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수입품이 중기 제품으로 둔갑…검은 속내는?

입력 2015.11.25 (06:06) 수정 2015.11.2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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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제가 중소기업 제품으로 둔갑한 사연

'짝퉁명품'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유명 상표의 가방 등 사치품의 디자인을 베껴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정품이 아닌 물건에 상표를 위조해 붙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거꾸로 외국 유명회사 제품에 국내 중소기업의 상표를 스티커로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건물마다 온도와 환기를 조절하는 '빌딩 자동제어장치'가 들어갑니다. 열과 공기를 전달하는 환기구의 개폐를 조절하는 기계장치와 이를 제어하는 장치, 마지막으로 전체 시스템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건물마다 지하실에서 사진과 같은 공간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국내 상표 붙인 외제품국내 상표 붙인 외제품


숨겨져 있지만, 건물의 환경을 조절하는 대단히 중요한 설비죠. 그런데 다국적 기업에서 제작한 이 설비가 어쩐 일인지 국내 중소기업 상표가 부착된 채로 납품되고 있습니다.

■ 곳곳에 숨겨진 외제, 대기업 제품의 흔적

일부 업체가 납품한 제어장치의 경우 아예 외제품 겉면에 스티커로 국내 중소기업 상표를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자째 외제품을 사온 뒤에 스티커만 붙인 것이죠.

외제품외제품


좀 더 눈치를 보는 업체는 제어장치 상자와 일부 프로그램은 직접 제작합니다. 하지만 내부에는 'Made in Germany' 등 외제 부품투성이입니다. 시스템 관리 프로그램에도 곳곳에 외국 기업이나 국내 대기업의 로고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유명 외국 기업의 로고를 드러내놓고 납품하는 게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기 좋을 텐데 굳이 국내 중소기업의 상표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간판은 중소기업, 실상은…

이유는 바로 중소기업 제품만 납품대상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건물을 지을 때 빌딩 자동제어장치는 중소기업 제품만 납품하게 돼 있습니다.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장려하기 위해서 만든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제도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중소기업은 기술개발을 하기보다 외제나 대기업 제품을 사 와서 설치만 해주거나 상자를 만들고 보완 프로그램을 함께 설치하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파악한 바로는 300여 곳에 이르는 납품 대상 국내 중소기업 가운데 소수만 제어장치와 관리프로그램 제작능력이 있습니다. 나머지 업체는 설치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억울한 것은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들입니다. 연구소를 갖추고 몇 년씩 기술개발에 매달려야 제어장치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데, 어떤 중소기업은 사실상 설치업체 역할로 공공기관 납품계약을 따내는 것입니다. 세종대 기계공학과 신영기 교수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위해 도입된 제도의 허점을 노린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침투해 들어와서 중소기업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제도로

당국은 이런 실상을 알고 있을까요? 진짜 중소기업 제품이 맞는지 확인하는 '직접생산확인제'를 운영하는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중앙회도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모두가 불법인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원래 제어장치나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하는 능력이 있는 업체에만 납품자격을 주는 게 맞지만,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 수준이 낮아서 어쩔 수 없이 완화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게 중소기업중앙회의 설명입니다.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 차차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대리점 역할만으로 충분한 이윤을 낼 수 있다면 누구나 위험부담이 큰 기술개발에 뛰어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 조달시장에서 중소기업 제품만을 납품받는 품목인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은 '빌딩 자동제어장치'를 포함해 200여 개에 이릅니다. 과연 다른 품목의 경우에도 스티커를 붙여서 납품하는 경우가 없을까요?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 판로를 지원하는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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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9] [현장추적] 무늬만 ‘중소기업 제품’…부품은 외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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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수입품이 중기 제품으로 둔갑…검은 속내는?
    • 입력 2015-11-25 06:06:32
    • 수정2015-11-25 07:58:54
    취재후·사건후
■ 외제가 중소기업 제품으로 둔갑한 사연

'짝퉁명품'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유명 상표의 가방 등 사치품의 디자인을 베껴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정품이 아닌 물건에 상표를 위조해 붙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거꾸로 외국 유명회사 제품에 국내 중소기업의 상표를 스티커로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건물마다 온도와 환기를 조절하는 '빌딩 자동제어장치'가 들어갑니다. 열과 공기를 전달하는 환기구의 개폐를 조절하는 기계장치와 이를 제어하는 장치, 마지막으로 전체 시스템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건물마다 지하실에서 사진과 같은 공간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국내 상표 붙인 외제품


숨겨져 있지만, 건물의 환경을 조절하는 대단히 중요한 설비죠. 그런데 다국적 기업에서 제작한 이 설비가 어쩐 일인지 국내 중소기업 상표가 부착된 채로 납품되고 있습니다.

■ 곳곳에 숨겨진 외제, 대기업 제품의 흔적

일부 업체가 납품한 제어장치의 경우 아예 외제품 겉면에 스티커로 국내 중소기업 상표를 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자째 외제품을 사온 뒤에 스티커만 붙인 것이죠.

외제품


좀 더 눈치를 보는 업체는 제어장치 상자와 일부 프로그램은 직접 제작합니다. 하지만 내부에는 'Made in Germany' 등 외제 부품투성이입니다. 시스템 관리 프로그램에도 곳곳에 외국 기업이나 국내 대기업의 로고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유명 외국 기업의 로고를 드러내놓고 납품하는 게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기 좋을 텐데 굳이 국내 중소기업의 상표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간판은 중소기업, 실상은…

이유는 바로 중소기업 제품만 납품대상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건물을 지을 때 빌딩 자동제어장치는 중소기업 제품만 납품하게 돼 있습니다.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장려하기 위해서 만든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제도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중소기업은 기술개발을 하기보다 외제나 대기업 제품을 사 와서 설치만 해주거나 상자를 만들고 보완 프로그램을 함께 설치하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파악한 바로는 300여 곳에 이르는 납품 대상 국내 중소기업 가운데 소수만 제어장치와 관리프로그램 제작능력이 있습니다. 나머지 업체는 설치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억울한 것은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들입니다. 연구소를 갖추고 몇 년씩 기술개발에 매달려야 제어장치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데, 어떤 중소기업은 사실상 설치업체 역할로 공공기관 납품계약을 따내는 것입니다. 세종대 기계공학과 신영기 교수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위해 도입된 제도의 허점을 노린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앞에 내세우고 침투해 들어와서 중소기업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제도로

당국은 이런 실상을 알고 있을까요? 진짜 중소기업 제품이 맞는지 확인하는 '직접생산확인제'를 운영하는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중앙회도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모두가 불법인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원래 제어장치나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하는 능력이 있는 업체에만 납품자격을 주는 게 맞지만,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 수준이 낮아서 어쩔 수 없이 완화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게 중소기업중앙회의 설명입니다.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 차차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대리점 역할만으로 충분한 이윤을 낼 수 있다면 누구나 위험부담이 큰 기술개발에 뛰어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 조달시장에서 중소기업 제품만을 납품받는 품목인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은 '빌딩 자동제어장치'를 포함해 200여 개에 이릅니다. 과연 다른 품목의 경우에도 스티커를 붙여서 납품하는 경우가 없을까요?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 판로를 지원하는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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