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수준 이하 재난대응…빛난 시민 의식

입력 2016.02.02 (09:01) 수정 2016.02.0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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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요, 둘이서…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낭만적인 제주 모습을 그린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입니다.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제주로 떠나자는 건데요, 지난달 하순 며칠 동안만큼은 정반대였습니다. 제주도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보다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았죠.

사상 초유의 제주공항 마비사태 때문입니다. 32년 만의 폭설과 7년 만의 한파특보라는 기록적인 악천후. 제주공항은 마비됐고 관광객 수만 명이 제주도에 고립됐습니다. 고립도 고립이지만 관광객들이 더 힘들었던 건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응체계 때문입니다.

제주 폭설제주 폭설


■ 떠나요, 둘이서…힘들게 별로 없어요.

재난대응 매뉴얼은 수준 이하였습니다. 제주도 매뉴얼은 5백 명이 하루 머무는 상황을 가정했고 역할 분담도 모호했습니다. 공항공사도 마비 첫날 관광객 천여 명에게 모포 6백 장과 간식을 제공한 게 전부입니다. 저비용항공사는 이른바 ‘선착순 대기번호' 발급으로 혼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총체적인 매뉴얼 부재 속에 피해는 고스란히 관광객들이 떠안았습니다. 신문지나 종이상자를 바닥에 깔고 밤을 새우는가 하면 텐트까지 등장했습니다. 편의점 물품은 일찌감치 동났고 의료진도 미비했습니다. 숙소가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버스 등 대중교통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노숙 아닌 노숙을 해야했던 관광객들은 ‘힘들게 너무나도 많아’지쳐 갔습니다.

제주 폭설제주 폭설


■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이런 가운데 ‘만 원 박스’ 논란까지 일었습니다. 공항에서 체류객들에게 종이상자를 만 원에 팔아 폭리를 취한다는 겁니다. 결국 정찰제 수하물 포장용 상자로 확인되면서 잠잠해지긴 했습니다.

또 ‘근거리 택시요금 10만 원’같은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 인터넷에 나돌기도 했습니다. 관광 1번지 제주도의 이미지에 먹칠한 사례들입니다. 관광객들이 겪었던 불편을 생각하면 이런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돈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주 폭설제주 폭설


■ 떠나요, 제주도…푸르매가 살고 있는 곳.

‘푸르매’는 노래를 만든 최성원 씨가 그리워한 제주도의 한 소녀입니다. 제주도 이미지 회복에 나선 ‘푸르매’가 있습니다. 바로 제주도민들입니다.

제주도 내 한 관광정보 업체 대표가 SNS를 통해 제안한 ‘사랑의 민박 운동’에는 70명 넘게 모였습니다. 동참한 게스트하우스에는 제주공항 마비사태 동안 20여 명의 대학생들이 무료로 숙박했습니다. 인터넷 카페인 ‘제주맘 카페’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무료 숙식 제공' 글을 올렸습니다.

또 눈보라 속에 길을 잃은 중국인 가족들을 공항으로 데려다 준 익명의 제주도민과 이들 가족을 초대해 아침밥은 물론 교통편의까지 제공해준 가이드도 있었습니다. 중국인 가족들은 중국에 돌아가 제주도민의 따뜻한 도움을 주변에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 내 한 호텔은 체류객 130명에게 무료로 객실을 제공하는가 하면, 어떤 콘도에서는 투숙객들에게 비행기를 타지 못할 경우 방을 비워놓겠다고 제안해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업과 단체들이 스스로 마련한 간식은 지친 관광객들에게 작지만 큰 도움이 됐습니다.

■ 떠나요, 둘이서…모든 걸 훌훌 버리고.

공항공사와 제주도 등 행정기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혼란 속에서도, 제주도민들의 시민의식은 빛난 겁니다. 제 고장을 찾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다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제주도민들의 마음이 고생했던 관광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됐으면 합니다. 노숙 아닌 노숙의 힘든 기억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있고,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은 제주를 다시 찾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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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구하기 북새통…2박 3일 ‘공항 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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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2-02 09:01:59
    • 수정2016-02-02 16:44:35
    취재후·사건후
■ 떠나요, 둘이서…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낭만적인 제주 모습을 그린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입니다.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제주로 떠나자는 건데요, 지난달 하순 며칠 동안만큼은 정반대였습니다. 제주도로 떠나고 싶은 사람들보다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았죠.

사상 초유의 제주공항 마비사태 때문입니다. 32년 만의 폭설과 7년 만의 한파특보라는 기록적인 악천후. 제주공항은 마비됐고 관광객 수만 명이 제주도에 고립됐습니다. 고립도 고립이지만 관광객들이 더 힘들었던 건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응체계 때문입니다.

제주 폭설


■ 떠나요, 둘이서…힘들게 별로 없어요.

재난대응 매뉴얼은 수준 이하였습니다. 제주도 매뉴얼은 5백 명이 하루 머무는 상황을 가정했고 역할 분담도 모호했습니다. 공항공사도 마비 첫날 관광객 천여 명에게 모포 6백 장과 간식을 제공한 게 전부입니다. 저비용항공사는 이른바 ‘선착순 대기번호' 발급으로 혼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총체적인 매뉴얼 부재 속에 피해는 고스란히 관광객들이 떠안았습니다. 신문지나 종이상자를 바닥에 깔고 밤을 새우는가 하면 텐트까지 등장했습니다. 편의점 물품은 일찌감치 동났고 의료진도 미비했습니다. 숙소가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버스 등 대중교통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노숙 아닌 노숙을 해야했던 관광객들은 ‘힘들게 너무나도 많아’지쳐 갔습니다.

제주 폭설


■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이런 가운데 ‘만 원 박스’ 논란까지 일었습니다. 공항에서 체류객들에게 종이상자를 만 원에 팔아 폭리를 취한다는 겁니다. 결국 정찰제 수하물 포장용 상자로 확인되면서 잠잠해지긴 했습니다.

또 ‘근거리 택시요금 10만 원’같은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 인터넷에 나돌기도 했습니다. 관광 1번지 제주도의 이미지에 먹칠한 사례들입니다. 관광객들이 겪었던 불편을 생각하면 이런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돈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주 폭설


■ 떠나요, 제주도…푸르매가 살고 있는 곳.

‘푸르매’는 노래를 만든 최성원 씨가 그리워한 제주도의 한 소녀입니다. 제주도 이미지 회복에 나선 ‘푸르매’가 있습니다. 바로 제주도민들입니다.

제주도 내 한 관광정보 업체 대표가 SNS를 통해 제안한 ‘사랑의 민박 운동’에는 70명 넘게 모였습니다. 동참한 게스트하우스에는 제주공항 마비사태 동안 20여 명의 대학생들이 무료로 숙박했습니다. 인터넷 카페인 ‘제주맘 카페’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무료 숙식 제공' 글을 올렸습니다.

또 눈보라 속에 길을 잃은 중국인 가족들을 공항으로 데려다 준 익명의 제주도민과 이들 가족을 초대해 아침밥은 물론 교통편의까지 제공해준 가이드도 있었습니다. 중국인 가족들은 중국에 돌아가 제주도민의 따뜻한 도움을 주변에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 내 한 호텔은 체류객 130명에게 무료로 객실을 제공하는가 하면, 어떤 콘도에서는 투숙객들에게 비행기를 타지 못할 경우 방을 비워놓겠다고 제안해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업과 단체들이 스스로 마련한 간식은 지친 관광객들에게 작지만 큰 도움이 됐습니다.

■ 떠나요, 둘이서…모든 걸 훌훌 버리고.

공항공사와 제주도 등 행정기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혼란 속에서도, 제주도민들의 시민의식은 빛난 겁니다. 제 고장을 찾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다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제주도민들의 마음이 고생했던 관광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됐으면 합니다. 노숙 아닌 노숙의 힘든 기억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있고,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은 제주를 다시 찾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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