당시 문서 기록들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안부 등 민감한 문제를 담은 문서는 우선 폐기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 자료에는 일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미국 전략정보국(OSS-현재 CIA의 전신) 자료에는 일본군이 항복한 뒤인 1945년 9월 7일, 태국에 7,400명의 한국인 포로들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군 내 한인 사병이 5,000명, 연합군 포로 감시원 등이 900명, 그리고 한인 위안부가 1,500명으로 집계돼 있습니다.
1,500명이 모두 태국에 있던 위안부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태국이 버마 전선의 후방 지역이었던 만큼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이송된 위안부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국의 위안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이것 뿐입니다.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는데도, 1,500명이란 숫자 외에는 공적인 기록이라고 할 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이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도 이렇게 문서 기록을 찾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 논의가 항상 원점을 맴도는 이유입니다.

태국 군부가 작성한 조선인 여성 포로 명부
▲ 태국 군부가 작성한 조선인 여성 포로 명부


KBS 탐사보도팀이 발굴 보도하는 태국의 조선인 여성포로 명단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명부는 태국 최고사령부가 작성한 것으로 최근 비밀해제된 기밀문서입니다.
태국어와 영어로 별도로 작성된 2개의 명부인데, 194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태국 남부 아유타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조선 여성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명부에 실린 여성은 579명. 같은 수용소의 수감 기록이고 작성 시기만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복 기재된 경우도 있습니다. 중복으로 적힌 이름을 제외하면 2개의 명부에 적힌 여성 포로는 463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연령은 2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이상은 67명, 10대는 14명입니다.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故 노수복 할머니
▲ 태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위안부, 故 노수복 할머니


태국어로 된 명부에는 군데군데 ‘도망’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수감돼 있던 여성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다는 뜻입니다. 1984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가 가족을 찾고 싶다며 태국 소재 한국대사관에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한 노수복 할머니를 기억하시나요?
빨래를 하다가 위안부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긴 것이 장장 42년. 하지만 할머니는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가 불같이 화내실 게 두려워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태국에 정착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많은 사연을 품고 이역만리 타국을 떠돈 위안부는 노수복 할머니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KBS 탐사보도팀이 발굴한 태국 군부의 위안부 포로 명부를 보면 27살 양미재, 28살 류종적, 24살 백명숙, 24살 이공주. 이 네 명도 남몰래 포로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위안부를
▲ 위안부를 간호조무사로 등록하라” 일본군 비밀지령 무선 전문


또 눈에 띄는 건 태국어 명부에 적힌 여성들의 직업입니다. 모두 '간호조무사'로 표기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실제 간호조무사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종전 무렵,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숨기기 위해 여성들의 직업을 모두 ‘간호조무사’로 통칭했다는 건 알 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하야시 히로후미 일본 간토가쿠인 대학 교수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에도 이런 정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해군 사령부가 종전 당시 각 지역 산하 부대에 보낸 전보문인데 영국군이 도청해 해독한 것입니다. 이 전보문에는 '위안시설 여성들을 간호조무사로 변경 등록하고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조치해 놓아라', '전보문은 즉시 소각하라'는 지령이 담겨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실제 이런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취재팀은 태국어로 된 포로명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다가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18명의 아기 명단이 포로명부에 붙어 있었습니다. 나이는 한 살부터 다섯 살까지...남자 아이가 10명, 여자 아이가 8명이었습니다. 4명은 수용소에서 출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 된 포로명부에도 군데군데 아이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엄마 이름 밑에 아이 이름을 적어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문 명부의 아이 포로는 모두 17명. 6명은 엄마와 같은 성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국과 영어 명부에 모두 29명의 위안부 아이 이름이 적혀 있는 겁니다.
위안부 중에 아버지 없는 아기를 낳은 여성도 있었을 것이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 패전 직전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만삭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도 말 못 할 사연들이 참 많았을 거라는 걸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실제로 세상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아갔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존재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겁니다.
출생과 함께 포로가 된 아빠 없는 아이들. 이들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지금은 한국에 있을까요, 아니면 태국에 있을까요? 어머니가 한 많은 삶을 산 위안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요?

취재팀은 명부에 적힌 이름 가운데 실제 위안부 피해자가 있는지, 생존자가 있는지, 한국으로 돌아온 위안부의 아이는 없는지 추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위안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뒤여서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하나의 이름만 일단 확인했을 뿐입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에 위안부 피해신고를 한 할머니입니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고무공장에서 돈 벌게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나섰다가 미얀마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20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가족들의 피해 신고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공문서 기록은 모두 폐기됐고,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는데 무슨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한이라도 풀어드리고 싶다며 뒤늦게 신고를 접수했던 가족들은 이미 마음을 접은 상태였습니다. 이번 명부 발굴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나머지 491명의 인적 사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취재팀은 방송 뒤 KBS 홈페이지에 명부를 공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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