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퍼] 끌려간 소녀들 ② “조선 처녀 기관총으로 쏘고 우물에 버렸다”

입력 2015.08.07 (17:03) 수정 2015.08.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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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북한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 북한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해발 2,600m, 중국 윈난성 송산을 휘감아 넘는 버마로드. 이 길의 끝은 소수민족 마을, 라멍입니다.
2차대전 당시, 1,200여 명의 일본군이 집단 자결한 진지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한 라멍위안소 유적지. 비석에는 ‘일본군 패전 당시, 많은 위안부가 살해됐고 소수는 중국군에 체포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체포된 위안부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연합군 카메라에 찍힌 임신한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입니다. 박 할머니는 지난 2000년 국제여성전범재판에서 공개증언에 나섰던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입니다.

중국 윈난성 차이가 위안소중국 윈난성 차이가 위안소

▲ 중국 윈난성 차이가 위안소


라멍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 텅총. 이곳 역시 일본군이 농성전 끝에 집단 자결한 곳입니다. 2천여 명이 지키고 있던 텅총성을 5만 명의 연합군과 중국군이 에워싸면서 일본군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곳에는 사진 속 차이가 위안소를 포함해 모두 6곳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텅총과 라멍 등 윈난성 서부 지역의 위안소는 확인된 것만 27곳입니다. 위안부 숫자는 3백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 가운데는 조선인이 2백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중국 당안관 자료에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텅총 전투 당시 살해된 한인 위안부들중국 텅총 전투 당시 살해된 한인 위안부들

▲ 중국 텅총 전투 당시 살해된 한인 위안부들


그런데 그 많던 위안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2백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데 일본군이 패전한 뒤 중국이나 연합군 자료에 남은 생존자들의 흔적은 박영심 할머니를 포함해 많아야 30명 안팎입니다. 취재팀은 한 장의 사진에 주목했습니다. 1944년 8월, 텅총성 함락 직후 연합군 종군기자 프랭크 맨워렌이 찍은 사진입니다. 냄새가 심한 지 코를 막은 채 구덩이 속을 응시하는 중국군 병사들. 종군기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구덩이 속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군 병사들. 여성들은 대부분 조선인 위안부다.’ 사진 속 위안부 학살설은 사실일까요? 중국 윈난성 현지에서 그 실체를 추적했습니다.

중국 기관지에 실린 위안부 학살 정황중국 기관지에 실린 위안부 학살 정황

▲ 중국 기관지에 실린 위안부 학살 정황


연합군 종군기자의 사진이 찍힌 때와 비슷한 시기, 중국군 기관지에 실린 기록들입니다.

“텅총성이 함락됐을 때 10살 여자아이의 증언. 동틀 무렵 위안부들이 숨어있던 방공호에 일본군이 찾아가 13명을 사살했다.” (소탕보 1944년 9월 26일자)

“텅총 성곽 안에 조선인 위안부 시신 15구가 쌓여 있었고 아기가 그 사이에 있었다.” (중앙일보 1944년 10월 16일자)

비슷한 기록은 일본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에도 발견됩니다.

“하사관이 위안부를 죽이라면서 수은 10개를 줬다. 주먹밥 안에 넣어 먹이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하자 그럼 네가 죽으라고 했다. 나는 독약을 주지 않고 버렸다.” (라멍 전선 사토미 하사관의 회고)

취재팀은 윈난성 현지 주민에게서도 같은 내용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패전하던 날, 위안소에 있던 열 몇 명의 조선 여성들을 기관총으로 쏜 뒤 우물에 버렸다는 증언이었습니다. 중국군이 텅총성을 수복해 주민들이 돌아왔을 때는 집집마다 우물에서 여성들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희생됐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학살설, 그 실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텅총성의 위안부들중국 텅총성의 위안부들

▲ 중국 텅총성의 위안부들


일본은 70년 전 기록된 위안부 학살 증거들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또다시 전쟁 때는 모두가 그러는 것이라고 말할까요? 전쟁 때는 누구나 민간인들을 아무렇게나 데려가 성노예로 삼고, 필요가 없어지면 증거가 남지 않게 흔적을 없애는 거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일본 아베 정부는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며 사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머리채를 끌고 갔는지, 제 발로 걸어갔는지를 따지며 논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위안부를 상대로 저지른 전쟁 범죄는 강제동원만이 아닙니다. 위안부는 하루 수십 명을 상대해야 하는 성노예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심지어는 죽음을 강요당하고 학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에도 문서로 된 증거를 내놓으라고 이야기할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답할 차례입니다. 위안부 제도의 실체를 규명하고 진실을 밝힐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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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퍼] 끌려간 소녀들 ② “조선 처녀 기관총으로 쏘고 우물에 버렸다”
    • 입력 2015-08-07 17:03:14
    • 수정2015-08-09 22: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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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 북한의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해발 2,600m, 중국 윈난성 송산을 휘감아 넘는 버마로드. 이 길의 끝은 소수민족 마을, 라멍입니다.
2차대전 당시, 1,200여 명의 일본군이 집단 자결한 진지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한 라멍위안소 유적지. 비석에는 ‘일본군 패전 당시, 많은 위안부가 살해됐고 소수는 중국군에 체포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체포된 위안부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연합군 카메라에 찍힌 임신한 위안부, 故 박영심 할머니 입니다. 박 할머니는 지난 2000년 국제여성전범재판에서 공개증언에 나섰던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입니다.

중국 윈난성 차이가 위안소
▲ 중국 윈난성 차이가 위안소


라멍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 텅총. 이곳 역시 일본군이 농성전 끝에 집단 자결한 곳입니다. 2천여 명이 지키고 있던 텅총성을 5만 명의 연합군과 중국군이 에워싸면서 일본군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곳에는 사진 속 차이가 위안소를 포함해 모두 6곳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텅총과 라멍 등 윈난성 서부 지역의 위안소는 확인된 것만 27곳입니다. 위안부 숫자는 3백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 가운데는 조선인이 2백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중국 당안관 자료에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텅총 전투 당시 살해된 한인 위안부들
▲ 중국 텅총 전투 당시 살해된 한인 위안부들


그런데 그 많던 위안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2백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데 일본군이 패전한 뒤 중국이나 연합군 자료에 남은 생존자들의 흔적은 박영심 할머니를 포함해 많아야 30명 안팎입니다. 취재팀은 한 장의 사진에 주목했습니다. 1944년 8월, 텅총성 함락 직후 연합군 종군기자 프랭크 맨워렌이 찍은 사진입니다. 냄새가 심한 지 코를 막은 채 구덩이 속을 응시하는 중국군 병사들. 종군기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구덩이 속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군 병사들. 여성들은 대부분 조선인 위안부다.’ 사진 속 위안부 학살설은 사실일까요? 중국 윈난성 현지에서 그 실체를 추적했습니다.

중국 기관지에 실린 위안부 학살 정황
▲ 중국 기관지에 실린 위안부 학살 정황


연합군 종군기자의 사진이 찍힌 때와 비슷한 시기, 중국군 기관지에 실린 기록들입니다.

“텅총성이 함락됐을 때 10살 여자아이의 증언. 동틀 무렵 위안부들이 숨어있던 방공호에 일본군이 찾아가 13명을 사살했다.” (소탕보 1944년 9월 26일자)

“텅총 성곽 안에 조선인 위안부 시신 15구가 쌓여 있었고 아기가 그 사이에 있었다.” (중앙일보 1944년 10월 16일자)

비슷한 기록은 일본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에도 발견됩니다.

“하사관이 위안부를 죽이라면서 수은 10개를 줬다. 주먹밥 안에 넣어 먹이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하자 그럼 네가 죽으라고 했다. 나는 독약을 주지 않고 버렸다.” (라멍 전선 사토미 하사관의 회고)

취재팀은 윈난성 현지 주민에게서도 같은 내용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패전하던 날, 위안소에 있던 열 몇 명의 조선 여성들을 기관총으로 쏜 뒤 우물에 버렸다는 증언이었습니다. 중국군이 텅총성을 수복해 주민들이 돌아왔을 때는 집집마다 우물에서 여성들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희생됐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학살설, 그 실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텅총성의 위안부들
▲ 중국 텅총성의 위안부들


일본은 70년 전 기록된 위안부 학살 증거들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또다시 전쟁 때는 모두가 그러는 것이라고 말할까요? 전쟁 때는 누구나 민간인들을 아무렇게나 데려가 성노예로 삼고, 필요가 없어지면 증거가 남지 않게 흔적을 없애는 거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일본 아베 정부는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며 사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머리채를 끌고 갔는지, 제 발로 걸어갔는지를 따지며 논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위안부를 상대로 저지른 전쟁 범죄는 강제동원만이 아닙니다. 위안부는 하루 수십 명을 상대해야 하는 성노예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심지어는 죽음을 강요당하고 학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에도 문서로 된 증거를 내놓으라고 이야기할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답할 차례입니다. 위안부 제도의 실체를 규명하고 진실을 밝힐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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