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일왕, 개헌 저지하나?

입력 2016.07.15 (10:51) 수정 2016.07.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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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日王)은 2001년 자신이 백제계 후손임을 고백했다.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日王)은 2001년 자신이 백제계 후손임을 고백했다.


“나 자신, 간무(桓武)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돼,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자신의 생일에 공개석상에서 스스로 백제의 후손임을 고백한 내용이다. 일본 왕실이 명백히 백제의 핏줄이라는 고백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로서는 당연한 사실이 일본에겐 충격이었다.



올해 82세인 아키히토 일왕은 2005년에 사이판에 있는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을 참배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의 잘못을 씻으려는 참회의 행보를 보인 것이다.

또 2015년 8월 15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어린 시절 전쟁의 참화를 지켜봤던 일왕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과를 한 것이었다.



이처럼‘일본의 조용한 양심’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일왕이“살아있는 동안 퇴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일본 궁내청 관계자들이 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으로 살아있는 왕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온라인에서는 아키히토 일왕이‘아베의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퇴위라는 강수를 둔 것’이라는 글이 떠돌기 시작했다.‘초간 선데이’(秒間 SUNDAY)라는 온라인 매체는“(일왕이 퇴위할 경우) 황실전범 개정이 헌법 개정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13일 일본 언론들이 일왕의 생전 양위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13일 일본 언론들이 일왕의 생전 양위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일왕의 발언은“헌법이 정한 상징으로서의 업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일왕의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뿐이다. 그런데 일왕이 퇴임 의사를 밝히며 굳이‘상징 일왕’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현행‘일본국 헌법'(1946년 제정)을 지키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이끈‘대일본제국헌법’(1889년)의 1조는“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일왕이 이를 통치한다”고 씌어 있다. 이에 비해 전후 새로 만든 현재의 일본 헌법의 1조는“일왕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다.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고 돼 있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인들이 이를 통해 일본의 주권자는 일왕이 아닌 국민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통치자’의 지위에서 내려온 일왕은 일본의‘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다.

일본 헌법이 일왕의 지위를‘상징’에 한정한 것은 옛 일본 헌법이“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군에 대한 명령권을 갖는 것은 일왕뿐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징을 명문화해서 군 통수권을 빼앗은 것이다.

이처럼 현재 일본 헌법은 일왕을 단순히‘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두고 왕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퇴위’라는 비상수단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키히토 일왕이‘생전 양위’카드를 갑자기 던진 이유는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가‘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개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초강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자민당이 공개한 개헌 초안에 현행 헌법상“일본 국민의 상징”인 일왕을 국가의 “원수”로 승격하는 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 헌법 초안에 따라 일왕을‘원수’로 명문화할 경우, 일왕은 기존의 의례행사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조약 체결 등 실질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얼핏 보면 왕의 권력이 커지는 것 같지만, 이는 메이지 시대를 이끈 원훈 세력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메이지 일왕을 명목상 앞으로 내세웠던 수법과 마찬가지다. 즉, 일본 내각과 왕실 사이의 권력관계에서 왕실의 입지는 오히려 약해지고 책임만 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 신문은 자민당의 헌법 전문은 '국민이 일왕을 모시는' 상하관계로 두고 있어 국민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것은 최근 참의원 선거 승리를 계기로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헌법 개정을 저지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파장이 커지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일왕이 양위의 뜻을 밝힌 시점이 평화헌법의 개정이 가능해진 아베의 참의원 선거 승리 사흘 뒤에 나온 점에 주목했다.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갈등은 일본 정계에서도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왔다. 패전 70주년을 맞아 아키히토 일왕이 사상 처음으로‘반성’을 추도문에 담는 것으로 알려지자 아베 총리는 일왕보다 하루 먼저 주어를 생략한 채‘반성’과‘사죄’가 담긴 담화문을 발표했다. 패전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다.

일왕의 퇴위 의사 표명에 대해 일본 정부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언급을 피하겠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아베 총리는 15∼16일 몽골에서 열릴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ASEM) 참석차 출국하기에 앞서 하네다(羽田)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사안의 성격상 코멘트를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7월 4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한국의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살펴보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7월 4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한국의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살펴보고 있다.


에도시대 이후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이 물러나려는 일이 벌어지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왕위를 물려줄 경우, 첫째 아들인 나루히토 왕세자가 승계해야 한다. 그러나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왕위는 후미히토 왕자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현재 일본의 왕실 관련 법률인‘황실전범(皇室典範)’에는 여성이 왕위를 승계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후손들이 번갈아 가며 권력 쟁탙과 문화전파를 이뤄온 일본에서 백제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 아키히토 일왕. 역사 왜곡과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일본에서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관기사]
☞ 일왕, 조만간 퇴위 표명…왕세자에 양위
☞ 일 정치인들, 야스쿠니 참배…일왕, ‘반성’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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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계 일왕, 개헌 저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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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6-07-15 11:02:30
    취재K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日王)은 2001년 자신이 백제계 후손임을 고백했다.

“나 자신, 간무(桓武)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돼,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2001년 12월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자신의 생일에 공개석상에서 스스로 백제의 후손임을 고백한 내용이다. 일본 왕실이 명백히 백제의 핏줄이라는 고백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로서는 당연한 사실이 일본에겐 충격이었다.



올해 82세인 아키히토 일왕은 2005년에 사이판에 있는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을 참배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의 잘못을 씻으려는 참회의 행보를 보인 것이다.

또 2015년 8월 15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어린 시절 전쟁의 참화를 지켜봤던 일왕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과를 한 것이었다.



이처럼‘일본의 조용한 양심’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일왕이“살아있는 동안 퇴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일본 궁내청 관계자들이 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으로 살아있는 왕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온라인에서는 아키히토 일왕이‘아베의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퇴위라는 강수를 둔 것’이라는 글이 떠돌기 시작했다.‘초간 선데이’(秒間 SUNDAY)라는 온라인 매체는“(일왕이 퇴위할 경우) 황실전범 개정이 헌법 개정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13일 일본 언론들이 일왕의 생전 양위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일왕의 발언은“헌법이 정한 상징으로서의 업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일왕의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뿐이다. 그런데 일왕이 퇴임 의사를 밝히며 굳이‘상징 일왕’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현행‘일본국 헌법'(1946년 제정)을 지키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이끈‘대일본제국헌법’(1889년)의 1조는“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일왕이 이를 통치한다”고 씌어 있다. 이에 비해 전후 새로 만든 현재의 일본 헌법의 1조는“일왕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다.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고 돼 있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인들이 이를 통해 일본의 주권자는 일왕이 아닌 국민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통치자’의 지위에서 내려온 일왕은 일본의‘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다.

일본 헌법이 일왕의 지위를‘상징’에 한정한 것은 옛 일본 헌법이“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군에 대한 명령권을 갖는 것은 일왕뿐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징을 명문화해서 군 통수권을 빼앗은 것이다.

이처럼 현재 일본 헌법은 일왕을 단순히‘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두고 왕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퇴위’라는 비상수단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키히토 일왕이‘생전 양위’카드를 갑자기 던진 이유는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가‘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개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초강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자민당이 공개한 개헌 초안에 현행 헌법상“일본 국민의 상징”인 일왕을 국가의 “원수”로 승격하는 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 헌법 초안에 따라 일왕을‘원수’로 명문화할 경우, 일왕은 기존의 의례행사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조약 체결 등 실질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얼핏 보면 왕의 권력이 커지는 것 같지만, 이는 메이지 시대를 이끈 원훈 세력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메이지 일왕을 명목상 앞으로 내세웠던 수법과 마찬가지다. 즉, 일본 내각과 왕실 사이의 권력관계에서 왕실의 입지는 오히려 약해지고 책임만 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 신문은 자민당의 헌법 전문은 '국민이 일왕을 모시는' 상하관계로 두고 있어 국민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것은 최근 참의원 선거 승리를 계기로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헌법 개정을 저지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파장이 커지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일왕이 양위의 뜻을 밝힌 시점이 평화헌법의 개정이 가능해진 아베의 참의원 선거 승리 사흘 뒤에 나온 점에 주목했다.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갈등은 일본 정계에서도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왔다. 패전 70주년을 맞아 아키히토 일왕이 사상 처음으로‘반성’을 추도문에 담는 것으로 알려지자 아베 총리는 일왕보다 하루 먼저 주어를 생략한 채‘반성’과‘사죄’가 담긴 담화문을 발표했다. 패전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다.

일왕의 퇴위 의사 표명에 대해 일본 정부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언급을 피하겠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아베 총리는 15∼16일 몽골에서 열릴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ASEM) 참석차 출국하기에 앞서 하네다(羽田)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사안의 성격상 코멘트를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7월 4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한국의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살펴보고 있다.

에도시대 이후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이 물러나려는 일이 벌어지자 상황이 복잡해졌다. 왕위를 물려줄 경우, 첫째 아들인 나루히토 왕세자가 승계해야 한다. 그러나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왕위는 후미히토 왕자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현재 일본의 왕실 관련 법률인‘황실전범(皇室典範)’에는 여성이 왕위를 승계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후손들이 번갈아 가며 권력 쟁탙과 문화전파를 이뤄온 일본에서 백제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 아키히토 일왕. 역사 왜곡과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일본에서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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