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카리브해에 피다

입력 2015.11.29 (22:56) 수정 2015.11.3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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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녹취> "쿠바의 임천택, 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에 후원하며.."

이역만리 중남미 쿠바에서 중국 대륙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진 독립운동 자금.

<인터뷰> 권영신(미국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 "우리 상해 임시정부의 모든 안방 살림을 한 80% 정도를 대한인국민회에서 조달을 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나라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열대의 낯선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프닝>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만주에서, 중국 대륙에서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 펼쳐졌습니다.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 미국과 멕시코, 쿠바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난 이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힘겨운 타향살이를 하면서, 어떻게 조국을 잊지 않고 독립을 꿈꾸게 되었을까요?

열대의 태양보다 뜨거웠던 카리브해의 독립운동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1921년,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에 한인 300명이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 같은 대규모 에네켄 농장 지대에 공동체를 이뤄 살았습니다.

에네켄은 선인장의 일종으로 섬유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중남미에서 대규모로 재배된 작물입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림 알롱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처장) : "처음에는 작은 촌락에 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갈라져 살았습니다."

이들은 16년 전인 1905년, 일포드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로 이민 온 천여 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인터뷰> 호세 뚜리히오 뽄세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부원장) : "이미 그 세기 말에 에네켄 산업은 멕시코의 발전된 산업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멕시코보다 더 나은 환경을 기대하고 쿠바를 선택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비인간적인 혹독한 노동이었습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차로 3시간을 달리면, 쿠바 이주 한인들이 처음으로 마을을 이뤘던 마탄사스 엘볼로농장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일리안 에레라 페레스(쿠바 엘볼로 주민) : "여기에 한국인이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아마 예배당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낮이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땡볕 아래 하루 12시간 넘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림 알롱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사무처장) : "우리의 조부모님들과 부모님들이 말씀해주신 것에 따르면, 그들은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 3달러 안팎의 적은 임금을 받고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1937년, 3백60 달러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인국민회에 전달된 것만 수천 달러에 달합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대부분 다 일용노동자의 신분으로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급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민족 독립이라든지 민족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앞장서서 독립금 광복 후원금, 의무금 각종 명목으로.."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독립 자금을 보내준 동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쿠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끈 임천택 선생..

임천택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당시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던 임천택과 함께 1905년 멕시코 이민선을 탔습니다.

<인터뷰>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할아버지는 항일 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조부는 안토니아 할머니에게 그들이 죽이러 오니 아들과 함께 떠나라고 말했다고.."

임천택은 10대 후반 쿠바로 이주했고 쿠바 한인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임천택 선생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천도교 쿠바 종리원을 세우고 항일 운동에 불을 붙입니다.

<녹취> 심국보(천도교 신인간지 편집주간) : "한국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게 그럼 동학이고, 천도교구나 그런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임선생의 자녀들은 임천택이 어린 시절 동학농민혁명 사상을 가르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민족 종교를 이어나갔다고 증언합니다.

<녹취>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항상 그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녀가 항상 그것에 대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저는 제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 근교의 공업지역인 마탄사스.

이 곳이 바로 임천택을 중심으로 한 쿠바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던 현장입니다.

쿠바 한인들은 일본 영사관이 요구한 재외국민 등록을 거부하면서 일본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저항 운동을 벌입니다.

이들은 일본의 계속된 압력에 맞서기 위해 미주의 임시정부로 불리는 대한인 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조직해 쿠바 정부에 통보했습니다.

1942년 미국 독립기념일과 중국 항전기념일에는 쿠바 대사를 통해 미국과 중국 정부에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단순히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문제가 아니었고, 일본과 싸우는 미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탄사스에서 2시간 거리 떨어진 쿠바의 대표적 농업지역 카르데나스의 한 주택가.

낡고 허름한 건물이 눈에 띕니다.

1930년에 세운 천도교 쿠바 종리원 건물입니다.

지금은 쿠바인들이 교회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지역에 있던 2백 명 가까운 한인 대부분이 몸담았던 천도교 예배당이었습니다.

쿠바 한인들은 동학에서 시작된 천도교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꾼 쿠바 한인들은 천도교 헌금 방식을 따라 끼니 때마다 사람 수대로 곡식 한숟가락씩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독립자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많게는 천 달러 이상 전달됐습니다.

초대 김세원을 시작으로 모두 8명의 천도교 종리원장을 거치는 8년 동안 건물을 구입하지 못해 예배당을 여러차례 옮겨다녀야 했지만, 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조차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그 당시 한국인 후손들은 굉장히 힘들게 살았는데도 한국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습니다."

마탄사스의 한 빈민가.

이곳에서도 가장 허름한 축에 속하는 이 건물은, 한글을 가르치는 민성학교였습니다.

쿠바 이민 초기였던 1922년, 작은 야학으로 시작한 민성학교는 이후 20여 년 동안 현지 정규 학교와 나란히 백 명이 넘는 한인 2세를 교육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카르데나스에 또 다른 한글 학교, 진성학교가 설립됩니다.

카르데나스 진성학교는 지방 정부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설립돼 한해 10~20명의 한인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인터뷰>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민성학교는 후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즉 우리가 온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던 곳입니다."

학자들은 쿠바 한인들을 결속시킨 천도교가 단순한 민족 종교 이상의 의미였다고 분석합니다.

<인터뷰> 에드워드 장(미국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교수) :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그 후손으로 미주지역, 멕시코, 쿠바에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고 봅니다."

쿠바 한인들에게 이토록 각별했던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하지만, 식민지 조국의 천도교가 친일 노선을 걸으면서 쿠바의 항일 독립운동도 추진력을 잃고 맙니다.

<인터뷰> 성주현(민족운동사학회 이사) : "친일적인 일제 협력적인 그런 활동들이 이제 없잖아 보이고 있는 거죠. 이런 것들이 쿠바 같은 사회에 천도교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1961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대한민국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쿠바 한인들의 항일운동은 한동안 잊혀진 역사가 됐습니다.

해방 이후 쿠바 한인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임천택 선생이 유일합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자신의 부를 민족 독립 운동에 헌신적으로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인물들이었죠. 이런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대한여자애국단을 만들어서 활동했던 여성 인물들.."

백여 년전 쿠바가 조선 이민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쿠바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입니다.

<녹취> 쿠바 한글학교 수강생 : "한국의 문화 패션 도시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한국에 가고 싶어요"

<녹취> 쿠바 택시기사 : "한국차 현대 기아는 어떤 차들보다 품질이 좋습니다 "

식민지 조국을 등지고 머나먼 쿠바 땅에 정착해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300명의 한인들..

그들의 후손 천 백여명은 독립과 번영을 일군 조국의 모습을 보면서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이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안토니오 김(쿠바 한인 3세) : "한국 경제수준이 11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인이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미국과의 수교 이후 쿠바 정부가 서방세계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한국 정부도 쿠바와 재 수교를 추진하는 등 새로운 협력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 세기 전 두 나라 사이의 교류를 텄던 한인 이주자들이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애쓴 역사의 흔적을 기리고 보존하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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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두꽃, 카리브해에 피다
    • 입력 2015-11-29 23:26:26
    • 수정2015-11-30 00:13:48
    취재파일K
<프롤로그>

<녹취> "쿠바의 임천택, 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에 후원하며.."

이역만리 중남미 쿠바에서 중국 대륙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진 독립운동 자금.

<인터뷰> 권영신(미국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 "우리 상해 임시정부의 모든 안방 살림을 한 80% 정도를 대한인국민회에서 조달을 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나라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열대의 낯선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프닝>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만주에서, 중국 대륙에서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 펼쳐졌습니다.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 미국과 멕시코, 쿠바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난 이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힘겨운 타향살이를 하면서, 어떻게 조국을 잊지 않고 독립을 꿈꾸게 되었을까요?

열대의 태양보다 뜨거웠던 카리브해의 독립운동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 1921년,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에 한인 300명이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 같은 대규모 에네켄 농장 지대에 공동체를 이뤄 살았습니다.

에네켄은 선인장의 일종으로 섬유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중남미에서 대규모로 재배된 작물입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림 알롱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처장) : "처음에는 작은 촌락에 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갈라져 살았습니다."

이들은 16년 전인 1905년, 일포드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로 이민 온 천여 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인터뷰> 호세 뚜리히오 뽄세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부원장) : "이미 그 세기 말에 에네켄 산업은 멕시코의 발전된 산업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멕시코보다 더 나은 환경을 기대하고 쿠바를 선택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비인간적인 혹독한 노동이었습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차로 3시간을 달리면, 쿠바 이주 한인들이 처음으로 마을을 이뤘던 마탄사스 엘볼로농장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일리안 에레라 페레스(쿠바 엘볼로 주민) : "여기에 한국인이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아마 예배당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낮이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땡볕 아래 하루 12시간 넘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림 알롱소(쿠바 호세마르띠문화원 사무처장) : "우리의 조부모님들과 부모님들이 말씀해주신 것에 따르면, 그들은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 3달러 안팎의 적은 임금을 받고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1937년, 3백60 달러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인국민회에 전달된 것만 수천 달러에 달합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대부분 다 일용노동자의 신분으로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급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민족 독립이라든지 민족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앞장서서 독립금 광복 후원금, 의무금 각종 명목으로.."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독립 자금을 보내준 동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쿠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끈 임천택 선생..

임천택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당시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던 임천택과 함께 1905년 멕시코 이민선을 탔습니다.

<인터뷰>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할아버지는 항일 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조부는 안토니아 할머니에게 그들이 죽이러 오니 아들과 함께 떠나라고 말했다고.."

임천택은 10대 후반 쿠바로 이주했고 쿠바 한인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임천택 선생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천도교 쿠바 종리원을 세우고 항일 운동에 불을 붙입니다.

<녹취> 심국보(천도교 신인간지 편집주간) : "한국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게 그럼 동학이고, 천도교구나 그런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임선생의 자녀들은 임천택이 어린 시절 동학농민혁명 사상을 가르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민족 종교를 이어나갔다고 증언합니다.

<녹취>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항상 그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녀가 항상 그것에 대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저는 제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쿠바 수도 아바나 근교의 공업지역인 마탄사스.

이 곳이 바로 임천택을 중심으로 한 쿠바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던 현장입니다.

쿠바 한인들은 일본 영사관이 요구한 재외국민 등록을 거부하면서 일본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저항 운동을 벌입니다.

이들은 일본의 계속된 압력에 맞서기 위해 미주의 임시정부로 불리는 대한인 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조직해 쿠바 정부에 통보했습니다.

1942년 미국 독립기념일과 중국 항전기념일에는 쿠바 대사를 통해 미국과 중국 정부에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단순히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문제가 아니었고, 일본과 싸우는 미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탄사스에서 2시간 거리 떨어진 쿠바의 대표적 농업지역 카르데나스의 한 주택가.

낡고 허름한 건물이 눈에 띕니다.

1930년에 세운 천도교 쿠바 종리원 건물입니다.

지금은 쿠바인들이 교회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지역에 있던 2백 명 가까운 한인 대부분이 몸담았던 천도교 예배당이었습니다.

쿠바 한인들은 동학에서 시작된 천도교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꾼 쿠바 한인들은 천도교 헌금 방식을 따라 끼니 때마다 사람 수대로 곡식 한숟가락씩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독립자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많게는 천 달러 이상 전달됐습니다.

초대 김세원을 시작으로 모두 8명의 천도교 종리원장을 거치는 8년 동안 건물을 구입하지 못해 예배당을 여러차례 옮겨다녀야 했지만, 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조차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세르히오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그 당시 한국인 후손들은 굉장히 힘들게 살았는데도 한국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습니다."

마탄사스의 한 빈민가.

이곳에서도 가장 허름한 축에 속하는 이 건물은, 한글을 가르치는 민성학교였습니다.

쿠바 이민 초기였던 1922년, 작은 야학으로 시작한 민성학교는 이후 20여 년 동안 현지 정규 학교와 나란히 백 명이 넘는 한인 2세를 교육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카르데나스에 또 다른 한글 학교, 진성학교가 설립됩니다.

카르데나스 진성학교는 지방 정부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설립돼 한해 10~20명의 한인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인터뷰> 프리미티보 임(재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아들) : "민성학교는 후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즉 우리가 온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던 곳입니다."

학자들은 쿠바 한인들을 결속시킨 천도교가 단순한 민족 종교 이상의 의미였다고 분석합니다.

<인터뷰> 에드워드 장(미국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교수) :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그 후손으로 미주지역, 멕시코, 쿠바에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고 봅니다."

쿠바 한인들에게 이토록 각별했던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하지만, 식민지 조국의 천도교가 친일 노선을 걸으면서 쿠바의 항일 독립운동도 추진력을 잃고 맙니다.

<인터뷰> 성주현(민족운동사학회 이사) : "친일적인 일제 협력적인 그런 활동들이 이제 없잖아 보이고 있는 거죠. 이런 것들이 쿠바 같은 사회에 천도교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1961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대한민국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쿠바 한인들의 항일운동은 한동안 잊혀진 역사가 됐습니다.

해방 이후 쿠바 한인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임천택 선생이 유일합니다.

<인터뷰> 홍선표(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 "자신의 부를 민족 독립 운동에 헌신적으로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인물들이었죠. 이런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대한여자애국단을 만들어서 활동했던 여성 인물들.."

백여 년전 쿠바가 조선 이민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쿠바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입니다.

<녹취> 쿠바 한글학교 수강생 : "한국의 문화 패션 도시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한국에 가고 싶어요"

<녹취> 쿠바 택시기사 : "한국차 현대 기아는 어떤 차들보다 품질이 좋습니다 "

식민지 조국을 등지고 머나먼 쿠바 땅에 정착해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300명의 한인들..

그들의 후손 천 백여명은 독립과 번영을 일군 조국의 모습을 보면서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이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안토니오 김(쿠바 한인 3세) : "한국 경제수준이 11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인이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미국과의 수교 이후 쿠바 정부가 서방세계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한국 정부도 쿠바와 재 수교를 추진하는 등 새로운 협력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 세기 전 두 나라 사이의 교류를 텄던 한인 이주자들이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애쓴 역사의 흔적을 기리고 보존하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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