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Love of My Life’ 필생의 사랑을 잃다…총·격·에

입력 2015.09.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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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Love of My Life', 필생의 사랑을 잃었다." 한 방송사 앵커의 말입니다.

여기자 앨리슨 파커와 같은 방송의 앵커 크리스 허스트는 연인이었습니다. 앨리슨은 아침뉴스 생방송 중에 총격을 당해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크리스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 악몽 같은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방송으로 말입니다.

앨리슨을 찍고 있던 카메라기자 애덤 워드도 역시 현장에서 총격에 희생됐습니다. 같은 방송사의 PD인 애덤의 연인은, 애인이 들고 있던 카메라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앵글을, 방송 조종실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여러 발의 총성과 앨리슨의 비명 소리가 함께 들렸습니다.

기자와 카메라기자가 총에 맞아 숨지는 끔찍한 장면이 뉴스 시간에 생방송된 겁니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지난달 26일 버지니아 주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젊은 연인들의 비극적 사랑으로 끝나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총기 소유, 인종 차별, 돈의 정치, 논란이라는 말로 맺음을 하기에는 결코 적절치 않은, 미국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매우 충격적으로 들춰내고 있습니다.

■ 범인은 흑인 동성애자, “인종전쟁 해보자”

용의자용의자


베스터 리 플래니건, 마흔한 살, 함께 일했던 두 동료를 총으로 살해하고 경찰에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기자입니다. 그는 흑인이었고 동성애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의 학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교사였습니다. 집안은 유복했지만, 그 덕인지, 그 탓인지, 그가 자랐던 캘리포니아 주의 이스트 오클랜드는 흑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백인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플래니건은 직장에서 동료들과 불화가 잦았답니다. 그는, 이런 불화를 흑인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였다는 게 방송사 측의 설명입니다. 그는 숨진 두 기자에게도 인종차별적인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해고된 뒤에는 방송사를 인종 차별로 고소했지만 기각됐습니다.

범행 직후에 플래니건이 ABC 방송에 보낸 팩스를 보면, 그는, 지난 6월 찰스턴에서 벌어진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흑인들에게 총을 난사한 백인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인종전쟁을 벌이겠다고 적고 있습니다.

■ 미국 사회 ‘충격’…‘총기 규제 강화’ 대선 쟁점으로

용의자 SNS용의자 SNS


플래니건은 한 손으로 총을 잡고 그 위에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총을 쏘면서 그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는 SNS에 그 끔찍한 영상을 올렸습니다.

총기 사건 사고가 잦은 나라지만, 총격 장면이 생방송되고 용의자가 찍은 영상까지 인터넷에 퍼지면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고 총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연히 커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서 총기 관련 사건 사고로 숨진 사람이 테러 희생자보다 많다."며 의회에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법을 조속히 만들라고 거듭,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도 힘을 보탰습니다.

반면 공화당 대선주자들은 대개 총기 규제 강화를 반대합니다.

"칼로 살인을 한다고 칼을 규제하자고 할 건가?" "총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 질환이 문제다."

이런 말들이 공화당 대선주자들이 이번 사건 이후 TV에 출연해 총기 규제를 반대하면서 펼친 '논리'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에 공감을 할지는 모르지만. 총기 규제 문제는 미국 대선에서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습니다.

■ ‘합법적 로비’ 그리고 ‘돈의 정치’

해석을 놓고 논란이 계속돼왔지만, 총기를 소유할 권리는 미국의 헌법(수정헌법 2조)에 규정돼 있습니다.

총기 소유를 헌법 상의 권리로 보장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식민 개척 시절, 치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영국과의 유혈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들이 영국을 대신하게 된 연방정부의 독재를 우려해, 각 주가 민병대를 만들고 무기를 소유할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받고자 했던 겁니다.

물론 이제 미국에 치안이 미치지 않는 미개척지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고, 각 주가 민병대를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대형마트에서 반자동 소총을 살 수 있을 만큼(월마트는 이번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매장에서 반자동 소총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총기 소유가 자유로울까?

합법적인 로비, 돈의 정치, 이런 말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 전미총기협회, 회원 수가 5백만 명이 넘고 1년 예산이 3천억 원에 이르는 거대 이익단체입니다. "입법활동연구소"라는 공식 로비 기구를 가지고 있고, 관련 펀드까지 조성해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자금을 대는 '큰손' 역할을 합니다. 물론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총기 관련 입법이 추진될 때마다 NRA는 공식적으로 찬반을 표명하고 거센 로비를 펼칩니다.

이들의 강력한 로비 속에, 지난 2012년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은 빛을 보지 못했고, 지난 3월 발의된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사 강화 법안도 의회에서 긴 잠을 자고 있습니다.

두 기자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에도, 웨스트 버지니아에선 총을 든 고등학생이 선생님과 학생 서른 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고, 조지아의 한 대학에선 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져 학교가 폐쇄됐습니다.

"나도 이제 총을 갖겠다." 총기 규제 강화가 딸의 유산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숨진 여기자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CNN이 속보로 전하고 있습니다. 총기 규제 강화 캠페인에 나설 것이고, 그러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얘깁니다. 참 씁쓸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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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Love of My Life’ 필생의 사랑을 잃다…총·격·에
    • 입력 2015-09-01 00:10:02
    취재후·사건후
"오늘 아침 나는, 'Love of My Life', 필생의 사랑을 잃었다." 한 방송사 앵커의 말입니다. 여기자 앨리슨 파커와 같은 방송의 앵커 크리스 허스트는 연인이었습니다. 앨리슨은 아침뉴스 생방송 중에 총격을 당해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크리스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 악몽 같은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방송으로 말입니다. 앨리슨을 찍고 있던 카메라기자 애덤 워드도 역시 현장에서 총격에 희생됐습니다. 같은 방송사의 PD인 애덤의 연인은, 애인이 들고 있던 카메라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앵글을, 방송 조종실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여러 발의 총성과 앨리슨의 비명 소리가 함께 들렸습니다. 기자와 카메라기자가 총에 맞아 숨지는 끔찍한 장면이 뉴스 시간에 생방송된 겁니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지난달 26일 버지니아 주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젊은 연인들의 비극적 사랑으로 끝나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총기 소유, 인종 차별, 돈의 정치, 논란이라는 말로 맺음을 하기에는 결코 적절치 않은, 미국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매우 충격적으로 들춰내고 있습니다. ■ 범인은 흑인 동성애자, “인종전쟁 해보자”
용의자
베스터 리 플래니건, 마흔한 살, 함께 일했던 두 동료를 총으로 살해하고 경찰에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기자입니다. 그는 흑인이었고 동성애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의 학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교사였습니다. 집안은 유복했지만, 그 덕인지, 그 탓인지, 그가 자랐던 캘리포니아 주의 이스트 오클랜드는 흑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백인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플래니건은 직장에서 동료들과 불화가 잦았답니다. 그는, 이런 불화를 흑인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였다는 게 방송사 측의 설명입니다. 그는 숨진 두 기자에게도 인종차별적인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해고된 뒤에는 방송사를 인종 차별로 고소했지만 기각됐습니다. 범행 직후에 플래니건이 ABC 방송에 보낸 팩스를 보면, 그는, 지난 6월 찰스턴에서 벌어진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흑인들에게 총을 난사한 백인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인종전쟁을 벌이겠다고 적고 있습니다. ■ 미국 사회 ‘충격’…‘총기 규제 강화’ 대선 쟁점으로
용의자 SNS
플래니건은 한 손으로 총을 잡고 그 위에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총을 쏘면서 그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는 SNS에 그 끔찍한 영상을 올렸습니다. 총기 사건 사고가 잦은 나라지만, 총격 장면이 생방송되고 용의자가 찍은 영상까지 인터넷에 퍼지면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고 총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연히 커졌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서 총기 관련 사건 사고로 숨진 사람이 테러 희생자보다 많다."며 의회에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법을 조속히 만들라고 거듭,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도 힘을 보탰습니다. 반면 공화당 대선주자들은 대개 총기 규제 강화를 반대합니다. "칼로 살인을 한다고 칼을 규제하자고 할 건가?" "총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 질환이 문제다." 이런 말들이 공화당 대선주자들이 이번 사건 이후 TV에 출연해 총기 규제를 반대하면서 펼친 '논리'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에 공감을 할지는 모르지만. 총기 규제 문제는 미국 대선에서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습니다. ■ ‘합법적 로비’ 그리고 ‘돈의 정치’ 해석을 놓고 논란이 계속돼왔지만, 총기를 소유할 권리는 미국의 헌법(수정헌법 2조)에 규정돼 있습니다. 총기 소유를 헌법 상의 권리로 보장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식민 개척 시절, 치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영국과의 유혈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들이 영국을 대신하게 된 연방정부의 독재를 우려해, 각 주가 민병대를 만들고 무기를 소유할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받고자 했던 겁니다. 물론 이제 미국에 치안이 미치지 않는 미개척지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고, 각 주가 민병대를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대형마트에서 반자동 소총을 살 수 있을 만큼(월마트는 이번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매장에서 반자동 소총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총기 소유가 자유로울까? 합법적인 로비, 돈의 정치, 이런 말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 전미총기협회, 회원 수가 5백만 명이 넘고 1년 예산이 3천억 원에 이르는 거대 이익단체입니다. "입법활동연구소"라는 공식 로비 기구를 가지고 있고, 관련 펀드까지 조성해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자금을 대는 '큰손' 역할을 합니다. 물론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총기 관련 입법이 추진될 때마다 NRA는 공식적으로 찬반을 표명하고 거센 로비를 펼칩니다. 이들의 강력한 로비 속에, 지난 2012년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은 빛을 보지 못했고, 지난 3월 발의된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사 강화 법안도 의회에서 긴 잠을 자고 있습니다. 두 기자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에도, 웨스트 버지니아에선 총을 든 고등학생이 선생님과 학생 서른 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고, 조지아의 한 대학에선 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져 학교가 폐쇄됐습니다. "나도 이제 총을 갖겠다." 총기 규제 강화가 딸의 유산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숨진 여기자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CNN이 속보로 전하고 있습니다. 총기 규제 강화 캠페인에 나설 것이고, 그러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얘깁니다. 참 씁쓸한 소식입니다. [연관 기사] ☞ [뉴스광장] 미 기자 2명, 생방송 중 피살…용의자는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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