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해외 떠도는 北 로열 패밀리

입력 2015.12.12 (08:06) 수정 2015.12.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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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모인 고용숙 씨 부부의 탈북자 소송을 계기로 해외에 거주하는, 이른바 북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남북의 창> 취재진은 언론으로써는 처음으로 고용숙 씨의 남편이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모부인 리강 씨를 인터뷰해 직접 심경을 들었는데요.

해외 체류중인 북한의 로열패밀리는 누구인지, 이들이 해외로 나간 이유는 무엇인지 리강 씨와의 심층인터뷰와 함께 <클로즈업북한>에서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리포트>

서울 시내 한 변호사 사무실.

지난달 한 통의 이메일이 이곳에 도착했다.

소송을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직접 사무실에 찾아왔다.

<인터뷰> 강용석(고용숙 씨 부부 소송 대리인) : "11월 30일 9시에 만날 수 있느냐, 만날 수 있다 해가지고 오셨어요. 그때까지는 전혀 누군지도 모르고 했는데 딱 오시자마자, 앉자마자 하는 얘기가“제가 북에서 왔습니다.”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깜짝 놀랐죠."

바로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이모부.

고용숙 씨 남편 ‘리 강’이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특정 탈북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용숙 씨 부부는 지난 1998년부터 미국 정보 당국의 보호 아래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남북의 창 취재진은 어렵게 성사된 고용숙 씨 남편 리 강 씨와의 통화에서, 소송의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그 사람들이(탈북자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무슨 (비자금) 30만 달러를 훔쳐 가져가고 뭐 이상한 말을 많이 해요. 우리 와이프 언니(고용희)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정말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정말 입에 담기 힘든 정도의 방송을 하더라고요. 이거 정말 안 되겠다.."

취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김정은 제 1위원장 어머니의 이름이 그동안 알려진 ‘고영희’가 아닌 ‘고용희’로, ‘용’자 돌림을 쓴다는 것이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용자 돌림이 맞는 건가요?) 그렇죠, 용자 돌림이 맞고... (고영희 씨도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가 맞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얼굴용이라 그랬었어요. 내 기억에는, ‘얼굴 용’(容)."

고용숙 씨 부부가 주목받는 건, 김정은 제 1위원장과의 인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것으로 알려진 김 제 1위원장.

이모인 고용숙이 당시 10대의 김정은을 뒷바라지했다고 이모부 리 강 씨는 밝혔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숙식하고 학교가고 하는 것들 돌봐주는 거죠. 책임적인 위치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서 거기서 필요한 걸 돌봐준 거죠."

가까이서 지켜본 김정은은 어땠을까.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김정은은)지나갔으니까 말하지만 운동 좋아하고 참 화끈할 땐 화끈하고 그런 걸로 생각하면 돼요. (김여정은) 여자니까 성격 자체는 좋았어요 그때는..지금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지난 1998년 미국 망명을 결행했던 이유도 밝혔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김정일 위원장 옆에서 한 20년 살면서 권력의 무상함이라 할까 권력의 비정함이라 할까 원리, 이치 이런 것들이 터득되면서 권력 가까운데 있는 게 크게 좋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그저 나올 때 (김정은에게) 정말 정중한 편지 하나 써 놓고, 열심히 살아 보겠다 그렇게 하고 나온 겁니다."

오랜 잠행 끝에 모습을 드러낸 고용숙 부부.

이들의 등장과 함께, 해외를 떠도는 북한 로열패밀리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 씨 세습 체제로 이루어진 북한 로열패밀리의 가계도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해외 행을 택한 인물은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 성혜림이다.

당시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혼인 사실을 여고 동창이자 절친했던 친구에게 귀띔했다고 한다.

탈북자 김영순 씨였다.

<인터뷰> 김영순(성혜림 고교 동창/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 "혜림이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려서 내가 문을 열고 나갔어요.‘나 5호 댁에 간다.’그러더라고.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듣는 이 금시초문이니까.‘오늘 너하고 나하고 만나는 게 마지막이네. 관저에 들어가면 사회와 단절이 되니까 못 보겠구나.’이런 말만 하고 갔어요. 그 후에 못 봤어요."

그리고 1971년 김정남의 출생.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시아버지 김일성의 반대에 새로운 여자, 훗날 김정은의 생모가 되는 고용희까지 등장한 것이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성혜림은 결국 1974년, 모스크바 행을 택한다.

당시 성혜림이 살던 모스크바 아파트, 마지막으로 행적이 확인된 스위스 별장이 KBS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새 여자 고용희가 오면서 성혜림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됐고 평양에 남아서 입장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래서 해외로 나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김정일과의 관계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혼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수용소 행'이라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인터뷰> 김영순(성혜림 고교 동창/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며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것은 새빨간 유언비어다. 다시 한 번 어디서 들었거나 유발할 때는 용서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때 내가 아, 성혜림 때문에 내가 요덕에 갔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성혜림 일가 역시 더 이상 북한에 머무를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부터 성혜림을 돌본 언니 성혜랑과 두 자녀 한영, 남옥은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특히 국제사회의 이목을 끈 건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이한영이였다.

이한영은 망명 후 북한 로열패밀리의 삶을 폭로하는 책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1997년 2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녹취> KBS 9시 뉴스(1997년 2월 16일) : "괴한들의 총격에 쓰러진 이한영 씨...총격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6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소생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입니다."

집 앞에서 북한 공작원의 총에 맞은 것이다.

이 씨는 열흘 뒤 숨졌다.

이 사건은 해외에 거주하는 다른 로열패밀리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어머니 성혜랑과 함께 프랑스에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이한영의 여동생 이남옥은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신변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녹취> CNN 인터뷰(이남옥/이한영 동생/1997년 10월) : "나에게는 암살당한 오빠(이한영)가 있는데 15년 전에 제네바에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지난해 말에 서울에서 나타났는데 암살당했죠. 그래서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이 두려워요."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로열패밀리들이 해외에 나간다면 북한 권력의 독재성, 인민을 돌보지 않고 그들만 챙기는 그런 권력자의 어두운 측면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체제를 약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 발로 외국 행을 택하는가 하면, 북한 당국의 압력에 의해 해외를 전전하는 로열패밀리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다.

김정남의 행적이 처음 국제사회에 알려진 건 지난 2001년,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되면서였다.

이후 마카오 등지를 떠돌던 김정남은 김정은 후계 세습이 확정된 2010년, 일본 아사히 TV를 통해 3대 세습 반대 목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한동안 행적을 감췄던 김정남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학생 아들 김한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한솔의 존재는 2013년 KBS의 취재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녹취> KBS 인터뷰(김한솔/김정남 아들/2013년) : "(국제관계를 공부할 계획입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김한솔은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언급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녹취> 핀란드 YLE 인터뷰(김한솔/김정남 아들/2012년) : "항상 할아버지가 날 찾기를 기다리고 기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해외에서 도피에 가까운 은둔 생활을 하는 김정남 김한솔 부자.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가계 세습 구조에서 경쟁이 되거나 위해가 될 수 있는 형제들은 제거될 필요가 있죠. 그러기 때문에 외유 방식을 통해서 해외에서 실권이 없는 상태에서 떠돌게 되는 것이고요."

이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김정일이 2대 세습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한 이복동생 김평일을 외교관으로 임명하고 서둘러 해외로 내보낸 것이다.

지난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35년 넘게 해외를 떠돌고 있는 김평일.

여기에 20년 째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경진, 해외 공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다 숨진 영일 등 이른바 ‘곁가지’로 분류된 로열패밀리들의 해외 생활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인물도 존재한다.

지난 5월, 팝스타 ‘에릭 클랩튼’의 공연장에 가죽재킷 차림의 한 남성이 들어온다.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이다.

<녹취> "북한에서 지위가 어떻습니까? 동생 김정은과 사이가 어떻습니까?"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여인과 귓속말을 주고받고, 흥에 겨워 환호하는 모습..

지난 2011년, 싱가포르의 공연장에서 포착된 지 4년 만에 다시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내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유롭게 해외를 드나드는 김정철의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 "두 가지 의도가 있겠죠. 나는 권력에 뜻이 없다는 것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고, 또 본인이 정말로 태생적으로 성격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거죠. 김정철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죠. 그의 생존 방식은 권력을 넘봐서도 안 되고, 그러나 평양에 살아야 되기 때문에 권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함으로서 동생의 눈치 속에 살아가는..."

반면, 최고지도자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로열패밀리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다

지난 10월 10일 북한의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연설하는 김정은의 뒤로 시종 카메라에 잡히는 인물이 바로 김여정이다.

‘당 부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오빠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필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김여정의 행보는 김정일 시대 오랜 세월 북한의 권력 실세로 군림한 김경희와 매우 유사하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사실은 가계 세습에서 가장 중요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친족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김경희라든지, 그 다음에 김여정이라든지, 이렇게 협력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권력 구조에 긴밀히 포섭이 되면서 권력 안정화에 기여를 하는 그런 구조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나의 핏줄에서 태어나 누군가는 최고 권력자가, 다른 누구는 고국 땅에 발붙이기도 어려운 북한 로열패밀리의 세계!

그러나 시대를 역행하는 세습 제도와 해외를 떠도는 북한 로열패밀리는 결국 체제 와해를 재촉하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공통된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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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해외 떠도는 北 로열 패밀리
    • 입력 2015-12-12 08:12:01
    • 수정2015-12-12 13:42:23
    남북의 창
<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모인 고용숙 씨 부부의 탈북자 소송을 계기로 해외에 거주하는, 이른바 북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남북의 창> 취재진은 언론으로써는 처음으로 고용숙 씨의 남편이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모부인 리강 씨를 인터뷰해 직접 심경을 들었는데요.

해외 체류중인 북한의 로열패밀리는 누구인지, 이들이 해외로 나간 이유는 무엇인지 리강 씨와의 심층인터뷰와 함께 <클로즈업북한>에서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리포트>

서울 시내 한 변호사 사무실.

지난달 한 통의 이메일이 이곳에 도착했다.

소송을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직접 사무실에 찾아왔다.

<인터뷰> 강용석(고용숙 씨 부부 소송 대리인) : "11월 30일 9시에 만날 수 있느냐, 만날 수 있다 해가지고 오셨어요. 그때까지는 전혀 누군지도 모르고 했는데 딱 오시자마자, 앉자마자 하는 얘기가“제가 북에서 왔습니다.”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깜짝 놀랐죠."

바로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이모부.

고용숙 씨 남편 ‘리 강’이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특정 탈북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용숙 씨 부부는 지난 1998년부터 미국 정보 당국의 보호 아래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었다.

남북의 창 취재진은 어렵게 성사된 고용숙 씨 남편 리 강 씨와의 통화에서, 소송의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그 사람들이(탈북자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무슨 (비자금) 30만 달러를 훔쳐 가져가고 뭐 이상한 말을 많이 해요. 우리 와이프 언니(고용희)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정말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정말 입에 담기 힘든 정도의 방송을 하더라고요. 이거 정말 안 되겠다.."

취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김정은 제 1위원장 어머니의 이름이 그동안 알려진 ‘고영희’가 아닌 ‘고용희’로, ‘용’자 돌림을 쓴다는 것이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용자 돌림이 맞는 건가요?) 그렇죠, 용자 돌림이 맞고... (고영희 씨도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가 맞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얼굴용이라 그랬었어요. 내 기억에는, ‘얼굴 용’(容)."

고용숙 씨 부부가 주목받는 건, 김정은 제 1위원장과의 인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것으로 알려진 김 제 1위원장.

이모인 고용숙이 당시 10대의 김정은을 뒷바라지했다고 이모부 리 강 씨는 밝혔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숙식하고 학교가고 하는 것들 돌봐주는 거죠. 책임적인 위치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서 거기서 필요한 걸 돌봐준 거죠."

가까이서 지켜본 김정은은 어땠을까.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김정은은)지나갔으니까 말하지만 운동 좋아하고 참 화끈할 땐 화끈하고 그런 걸로 생각하면 돼요. (김여정은) 여자니까 성격 자체는 좋았어요 그때는..지금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지난 1998년 미국 망명을 결행했던 이유도 밝혔다.

<녹취> 리 강(김정은 제 1위원장 이모부) : "김정일 위원장 옆에서 한 20년 살면서 권력의 무상함이라 할까 권력의 비정함이라 할까 원리, 이치 이런 것들이 터득되면서 권력 가까운데 있는 게 크게 좋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그저 나올 때 (김정은에게) 정말 정중한 편지 하나 써 놓고, 열심히 살아 보겠다 그렇게 하고 나온 겁니다."

오랜 잠행 끝에 모습을 드러낸 고용숙 부부.

이들의 등장과 함께, 해외를 떠도는 북한 로열패밀리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 씨 세습 체제로 이루어진 북한 로열패밀리의 가계도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해외 행을 택한 인물은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 성혜림이다.

당시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혼인 사실을 여고 동창이자 절친했던 친구에게 귀띔했다고 한다.

탈북자 김영순 씨였다.

<인터뷰> 김영순(성혜림 고교 동창/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 "혜림이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려서 내가 문을 열고 나갔어요.‘나 5호 댁에 간다.’그러더라고.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듣는 이 금시초문이니까.‘오늘 너하고 나하고 만나는 게 마지막이네. 관저에 들어가면 사회와 단절이 되니까 못 보겠구나.’이런 말만 하고 갔어요. 그 후에 못 봤어요."

그리고 1971년 김정남의 출생.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시아버지 김일성의 반대에 새로운 여자, 훗날 김정은의 생모가 되는 고용희까지 등장한 것이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성혜림은 결국 1974년, 모스크바 행을 택한다.

당시 성혜림이 살던 모스크바 아파트, 마지막으로 행적이 확인된 스위스 별장이 KBS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새 여자 고용희가 오면서 성혜림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됐고 평양에 남아서 입장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래서 해외로 나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김정일과의 관계 역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혼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수용소 행'이라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인터뷰> 김영순(성혜림 고교 동창/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며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것은 새빨간 유언비어다. 다시 한 번 어디서 들었거나 유발할 때는 용서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때 내가 아, 성혜림 때문에 내가 요덕에 갔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성혜림 일가 역시 더 이상 북한에 머무를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부터 성혜림을 돌본 언니 성혜랑과 두 자녀 한영, 남옥은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특히 국제사회의 이목을 끈 건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이한영이였다.

이한영은 망명 후 북한 로열패밀리의 삶을 폭로하는 책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1997년 2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녹취> KBS 9시 뉴스(1997년 2월 16일) : "괴한들의 총격에 쓰러진 이한영 씨...총격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6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소생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입니다."

집 앞에서 북한 공작원의 총에 맞은 것이다.

이 씨는 열흘 뒤 숨졌다.

이 사건은 해외에 거주하는 다른 로열패밀리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어머니 성혜랑과 함께 프랑스에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이한영의 여동생 이남옥은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신변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녹취> CNN 인터뷰(이남옥/이한영 동생/1997년 10월) : "나에게는 암살당한 오빠(이한영)가 있는데 15년 전에 제네바에서 사라졌어요. 그리고 지난해 말에 서울에서 나타났는데 암살당했죠. 그래서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이 두려워요."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로열패밀리들이 해외에 나간다면 북한 권력의 독재성, 인민을 돌보지 않고 그들만 챙기는 그런 권력자의 어두운 측면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체제를 약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 발로 외국 행을 택하는가 하면, 북한 당국의 압력에 의해 해외를 전전하는 로열패밀리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다.

김정남의 행적이 처음 국제사회에 알려진 건 지난 2001년,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되면서였다.

이후 마카오 등지를 떠돌던 김정남은 김정은 후계 세습이 확정된 2010년, 일본 아사히 TV를 통해 3대 세습 반대 목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한동안 행적을 감췄던 김정남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학생 아들 김한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한솔의 존재는 2013년 KBS의 취재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녹취> KBS 인터뷰(김한솔/김정남 아들/2013년) : "(국제관계를 공부할 계획입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김한솔은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언급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녹취> 핀란드 YLE 인터뷰(김한솔/김정남 아들/2012년) : "항상 할아버지가 날 찾기를 기다리고 기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해외에서 도피에 가까운 은둔 생활을 하는 김정남 김한솔 부자.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가계 세습 구조에서 경쟁이 되거나 위해가 될 수 있는 형제들은 제거될 필요가 있죠. 그러기 때문에 외유 방식을 통해서 해외에서 실권이 없는 상태에서 떠돌게 되는 것이고요."

이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김정일이 2대 세습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한 이복동생 김평일을 외교관으로 임명하고 서둘러 해외로 내보낸 것이다.

지난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35년 넘게 해외를 떠돌고 있는 김평일.

여기에 20년 째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경진, 해외 공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다 숨진 영일 등 이른바 ‘곁가지’로 분류된 로열패밀리들의 해외 생활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인물도 존재한다.

지난 5월, 팝스타 ‘에릭 클랩튼’의 공연장에 가죽재킷 차림의 한 남성이 들어온다.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이다.

<녹취> "북한에서 지위가 어떻습니까? 동생 김정은과 사이가 어떻습니까?"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여인과 귓속말을 주고받고, 흥에 겨워 환호하는 모습..

지난 2011년, 싱가포르의 공연장에서 포착된 지 4년 만에 다시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내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유롭게 해외를 드나드는 김정철의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터뷰> 남성욱(고려대학교 북한학과) : "두 가지 의도가 있겠죠. 나는 권력에 뜻이 없다는 것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고, 또 본인이 정말로 태생적으로 성격상으로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거죠. 김정철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죠. 그의 생존 방식은 권력을 넘봐서도 안 되고, 그러나 평양에 살아야 되기 때문에 권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함으로서 동생의 눈치 속에 살아가는..."

반면, 최고지도자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로열패밀리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김정은 제 1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다

지난 10월 10일 북한의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연설하는 김정은의 뒤로 시종 카메라에 잡히는 인물이 바로 김여정이다.

‘당 부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오빠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필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김여정의 행보는 김정일 시대 오랜 세월 북한의 권력 실세로 군림한 김경희와 매우 유사하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사실은 가계 세습에서 가장 중요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친족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김경희라든지, 그 다음에 김여정이라든지, 이렇게 협력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권력 구조에 긴밀히 포섭이 되면서 권력 안정화에 기여를 하는 그런 구조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나의 핏줄에서 태어나 누군가는 최고 권력자가, 다른 누구는 고국 땅에 발붙이기도 어려운 북한 로열패밀리의 세계!

그러나 시대를 역행하는 세습 제도와 해외를 떠도는 북한 로열패밀리는 결국 체제 와해를 재촉하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공통된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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