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칼 된 롯데의 ‘반일반한(半日半韓)’ 셔틀

입력 2016.06.1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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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부산롯데호텔은 19,397㎡의 호텔 용지와 부속 건물에 대해 종합토지세 2,900원과 재산세 80원을 냈다. 매입 당시에도 취득세와 등록세도 면제 받았다.

'재산세 80원'으로 논란의 중심에

이에 앞서 1970년대 롯데호텔 서울 소공동 본점을 지을 때도 해당 용지 매입 지원을 비롯해 취득세와 등록세 면제, 재산세·소득세·법인세 5년간 면제와 이후 3년간 절반 면제, 관세와 물품세 영구 면제 등의 혜택도 함께 받았다.

롯데호텔과 백화점본점롯데호텔과 백화점본점


이처럼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은 한국 진출 이후 두 나라의 장점과 차이를 적절히 활용하고 혜택도 맘껏 누렸다. 한일 두 나라를 오가면서 '셔틀 경영'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지만 '형제의 난'에 이은 유례 없는 검찰 수사의 칼날도 한일 간에 걸친 양다리 경영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롯데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14일 주요 계열사에 대한 2차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사진은 이날 압수수색 중인 서울 동작구 롯데케미칼 본사.롯데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14일 주요 계열사에 대한 2차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사진은 이날 압수수색 중인 서울 동작구 롯데케미칼 본사.


실제로 검찰은 15일 있었던 롯데그룹에 대한 압수물 분석에서 롯데케미칼이 일본의 롯데 계열사를 통해 자금 세탁을 하고 비자금을 조성해 온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관 기사]☞ 롯데 한·일 계열사 ‘비자금 공조’ 포착

일본에서 맨손으로 신화를 이룩한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 회장은 한국에서는 사실상 거저먹다시피 재벌 그룹의 반열에 올랐다. 반일반한(半日半韓). 뛰어난 사업가적 자질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일본인 행세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해낸 덕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투자법의 최고 수혜자 신격호

한일수교 이후 반일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일본 기업이면서도 국민적 거부감을 불식시킨 것은 물론이고오히려 일본 재계를 정복한 애국지사 대접까지 받을 정도로 거침 없이 성장해왔다.

한국 롯데의 시작은 1966년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협정이 한·일 간 체결된 이후 본격화 된다. 당시 외자도입특례법에 따라 롯데에 취득세와 소득세, 법인세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1970년대 롯데가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반도호텔을 비롯한 민간 건물과 국립도서관까지 손쉽게 손에 넣었다. 1980년 롯데백화점을 짓기 위해 산업은행 건물을 사들일 때도 특혜 논란이 가시지 않았다.

롯데에 매각돼 철거를 앞두고 있는 구 국립중앙도서관 모습 1974.7.19롯데에 매각돼 철거를 앞두고 있는 구 국립중앙도서관 모습 1974.7.19


심지어 당시 서울시가 강북 억제를 위해 마련한 '백화점 건립 금지'의 조항을 비켜가기 위해 '롯데쇼핑센터'라 이름을 붙인 뒤 변칙적인 방법으로 롯데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롯데백화점의 법인명은 지금도 롯데쇼핑주식회사다.

고인이 된 손정목 전 서울시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는 이같은 내용과 함께 현재 롯데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도 롯데 호텔을 위해 남산 중턱에 있는 어린이 회관으로 이전하게 됐다는 주장도 실려 있다.

이 때문에 어린이 회관은 4년 만에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도 1987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으로 쓰이고 있다.

부산롯데호텔과 백화점 투자도 대박

롯데껌에서 시작한 한국 롯데는 이후에도 외자 투자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계속 몸집을 불려가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금리차와 환율 혜택도 쏠쏠하게 봤다. 이 같은 외국 기업으로서의 혜택은 부산롯데월드(현재는 호텔, 백화점) 건립에서 다시 한 번 정점을 찍는다.

부산롯데월드 개관식 1997.3.2부산롯데월드 개관식 1997.3.2


롯데는 1984년 말 부산의 중심지 서면의 부산상고 땅 35,267㎡를 349억 원에 부산시교육위원회로부터 사들인다. 공립인 부산상고는 금싸라기 땅을 두고 시립화장장이 있던 부산진구 당감동 산 속으로 이전하게 된다.

롯데는 전체 땅의 55%인 19,397㎡를 외국 법인인 롯데호텔 명의로 매입했다. 19억 원이 넘는 취득세와 등록세를 면제 받았다. 또 매입 후 착공 때까지 가장 많이 낸 해의 세금이 1991년의 종합토지세 2,900원과 재산세 80원에 불과하다. 당시 349억 원에 산 부산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의 땅은 올해 공시지가만 해도 4,700억 원이 넘는다.

부산롯데타운 타워동 기공 2009.3.9부산롯데타운 타워동 기공 2009.3.9


롯데는 또 옛 부산 시청 터에 짓고 있는 부산 롯데타운 공유수면 매립과 용도 변경 문제 등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다.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을 짓기로 해놓고 주거용으로 용도 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자 공사를 중단한 채 백화점과 마트만 개장해 임시사용허가만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셔틀과 전철, 일본 학습 효과?

2001년 6월 30일, 헙법재판소의 위헌소원청구까지 가는 논란 끝에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의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됐다. 유통업계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롯데백화점은 실제로 큰 매출 손실 없이 단기간에 이를 극복해 낸다.

백화점 운행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과 셔틀버스 2001.6.백화점 운행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과 셔틀버스 2001.6.


롯데백화점 본점을 비롯해 영등포점, 잠실점, 부산본점 등 당시 영업 중이던 대부분의 백화점이 지하철이나 전철과 직접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이용객들의 교통 문제로 인한 매출 부진은 크지 않았다.

이미 매입한 롯데 백화점 예정지도 대부분 지하철과 전철역에 인접해 있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백화점들도 역세권 입점이 필수가 됐고 전철역은 영업에 결정적 변수가 됐다.

신 회장이 일본에서 몸소 체험한 것을 한국에서도 적용하면서 그대로 들어맞았고 부동산 가격 상승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롯데와 함께 대기업들이 백화점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역세권도 아니고 자금도 부족한 지역의 토종 백화점들은 하나 둘 도산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지하철 혜택 최고

특히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은 용지 매입 뒤 1년이 안돼 부산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고 백화점과 호텔 개장 이후 에는 2호선이 백화점에 연결되는 서면역을 중심으로 잇따라 개통됐다.

고객들로 붐비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고객들로 붐비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당시에는 일반인들은 물론 지역의 기업인들도 지하철 역세권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잘 몰랐을 때다. 하지만 지하철 2개 노선이 십자로 지나는 부산 서면 일대는 부산은 물론 경남과 울산 지역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초번화가가 됐다. 개장 초기부터 백화점 매출도 전국 상위권에 들었다.

IMF와 애국심, 그리고 환차익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서의 혜택과 부동산으로 단맛을 보던 롯데 그룹에 IMF라는 또 한번의 기회가 온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이자율이 폭등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할 때 신격호 회장도 모국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국내 송금 운동에 동참한다.

개인 돈과 은행 차입금 5억 달러를 한국에 송금하면서 재일동포들의 모국 돕기 운동에 불을 지폈다. 금모으기 운동과 함께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애국적인 행위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외환 위기 당시 재일동포들의 엔화 모국송금 활동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1997.12.27외환 위기 당시 재일동포들의 엔화 모국송금 활동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1997.12.27


이 같은 모국 돕기 운동은 환차익과 함께 헐값에 나온 국내 기업과 부동산 매입을 위한 더 할 수 없는좋은 기회가 됐다. 차입금이 적은 롯데 그룹은 IMF 외환 위기 때 원화대비 초강세를 보인 일본 쪽 자금까지 들여와 사업 규모를 대폭 늘리게 된다. 외환 위기 극복 후 롯데그룹의 자산 규모는 배로 불어 있었다.

최고 마천루... 애향심인가 노욕인가?

신격호 회장은 20여 년 전부터 서울과 부산에 100층이 넘는 랜드마크 빌딩을 지을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아울러 최고 마천루를 모국에 짓겠다는 것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것이 주변인들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롯데월드타워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부산롯데타워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초고층 빌딩을 90이 넘은 노인의 생애에 반드시 완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당사자와 그룹 관계자들의 마음을 급하게 했고 여러 곳에서 무리한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껌' 콤플렉스가 거인과 마천루 욕심 잉태?

그리고 초고층 빌딩에 욕심을 낸 것은 '껌'으로 대변되는 롯데의 '작음'에 대한 콤플렉스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룹 이미지처럼 짠돌이 경영의 대명사이자 이대호 이전까지는 소총부대로 불리는 스몰볼을 위주로 해온 프로 야구 롯데가 자이언츠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거인'이 되고 싶은 롯데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 같은 욕심들이 겹쳐 이른바 '마천루의 저주'가 롯데에도 닥친 것이 아닌가라는 조심스런 분석들이 나오기도 한다. 신격호 회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한일간 셔틀 경영과 국적 논란

신격호 총괄 회장이 수십 년간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은 일본에 체류하면서 양국의 롯데를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 시키면서 이른바 셔틀 경영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양국의 특징과 소비 성향 법적인 문제까지 철저히 연구하고 이용한 결과 두 나라간 이자율 차이 환율 차이 등도 제대로 활용해 왔다. 심지어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신격호 회장이 셔틀 경영도 접고 18개월 이상 안전한 한국에서 머물기도 하는 등 두 나라의 환경까지도 철저히 활용했다. 결혼과 가족들의 구성도 한국계 반 일본계 반이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짠물 경영과 안전 자산인 부동산 투자, 그리고 현금 확보를 통한 경영 안정을 이루어 오면서 정치권에도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외풍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기업들과 달리 비정상적일 만큼 고속 성장 속에서도 검찰 수사 한 번 제대로 받지 않고 수십 년을 버터 왔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는 신격호 총괄회장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는 신격호 총괄회장


하지만 세월 앞에는 장사 없는 법.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던 신격호 회장의 판단력이 이미 많은 것을 놓쳤다. 자식들 간의 경영권 분쟁은 미리 정리가 가능했던 부분이지만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연이어 망신을 사고 있다.



최근 회장실 등에 대한 압수 수색에서 나온 수십억 원의 돈도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지배구조는 물론 회계 등 경영 전반에 걸쳐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신회장과 그 일가들의 기업 경영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20세기 수준으로 생각한 데서 이번 사태가 빚어진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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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날의 칼 된 롯데의 ‘반일반한(半日半韓)’ 셔틀
    • 입력 2016-06-16 17:12:10
    취재K
1991년 부산롯데호텔은 19,397㎡의 호텔 용지와 부속 건물에 대해 종합토지세 2,900원과 재산세 80원을 냈다. 매입 당시에도 취득세와 등록세도 면제 받았다.

'재산세 80원'으로 논란의 중심에

이에 앞서 1970년대 롯데호텔 서울 소공동 본점을 지을 때도 해당 용지 매입 지원을 비롯해 취득세와 등록세 면제, 재산세·소득세·법인세 5년간 면제와 이후 3년간 절반 면제, 관세와 물품세 영구 면제 등의 혜택도 함께 받았다.

롯데호텔과 백화점본점

이처럼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은 한국 진출 이후 두 나라의 장점과 차이를 적절히 활용하고 혜택도 맘껏 누렸다. 한일 두 나라를 오가면서 '셔틀 경영'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지만 '형제의 난'에 이은 유례 없는 검찰 수사의 칼날도 한일 간에 걸친 양다리 경영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롯데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14일 주요 계열사에 대한 2차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사진은 이날 압수수색 중인 서울 동작구 롯데케미칼 본사.

실제로 검찰은 15일 있었던 롯데그룹에 대한 압수물 분석에서 롯데케미칼이 일본의 롯데 계열사를 통해 자금 세탁을 하고 비자금을 조성해 온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관 기사]☞ 롯데 한·일 계열사 ‘비자금 공조’ 포착

일본에서 맨손으로 신화를 이룩한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 회장은 한국에서는 사실상 거저먹다시피 재벌 그룹의 반열에 올랐다. 반일반한(半日半韓). 뛰어난 사업가적 자질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일본인 행세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해낸 덕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 투자법의 최고 수혜자 신격호

한일수교 이후 반일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일본 기업이면서도 국민적 거부감을 불식시킨 것은 물론이고오히려 일본 재계를 정복한 애국지사 대접까지 받을 정도로 거침 없이 성장해왔다.

한국 롯데의 시작은 1966년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협정이 한·일 간 체결된 이후 본격화 된다. 당시 외자도입특례법에 따라 롯데에 취득세와 소득세, 법인세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다.

1970년대 롯데가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반도호텔을 비롯한 민간 건물과 국립도서관까지 손쉽게 손에 넣었다. 1980년 롯데백화점을 짓기 위해 산업은행 건물을 사들일 때도 특혜 논란이 가시지 않았다.

롯데에 매각돼 철거를 앞두고 있는 구 국립중앙도서관 모습 1974.7.19

심지어 당시 서울시가 강북 억제를 위해 마련한 '백화점 건립 금지'의 조항을 비켜가기 위해 '롯데쇼핑센터'라 이름을 붙인 뒤 변칙적인 방법으로 롯데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롯데백화점의 법인명은 지금도 롯데쇼핑주식회사다.

고인이 된 손정목 전 서울시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는 이같은 내용과 함께 현재 롯데호텔 주차장 자리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도 롯데 호텔을 위해 남산 중턱에 있는 어린이 회관으로 이전하게 됐다는 주장도 실려 있다.

이 때문에 어린이 회관은 4년 만에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도 1987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으로 쓰이고 있다.

부산롯데호텔과 백화점 투자도 대박

롯데껌에서 시작한 한국 롯데는 이후에도 외자 투자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계속 몸집을 불려가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금리차와 환율 혜택도 쏠쏠하게 봤다. 이 같은 외국 기업으로서의 혜택은 부산롯데월드(현재는 호텔, 백화점) 건립에서 다시 한 번 정점을 찍는다.

부산롯데월드 개관식 1997.3.2

롯데는 1984년 말 부산의 중심지 서면의 부산상고 땅 35,267㎡를 349억 원에 부산시교육위원회로부터 사들인다. 공립인 부산상고는 금싸라기 땅을 두고 시립화장장이 있던 부산진구 당감동 산 속으로 이전하게 된다.

롯데는 전체 땅의 55%인 19,397㎡를 외국 법인인 롯데호텔 명의로 매입했다. 19억 원이 넘는 취득세와 등록세를 면제 받았다. 또 매입 후 착공 때까지 가장 많이 낸 해의 세금이 1991년의 종합토지세 2,900원과 재산세 80원에 불과하다. 당시 349억 원에 산 부산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의 땅은 올해 공시지가만 해도 4,700억 원이 넘는다.

부산롯데타운 타워동 기공 2009.3.9

롯데는 또 옛 부산 시청 터에 짓고 있는 부산 롯데타운 공유수면 매립과 용도 변경 문제 등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다.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을 짓기로 해놓고 주거용으로 용도 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자 공사를 중단한 채 백화점과 마트만 개장해 임시사용허가만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셔틀과 전철, 일본 학습 효과?

2001년 6월 30일, 헙법재판소의 위헌소원청구까지 가는 논란 끝에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의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됐다. 유통업계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롯데백화점은 실제로 큰 매출 손실 없이 단기간에 이를 극복해 낸다.

백화점 운행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과 셔틀버스 2001.6.

롯데백화점 본점을 비롯해 영등포점, 잠실점, 부산본점 등 당시 영업 중이던 대부분의 백화점이 지하철이나 전철과 직접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이용객들의 교통 문제로 인한 매출 부진은 크지 않았다.

이미 매입한 롯데 백화점 예정지도 대부분 지하철과 전철역에 인접해 있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백화점들도 역세권 입점이 필수가 됐고 전철역은 영업에 결정적 변수가 됐다.

신 회장이 일본에서 몸소 체험한 것을 한국에서도 적용하면서 그대로 들어맞았고 부동산 가격 상승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롯데와 함께 대기업들이 백화점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역세권도 아니고 자금도 부족한 지역의 토종 백화점들은 하나 둘 도산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지하철 혜택 최고

특히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은 용지 매입 뒤 1년이 안돼 부산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고 백화점과 호텔 개장 이후 에는 2호선이 백화점에 연결되는 서면역을 중심으로 잇따라 개통됐다.

고객들로 붐비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당시에는 일반인들은 물론 지역의 기업인들도 지하철 역세권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잘 몰랐을 때다. 하지만 지하철 2개 노선이 십자로 지나는 부산 서면 일대는 부산은 물론 경남과 울산 지역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초번화가가 됐다. 개장 초기부터 백화점 매출도 전국 상위권에 들었다.

IMF와 애국심, 그리고 환차익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서의 혜택과 부동산으로 단맛을 보던 롯데 그룹에 IMF라는 또 한번의 기회가 온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이자율이 폭등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할 때 신격호 회장도 모국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국내 송금 운동에 동참한다.

개인 돈과 은행 차입금 5억 달러를 한국에 송금하면서 재일동포들의 모국 돕기 운동에 불을 지폈다. 금모으기 운동과 함께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애국적인 행위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외환 위기 당시 재일동포들의 엔화 모국송금 활동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1997.12.27

이 같은 모국 돕기 운동은 환차익과 함께 헐값에 나온 국내 기업과 부동산 매입을 위한 더 할 수 없는좋은 기회가 됐다. 차입금이 적은 롯데 그룹은 IMF 외환 위기 때 원화대비 초강세를 보인 일본 쪽 자금까지 들여와 사업 규모를 대폭 늘리게 된다. 외환 위기 극복 후 롯데그룹의 자산 규모는 배로 불어 있었다.

최고 마천루... 애향심인가 노욕인가?

신격호 회장은 20여 년 전부터 서울과 부산에 100층이 넘는 랜드마크 빌딩을 지을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아울러 최고 마천루를 모국에 짓겠다는 것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것이 주변인들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롯데월드타워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부산롯데타워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초고층 빌딩을 90이 넘은 노인의 생애에 반드시 완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당사자와 그룹 관계자들의 마음을 급하게 했고 여러 곳에서 무리한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껌' 콤플렉스가 거인과 마천루 욕심 잉태?

그리고 초고층 빌딩에 욕심을 낸 것은 '껌'으로 대변되는 롯데의 '작음'에 대한 콤플렉스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룹 이미지처럼 짠돌이 경영의 대명사이자 이대호 이전까지는 소총부대로 불리는 스몰볼을 위주로 해온 프로 야구 롯데가 자이언츠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거인'이 되고 싶은 롯데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 같은 욕심들이 겹쳐 이른바 '마천루의 저주'가 롯데에도 닥친 것이 아닌가라는 조심스런 분석들이 나오기도 한다. 신격호 회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한일간 셔틀 경영과 국적 논란

신격호 총괄 회장이 수십 년간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은 일본에 체류하면서 양국의 롯데를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 시키면서 이른바 셔틀 경영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양국의 특징과 소비 성향 법적인 문제까지 철저히 연구하고 이용한 결과 두 나라간 이자율 차이 환율 차이 등도 제대로 활용해 왔다. 심지어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신격호 회장이 셔틀 경영도 접고 18개월 이상 안전한 한국에서 머물기도 하는 등 두 나라의 환경까지도 철저히 활용했다. 결혼과 가족들의 구성도 한국계 반 일본계 반이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짠물 경영과 안전 자산인 부동산 투자, 그리고 현금 확보를 통한 경영 안정을 이루어 오면서 정치권에도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외풍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기업들과 달리 비정상적일 만큼 고속 성장 속에서도 검찰 수사 한 번 제대로 받지 않고 수십 년을 버터 왔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는 신격호 총괄회장

하지만 세월 앞에는 장사 없는 법.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했던 신격호 회장의 판단력이 이미 많은 것을 놓쳤다. 자식들 간의 경영권 분쟁은 미리 정리가 가능했던 부분이지만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연이어 망신을 사고 있다.



최근 회장실 등에 대한 압수 수색에서 나온 수십억 원의 돈도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지배구조는 물론 회계 등 경영 전반에 걸쳐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신회장과 그 일가들의 기업 경영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20세기 수준으로 생각한 데서 이번 사태가 빚어진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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